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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빨간 사과, 잡스의 은빛 사과도 아닌, “뱀파이어의 푸른 사과”
아담의 빨간 사과, 잡스의 은빛 사과도 아닌, “뱀파이어의 푸른 사과”
  • 김유라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기자
  • 승인 2023.02.28 2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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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아담과 이브의 빨간 사과가 있었다. 인류에게 호기심이라는 선물로 다가왔지만 결국 그들을 원죄의 굴레로 몰아넣은 사과. 현대에 와서 이 원죄론은 조금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짓는 모든 죄들. 가령, 전교 1등이 되기 위해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친구를 짓밟고 올라가야 하는 사회가 바로 빨간 사과로 치환된 우리의 현실이다.

스티브 잡스는 우리 인간이 똘똘 뭉쳐 이 비극적 모순을 극복해가길 원했다. 그가 내민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의 은빛 사과는 y2k 시절 인터넷의 최초 등장이 불러온 지구촌 초연결의 갈망을 실현시켜 줄 ‘열쇠’로 보이기도 했다. 인터넷망을 타고 손쉽고 빠르게 수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도 한데 모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은빛 사과가 잿빛 사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장 부유한 이들과 가장 가난한 이들을 한데 엮은 가상의 공간은 각자의 부와 행복을 경쟁하는 각축장이 되어갔고, 허영과 욕심이 부푼 자리가 꺼지고 나면 그 자리엔 공허만이 초라하게 남을 뿐이었다. 가상세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자기 방에 혼자 남은 사람들은 외롭게 각자의 고민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됐다. 태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되는 치열한 무한 생존경쟁…, 때로는 나를 ‘나’로 존재할 수 없게 하는 오해와 혐오,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랑과 우정, 가족...

 

“난 200년을 넘게 살았어. 아직 할 일이 많아. 나와 함께 좀 더 멋진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무슨 일을요?”

“그냥 내가 이끄는 대로 날 따르면 돼.”

 

그런데 내가 가장 작아진 그 순간, 누군가 빨간 사과도, 은빛 사과도 아닌 ‘푸른 사과’를 내민다. 그리고 말한다. 그저 각자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이 세상 자체를 바꾸자고. 고통과 불신을 몰아내 사랑이 가득한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뱀파이어 소설의 새로운 계보, 21세기형 ‘우화’

작가 아르망이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희망찬 상상력으로 집필한 소설 『푸른 사과의 비밀』은 현대사회의 우울함과 고단함을 단숨에 날려줄 흥미진진한 ‘뱀파이어’ 이야기를 전한다. 소설 속 뱀파이어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사람과 동물을 소중한 친구로 여기고, 피를 먹는 대신 비건을 지향한다. 또 합정과 망원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누비며 상처 많은 젊은이, 고양이와 비둘기, 강아지들과 자유로이 인사를 나눈다. 고등학생 ‘민주’가 뱀파이어 무리의 대장 ‘파스칼’과 우연히 마주치며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러니까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과 조금도 평범치 않은 뱀파이어들 간의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다.

작가는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꿈과 좌절, 이종 생명체들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몇 개의 에피소드로 그려냈다.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험 성적, 질병, 성 정체성 등 제각기 다른 사정으로 고통받는다.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되지만, 사실은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원래 시간은 생명체마다 다르게 흐르게 되어 있어. 인간의 수명과 강아지의 수명, 그리고 하루살이의 수명이 다르듯이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시간의 양과 그 흐름의 속도는 서로 다른거지.”

 

이때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열쇠는 언제나 ‘공감’이다. 이기심과 경쟁으로 공허해져버린 현대인의 마음에 민주와 파스칼은 인류애를 채워 넣는다. 그러면서 우리 삶의 평온과 행복이 언제나 근본적인 가치, 즉 ‘사랑’에 있음을 알려준다. 민주와 뱀파이어들의 행보는 말뿐인 위로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탐욕에 젖은 악인들과 그 근거지를 추적한다. 때로는 맞서 싸우고, 때로는 승리한다. 현실을 직시하되 판타지적 방법으로 갈등을 해소하는 전개는 마치 우화를 연상케 한다.

경쟁과 상생, 비건과 퀴어를 아우르는 포용, 동물을 향한 따뜻한 시선까지, 세계관은 끝을 모르고 확장한다. 이 거대하고도 따뜻한 세상이 언젠가 현실에까지 뻗친다면, 우리 사회의 원죄와 공허에도 구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출퇴근을 위해 합정동과 망원동 사이를 오가는 내 눈에 주인공 민주가 그의 뱀파이어 친구들인 파스칼, 니콜라, 셀린, 쇼브, 슈타인, 루즈, 블랑, 그리고 사랑스러운 강아지 아담과 더불어 휘젓고 다닌 발자취들이 선히 비친다. 소설을 다 읽고서, 소설 속 배경지에 다녀오는 것도 재미를 더해줄 듯싶다. 

 

“다시 강조하건대, 나는 이책이 세상을 바꾸는데 정신적인 단초가 되길 바란다. 

책의 내용이 충분히 혁명적인데도 내가 굳이 혁명이라는 단어를 금기시하는 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혁명’들이 보여준 배신과 변절 때문이다. 

진정한 변화는 폭력으로 붉은 피를 뿌리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감동을 주며 세상을 맑고 푸르게 물들이는 것이다.” 

 

 

글·김유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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