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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교회가 ‘퍼펙트 스톰’에 휘말린 교회를 살린다
ESG교회가 ‘퍼펙트 스톰’에 휘말린 교회를 살린다
  • 안치용 l 인문학자
  • 승인 2022.06.30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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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생태’처럼 각광받는 용어는 없다. 기독교계에서도 생태신학과 맞물려 생태교회라는 말이 사용된 지 제법 됐다. 그만큼 생태적 각성과 실천이 절실하며, 동시에 여전히 실천이 미흡하다는 뜻이겠다. 특히 사회적 신뢰와 내부의 신학 동력이 동시에 상실되고 있는 가운데 코로나19를 만나 미증유의 ‘퍼펙트 스톰’에 휘말려 들어간 한국 교회에 생태는 기회이자 위험이다. 

생태교회를 한답시고 ‘창조세계 보전’이라는 미지근한 전래의 구호를 부르짖는 것으로는 번영신학과 세속 커뮤니티로 전락한 적잖은 기성 교회의 타락과 몰락을 오히려 더 재촉할 뿐이다. 생태적 교회는 교회의 근본 구조를 변경함 없이 크리스마스 장식 바꾸듯 생태적 느낌의 휘장을 드리우는 것으로 달성될 수 없다. 생태교회를 넘어서 ESG교회로,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개발 수준의 환골탈태를 기획하지 않는 한 한국 교회의 소멸은 기정사실이다.

리모델링 논의로는 생존을 기약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재개발에 훨씬 못 미치는 개념인 리모델링은커녕 유지보수도 하지 않으며 현상유지에 급급하고 있다. 생태적이고 ESG적인 근본 전환 없이는 중장기적인 교회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음은 물론 교회가 생태 및 기후 위기 극복이라는 인류 공동의 과제에 기여할 수 없다는 데서 어려움이 발견된다. 스스로에게 유익하지 않을뿐더러 타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교회를 ‘교회’라고 불러야 할까.

생태교회를 넘어선 ESG교회는 이제 논의의 물꼬가 터지고 있는 단계다. 교계의 ESG신학연구소 설립 준비, 교회의 ESG목회 매뉴얼 준비 등의 움직임은 한국 교회가 그 진정성과 무관하게 생존의 활로로서 ESG를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ESG와 같은 사회용어로 신학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서 불편을 느끼는 교회 내부의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상황이 종교적 용어를 앞세워서는 내외부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돼 ESG라는 외부의 강력한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합당한 선택으로 보인다. 

‘생태’라는 단일 주제를 내세운 교회운동은, 녹색교회 운동에서 봤듯 아직 영향력이 제한적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본격화한 교회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ESG라는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로 해보인다. ESG가 교회나 신학용어는 아니지만 거기서 기독교 정신을 발견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발견할 가능성이 더 크다.

 

생태적인 ESG교회의 근거

특정한 종교세력을 뜻하는 개혁교회가 아니라 일반적 의미의 개혁적인 교회라면 생태적 지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구온난화를 중심으로 전면화한 기후위기, 미세플라스틱 등 엄연한 전지구적 문제를 외면한 채 신앙생활만을 열심히 한다는 것을 사회적 관점으로나 신앙의 관점으로나 정당화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아가 개인의 신앙생활을 경건하게 하고 성도의 교제에만 힘쓰도록 권면하는 목회는 존중받지 못할 것이며 그런 교회는 내부와 외부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점차 쇠퇴할 것이다.

교회는 아주 편협한 일각의 기복신앙을 제외하고는 어떤 형식으로든 교회를 넘어선 생태 문제에 관여하고 신학적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다. ‘교회안’의 폐쇄성을 이런 ‘교회밖’의 연대성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시대 상황은 교회를 어떤 식으로든 개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이 비록 교회가 원하는 개혁이 아니더라도 교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미래가 더는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미래 생존과 무관하게,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는 더는 ‘교회’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생태론, 혹은 사회(적) 생태론에서 진보주의자와 환경주의자가 만나 공동의 해법을 모색하듯, 교회는 각성에 의해서든 생존을 위해서든 ‘교회밖’에 시선을 돌리며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개혁적인 성향을 취하게 된다. 사회진보론자와 환경주의자에게는 산업화와 시장사회화가 노동자와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공통의 분노가 깔려있다. 개인을 넘어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가치를 위해 세계를 다시 구축할 이념을 찾는 과정에서 두 흐름은 사회생태론자, 사회주의 생태론자, 녹색 마르크스주의자, Red Greens 등으로 합체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도식이 작동한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이런 인류 공통의 위기와 분노는 서로를 향한 적대를 잠시 덮어두고 목전의 심각한 위기에 공동 대응할 여지를 생겨나게 한다. 

사회문제를 비사회적인 방식으로 해결하자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과격한 ‘사회적 방식’인 아나키스트 생태론은 사회로나 교회로나 수용하기 힘든 생각이다. 미래의 생태 사회는 문자 이전 시대의 근본적이고 유기체적인 비(非)위계 관계를 회복할 것이라고 믿으며 사실상 모든 사회적 해법을 솔루셔니즘으로 격하하는 아나키스트 생태론은 또 다른 기복신앙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이분법 세상을 강화하기에, 분권화하고 새로운 생태적 감수성에 부합하는 사회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는 흔쾌히 동의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이다. 

그들의 주장은 생태영성과 비슷하게 비(非)세속적 기독교도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어 보인다. 물론 주장대로 세계관의 변화가 중요하지만, 조직화 및 의식화와 관련한 실천적 혁명지침이 없다면 그것은 모종의 낭만주의에 불과하다. 낭만주의는 세상을 바꾼 적이 없다. 생태영성 또한 기독교를 부분적으로 바꿀 수는 있지만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현재의 망해가는 기독교는 부분적 변경으로 구해낼 수 없다. 생태영성 운동이 활성화한다고 해도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다. 

지금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세상 구원 사업을 요청받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소위 ‘깬’ 기독교도에게나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뿐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척하며 자신만을 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생태영성은 마찬가지로 기복신앙의 변종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생태영성 자체에는 더 나은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긍정의 에너지가 내재한다. 영성에 매몰되지 않고 영성을 공유한다면 생태영성은 변화의 자산이 된다. 

세계관에 초점을 맞춘 근본 생태론은 마찬가지로 몽상적이다. 사회문제는 사회운동으로 해결하는 것이지, 세계관운동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특히 근본 생태론에 던지는 “근본 생태론은 얼마나 근본적인가?”라는 질문은 뼈아프다. 근본 생태론은 사회 회피적이다. 근본 생태론자는 인간이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믿으며 폴리스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폴리스를 떠나는 자다. 비판자들에게 근본 생태론자들은 정치적 비판이 결여돼 있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세계체제’에 대항한 에코페미니즘은 양날의 칼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종속되고, 여성은 남성에게, 소비는 생산에, 지역적인 것은 전지구적인 것에 등등하게 종속된다는 관점 하에 선 ‘에코페미니스트’는 문제설정에서 성공적이지만 답안지 작성에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문제가 개별 문항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론상으로 구분되는 문제들은 현실에서 뒤섞여서 다가온다. 여성은 가부장제에서 남성에게 착취받는 존재지만 동시에 남성과 함께 자연을 착취하며 기후위기를 악화하는 당사자 진영의 일원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결합한 세계의 체제가 악의 근원이므로 여성은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다”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책임이 덜 하다는 것과 책임이 없다는 것은 다르다.

결국 에코페미니즘은 ‘에코’를 장식으로 단 래디컬 페미니즘으로 회귀하거나, 영적 페미니즘이라는 방식으로 고립의 길을 걸을 위험에 처한다. 미국의 에코페미니스트가 유럽의 에코페미니스트보다 ‘영적’인 것을 더 강조하는 듯한 경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에서는 1980년대 초 이래 종종 이 경향이 정치 영역으로부터 일종의 몽상적 세계로 후퇴를 나타내며, 현실에서 이탈해 결과적으로 남성의 손에 권력을 맡기는 도피주의라고 비판받았다. 또한 영성을 상품화한 ‘위장 시장주의’라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투항하는 길이기도 했다. 생태영성이나 에코페미니즘의 일각에서 자신도 모른 채 영성까지 상품화한 것은 블랙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에코페미니즘은 현실사회에서 정치화하지 않는 한 ‘에코’를 실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에코페미니즘은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조우하게 되며, 기후위기를 중심에 놓은 사회변혁의 전망 아래 페미니즘을 포함한 혁명의 포트폴리오를 새롭게 구성하게 될 수밖에 없다.

 

새롭고 파괴적인 방식의 궁행의 상상

교회가 생태문제를 들여와 생태교회로 전환하는 과정 또한 생태주의의 다양한 전개 상황과 흡사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과 사회주의(혹은 진보주의)를 포괄하면서 전혀 새로운 방식의 교회질서와 시스템을 파괴적으로 상상해야 한다고 할 때 생태교회는 종국에 ESG교회로 진화한다.

‘지배적인 서구적 세계관’과 ‘인간 예외주의 패러다임’을 극복한 ‘새로운 생태적 패러다임’은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궁행(躬行)적 ESG 전환’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한계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근본, 영성, 페미니즘, 아나키 등은 전지구적 차원으로 전개된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무력하다. 생태문제는 사회적이고 지구적인 차원에서 효율적인 거버넌스를 고민하며 추진돼야만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이 해법이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지금으로선 다른 길이 전혀 보이지 않기에 그렇게 해야 할 뿐이다. 다른 길로는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채 자기만족으로 몽유도원을 꿈꾸고 그것을 그리는 촌극에 그치고 말 것이다.

생태교회의 전망 또한 마찬가지며,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생태교회로서 페미니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며 사회적 불평등에도 눈감지 않는 신학을 수용하면서 사회적으로나 교회 내부적으로나 민주적이고 문제해결에 효율적인 거버넌스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적절하게 제시한 JPIC(Justice, Peace & Integrity of Creation 정의, 평화, 창조질서)를 자본주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한 ESG는 JPIC에 비해 분명 천박하고 덜 신성해 보인다. 

그럼에도 ESG신학을 검토해야 하는 이유는, ESG가 자본주의 본류에서 제기된 자본주의 한계에 대한 반성과 해법인 만큼 ESG교회 또한 사회 전반의 개혁 현장으로 초대받게 된다는 데에 있다. 교회는 현장으로, 사회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존재의의를 증명했다. 민중이 우리를 초대한 시절에는 민중교회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ESG교회이어야 한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춤·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이 글에서 생태주의에 관한 분류는 주로 다음의 책을 참고하였다. 
『래디컬 에콜로지-잿빛 지구에 푸른 빛을 찾아 주는 방법』, 캐롤린 머천트 지음, 허남혁 옮김, 이후, 2007. 
『생태학적 상상력』, 김욱동 지음, 나무심는사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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