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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책이 아니다(Ceci n’est pas un livre)!
이것은 책이 아니다(Ceci n’est pas un livre)!
  •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4.01.3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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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휴대폰에 출판기념회를 알리는 지인 정치인들의 메시지가 자주 뜬다. 선거철임을 알리는 신호다.

현역 국회의원들은 물론, 정치에 입문하는 신인들까지 저마다 결연한 각오를 담은 출판기념회 초청장을 보내온다. 국민의힘 소속 사람들은 희망의 정치를 강조하고, 민주당 소속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약속하며, 제3지대 소속 사람들은 소통과 융합을, 그밖에 ‘진보’ 진영 소속 사람들은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는 책을 내놓고 있다. 

책의 제목과 목차만 본다면,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모두 멋지고 훌륭하다. 국회의원 253명을 뽑는 선거가 전국의 지역구 253개에서 치러지니, 한 지역구에 3~4명의 후보가 얼굴을 알리고자 출판기념회를 가진다면, 본격적인 선거가 치러지기 전에 약 1,000종의 책이 나오는 셈이다. 여기에 비례대표 47명도 나름 자신들의 지명도를 높이고자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으니, 이보다 훨씬 많은 책이 쏟아진다. 

출판시장은 꽁꽁 얼어붙었건만,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는 펄펄 끓어오른다.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자신을 알리고 선거자금을 합법적으로 모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 출판기념회장이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책 한 권 값만 달랑 내고 나온다면, 눈치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체면이 깎이지 않으려면 적어도 몇 십만 원을 내야 한다. 출판기념회 초청장을 받으면, 참석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한 가지, 독자 여러분에게 고백하고 싶은 게 있다. 필자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디플로) 한국어판을 발행하고 나서부터, 르디플로를 구독하거나, 필자나 후원자로서 르디플로에 도움을 준 친(親)르디플로 인사들을 편애하는 ‘성향’을 가지게 됐다. 아무리 똑똑하고 유명한 지인이라도, 그가 르디플로를 모른다면 일단 제쳐놓게 된다. 반면, 친 르디플로 인사를 만나면 전생의 인연을 만난 듯 참 반갑기만 하다.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에는 별로 가지 않지만, 친 르디플로 인사의 출판기념회에는 참석하는 편이다.

며칠 전, 친 르디플로 인사 P씨의 출판기념회에서 받은 책을 보고 화려한 표지와 비싼 종이의 질에 살짝 주눅이 들었다. 자고 나면 종잇값과 잉크값이 오르는 현실에서 제작비를 늘 걱정해야 하는 이 출판업자는 손끝으로 ‘돈의 무게’를 재어본다. 

“이거, 제작비가 꽤 나오겠는걸…”

결혼식의 축의금을 내듯, 출판회장 입구에서 받은 흰 봉투에 굵은 펜으로 ‘축, 승리 기원’이라고 쓴 뒤, 5만 원짜리 몇 장(액수는 비밀!)을 넣어 책을 받아 식장 안으로 들어가니, 낯익은 인사들이 더러 눈에 띈다. “저들은 르디플로 독자가 아니고, 저기에 르디플로 독자분이 있군.” 늘 습관적으로 그렇듯이, 필자의 눈에는 르디플로 독자들만 들어온다. P씨가 당선되면 좋겠지만, 혹여 낙선되더라도 르디플로의 독자로 계속 남아주길 바라며 그와 눈도장을 찍고 그의 책을 든 채 식장을 나선다. 그런데, 의혹이 지워지지 않는다. 정치 활동하느라 바쁠 텐데, 이런 묵직한 책을 언제 썼을까?

현역 의원들은 지역구 관리에, 상임위 출석에, 법안 제출 및 심사로 바빠 보좌진이 대필하겠지만, P씨와 같은 정치 신인들은 생업활동과 각종 시민운동으로 정신없을 터인데…, 하지만 아무도 그의 책에 대한 진실성과 진정성을 묻지 않는다. 한 편에 나처럼 출판업자로 보이는 이들의 실루엣이 비치지만, 굳이 그들의 정체를 알고 싶지 않아 자리를 떠났다. 

출판기념회 식장 옆 카페에 들러, 혹시나 하는 궁금증으로 책을 살펴보니 마치 요즘 유행하는 GPT가 써준 것처럼 문장이 매끄럽고 유려하지만, 군데군데 문장이 꼬여있고 오탈자가 눈에 띈다. P가 직접 쓴 것일까? 대필 작가가 급하게 써준 것일까? 선거 시즌이면 1,000만~2000만 원을 받고 1~2주 만에 유력정치인의 출판기념회용 자서전이나 책을 써준다는 한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설마 그랬을까’하는 심정으로 P씨의 진실성을 믿어본다. 

하지만 책의 제목과 표지는 그럴싸하지만, 내용은 얼마 전 대통령이 특검을 거부한 그의 특수관계인이 쓴 허접한 박사 논문을 연상시킨다.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은 뒤 휴지를 찾아 주위를 살펴보는데, 누군가 놓고 간 출판기념회의 그 책이 보인다. 깜박 잊고 간 것이겠지 생각하지만,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책을 보며 모멸감이 밀려온다. 

30년 넘게 글 장인, 편집자로 살아왔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욱 글을 쓸 때마다 매번 고민스럽다. 거울에 비친, 듬성듬성 빠지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바라본다. 마치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물멍처럼, 장작이 지직거리며 벌겋게 타오르는 불꽃에 혼을 빼는 불멍처럼, 거울 앞에서 경(鏡)멍을 하고 있자니 최근의 어려운 출판시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뜩이나 IMF 때보다 더 어려운 경기침체에 잔뜩 움츠려 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 하마스 전쟁, 미사일이 휙휙 날아가는 일촉즉발의 남북 대결 등으로 고조되는 긴장감 속에서, 누가 책과 잡지를 찾을까? 

출판사들이 속속 문을 닫고, 물류회사도 퍽퍽 쓰러지고 있다. 르디플로의 경쟁지라 할 시사주간지와 월간지들이 맥없이 쓰러지거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어려움을 겪고 있어, 르디플로 발행인으로서 사태의 심각성을 하루하루 뼈저리게 느낀다.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는 선거운동 겸 선거자금 모금의 수단으로 너도나도 책을 내 출판기념회를 가지며 지성미를 뽐내겠지만, 이를 지켜보는 필자의 눈에는 중고서점에서조차 거절하는 함량 미달의 책을 뿌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알라딘과 예스24의 중고책 사이트에서 정치인들의 책을 찾는 것이 ‘미션 임파서블’인 이유는, 책의 본질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작품에 담배 파이프를 그려 넣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한 줄의 문장을 적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당시 관객과 비평가들은 혼란에 빠졌다. 사실 그것은 파이프를 흉내낸 그림일 뿐, 파이프는 아니다. 마그리트는 이렇게 파이프, 파이프 그림, 파이프라는 단어 가운데 진짜가 무엇인지 묻는다. 책이 책이 아니라, 선거를 위한 도구가 된 현실에서, 마그리트가 살아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이건 책이 아니다(Ceci n’est pas un livre)’

연말연시에 종이 거래업체에서 또 종잇값을 올렸고, 조만간 또 8%나 올릴 것이라고 예고한다. 인쇄소에서는 정치인들의 책을 급히 찍느라 르디플로가 발주한 단행본들의 인쇄날짜가 며칠 더 미뤄질 것이라고 변명한다.

여의도에 입성하려는 정치인들이나 정치 지망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후원금을 받는 용도로 쓰이는 당신들의 ‘책’ 때문에 종잇값만 오릅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독자로서, 또는 필자로서 르디플로와 인연을 맺어온 친 르디플로 후보들에게 감히 부탁을 드린다.

“르디플로는 당신들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앞으로 출판기념회를 또 가지실 예정인지요? 그렇다면, 무리해서 급조한 책을 내놓는 것보다는, 당신들의 정치철학에 맞는 책들(일례로, 르디플로 과월호)을 구매해서 후원자들에게 건네시는 것은 어떨지요?”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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