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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어벤져스>의 타노스와 <기생충>의 기택을 관통하는 것에 관하여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어벤져스>의 타노스와 <기생충>의 기택을 관통하는 것에 관하여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19.06.18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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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가 과학적 방법을 만나면서 품게 된 욕망 중 하나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일은 전부 자연적 현상으로 규명할 수 있으리란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려 할 때 그런 믿음을 유독 내보인다. 이것은 꽤 만족할만한 결과를 산출해 낸 것처럼 포장되어서,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자주 빠져들게 만들곤 한다.

 

먼저 <기생충>이 봉준호 감독의 천재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봉준호 감독의 천재성을 재론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서 회자되는 계급, 위계, 사회적 불평등과 같은 이야기가 왜 강박증 환자의 독백처럼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되고 있는지를 따져보고 싶기는 하다. 그것이 어떤 다른 메시지와 연결된다면 금상첨화고.

칼세이건은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라는 책에서 ‘존 컬훈(John B. Calhoun)이라는 과학자가 쥐를 통해 실험해 본 몇 가지 현상을 통해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조악한 경쟁심 등을 언급한다. 존 컬훈이 진행한 쥐 실험은 제한된 공간 속에 먹이를 풍성하게 주고 번식도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더니 벌어지는 개체과밀현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현상은 좁은 공간에 개체가 많아지면 벌어지는 여러 비정상적인 현상, 이를테면, 새끼돌보는 것을 거부하거나, 죽은 새끼를 먹어치우는 개체의 등장, 무자비한 교미 행위가 발생하는 원인 등등이 무엇 때문인지를 암묵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특히 이런 쥐 무리의 개체과밀현상의 부작용은 오늘날 인간 사회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쥐의 집단 속에서는 몇 가지 계급이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첫 째, 가장 우위에 있는 개체가 무차별적 교미를 시도하고 둘 째, 사회성을 상실해버린 개체가 등장하며 셋 째 사체까지 먹어치우는 비현실적 개체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알고 <기생충>을 보면 계급과 위계, 사회불평등의 문제 이전에 바로 개체과밀 현상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이 첨예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지하라는 기택 가족의 공간은 개체과밀한 사회를 은유한다는 점에서 유독 의미심장하다. 특히 칼 세이건이 개체과밀현상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유인원 보다 쥐 무리에 더 가깝다고 일갈한 이유에 이르러서는 <기생충>에서 등장하는 반지하와 벙커의 비좁은 공간을 다시 살펴볼 만한 이유를 얻게 된다. 실제로 다른 포유류 종들을 대상으로한 실험에서는, 쥐를 제외하고, 나름의 균형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반해, 쥐만큼은 이러한 변종적 성격을 꽤 오래 노출하고 갈등 구조도 매우 깊게 나타난다. 그러니 영화 속 ‘반지하’라는 공간 혹은 벙커 속 인간은 어느 집단의 동물로서 모두 쥐 무리에 속해 있음을 진술한다. 이건 동익(이선균)의 가족도 벗어나지 못한다. 기존 <기생충>을 바라보던 시각에서 보면 동익(이선균)의 가족과의 관계는 사회적 계급의 척도로만 보였다면 이제는 동익 가족 역시 쥐 무리에 속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익의 가족들은 개체과밀현상에 빠진 쥐들이 그러하듯, 새끼 부양을 거부하고(연교(조여정)는 아이들의 가정교육을 모두 외부인으로 충당하려한다), 사회적 관심을 상실한 인물로 보이면서, 비현실적인 생활의 행태를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동익 가족은 쥐 집단에서 가장 우위에 있는 개체일 뿐이다. 이쯤 되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등장하는 비 오는 장면과 수해(水害)장면 역시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개체과밀현상에 처한 쥐들이 마주하는 일련의 현상들은 <기생충>의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벌어진다.

이런 관점은 오히려 공감되기 힘들었던, 기택이 동익을 칼로 찌른 행위를 조금 더 설득적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이유는 이렇다. 개체과밀현상에 처하게 될 때 발휘되는 ‘혈연선택(Kin selection). 기택이 동익의 저택을 차지하게 된다면, 이제는 동익의 가족들은 제거의 대상이 될 뿐이다. 기택은 그들과 혈연관계가 없다. 개체과밀현상이 벌어지는 공간에서의 집단 선택은 혈연관계를 기본으로 발생한다. 이때 타 집단을 수월하게 와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한 집단의 우두머리를 없애는 것. 그러니 기택이 동익을 공격하는 것은 ’냄새‘로 은유된 계급간 차이와 그에 따라붙은 분노라기보다 저택이라는 공간을 개체과밀현상에서 균형의 상태로 바꾸려는 하나의 동물적인 본능으로서 그 행위는 혈연선택 방법으로 극대화된다. 그러므로 기택의 그런 행동들은 분노도 아니고, 불평등을 직감한 사회적 인간의 태도도 아닌, 오로지 개체과밀현상에서 발휘되는 지극히 동물적 본능의 결과인 것이다.

 

자연주의적 태도는 결국 과학적 실험을 통해 이런 식으로 인간의 본능을 규명하려다가 어느 새 욕망과 충동으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기생충>이 욕망과 충동의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계급과 위계, 사회적 불평등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우리의 동물적 본능이 너무 강렬하게 배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이해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기생충>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인간과 관련된 것들이 사실은 동물, 그것도 인간에게 기생하는 쥐 무리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말이다. 그렇게 이해하는 순간 <기생충>에 의해 이제 우리는 개체과밀현상에서 가장 독특한 행태를 보이는 어느 동물 무리가 되어버린다. 기택의 가족들이 동익의 집에 침투하는 과정은 그런 의미에서 그 동물 무리의 기생적 본능과 맞닿는다. 기우와 기정에 이어 기택과 충숙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동익의 공간을 하나 씩 점유해 가는 것은 그야 말로 개체과밀현상 속에서 유사한 행태를 보이는 그 종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인간묘사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 현상을 완벽히 극복하는데 실패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 현상의 끝은 결국 평형상태에 이르는 것인데 봉준호 감독은 그 현상이 인간에게 만큼은 전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다친 기우의 넋이 나간 무표정의 시선은 기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충만한 기호이면서 개체과밀현상은 영원할 것이란 계시이다.

이 부분에서 <어벤져스>의 타노스와 <기생충>의 기택의 공통점을 말하기는 쉬워진다. 개체과밀현상 속에 놓인 한 개체, 그들이 지닌 생존본능이 공통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체과밀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기도 전에 이 말이 가진 운명적 맹독성은 자연스럽게 ‘계급, 위계, 사회적 불평등’으로 치환되어 마치 변화될 수 있는 것처럼 각색된다. 오히려 <기생충>은 이런 계급, 위계 현상에 대한 성급한 이해를 경고하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이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려 한다면, 다시 말해 <기생충>에서 계급과 위계, 사회적 불평등의 또 다른 속성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은 반드시 던져보아야 한다. 첫 째 기택의 가정이 계급과 사회적 불평등의 이야기를 잊게 만드는 지점이 있는지. 둘 째 기태의 가정이 갖는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가 영화 내내 우릴 괴롭히는지, 셋 째, 그러다가 결국 공정한 사회를 꿈꾸게 하는 윤리적 메시지로 넘어가는 과정이 있는지를 말이다.

인간의 본성과 그 본성으로 점철된 사회를 어떻게든 이야기하려는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위해 무언가를 결론지어야 하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강박은 앞서 던진 세 가지 질문에 어떤 과정을 추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건 모두 포기해도 되는 것들이다. 이 영화의 약간의 아쉬움은 이를 포기했다고 느껴질만한, 봉감독만의 날 것 그대로의 좌절이 윤리적 메시지로 오해되는 요소로 인해 희석되고 만다는데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잠정적으로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기생충>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계급, 위계, 사회적 불평등은 우리가 생각해오던 ‘인간’의 모습이 아니거나, 인간의 모습만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특성이라고 알아왔던 사실이 실상은 어떤 동물 집단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의미는 바로 인간이라 규정해온 모든 것이 인간을 규정하는 요소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봉준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을 말 할 수 없고 오로지 동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봉준호 감독은 어떤 동물의 세계를 통해 인간을 말할 수는 있어도 우리 스스로에 대한 답을 스스로 얻어낼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좌절을 그대로 담은 좌절은 오히려 좌절을 직시하게 만든다. 봉준호 발 인간좌절의 묵시적 메시지는 그렇게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다. 인간의 운명적이면서 부동적인 좌절의 맥락을 그렇게 각인시키면서 말이다. 기우의 시선이 강렬한 이유는 바로 좌절을 직시한 그런 그 눈을 내가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글·지승학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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