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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이름표 단 우리의 들꽃들
일제 강점기에 이름표 단 우리의 들꽃들
  • 최동기 l 해밀 대표, 식물연구가
  • 승인 2023.03.3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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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근대식물학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태동했다. 약용식물을 분류한 본초서(本草書)도 식물학의 범주로 포함한다면, 고려말인 1236년에 『향약구급방』이 발간됐고 조선 초 세종 때인 1430년대에 『향약채취월령』과 『향약집성방』이 발간됐다. 그 후 이렇다 할 본초서의 발행이 없다가 1613년 광해군 때 동양의학을 집대성한 허준의 『동의보감』이 발간됐다. 하지만 『동의보감』도 전체 25권 중 3권에 해당하는 ‘탕액편’만 본초를 다뤘을 뿐, 본격적인 본초서나 식물학 서적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18세기 들어 근대 식물분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린네(Linne, Carl von, 1707~1778)의 저서에 80여 종의 한반도 자생식물이 유럽에 소개됐다. 이는 오노 란잔(小野蘭山, 1729~1810)의 『화휘』(1765) 등 일본 책의 영향을 받은 결과인데, 그중 한반도에도 분포하는 종들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린네의 제자 툰베리(Thunberg. C. P., 1743~1828)가 일본을 방문해 1,000여 종의 식물을 채집해 발표할 때도, 한반도에도 분포하는 종들이 포함돼 소개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에는 서양의 탐험가, 전속채집자, 식물애호가와 선교사들에 의해 한반도 식물이 본격적으로 조사 연구되기 시작했다. 최초로 한반도 식물을 채집한 사람은 독일의 해군제독 슐리펜바흐(Schlippenbach, B. A., 1828~?)인데, 1854년 4월 동해안에서 채집한 50여 종의 식물이 여러 식물연구가를 통해 국제 식물학계에 보고됐다. 그밖에도 러시아 식물학자 팔리빈(Palibin, I. V., 1872~1949) 등이 한반도의 식물을 연구 발표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인이 직접 채집과 연구에 동참하거나 이를 수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에 실학 교육의 목적으로 상공학교가 설립되고, 후일 농상공학교로 개편됐다. 1906년에는 다시 농림학교로 승격되면서 일본인 교수를 초빙해 생물학을 개설함으로써 근대식물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비로소 보급되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염원이 싹트는 시기였으나,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강점기로 넘어가게 된다.

 

우리 식물에 남은 일본인 학자의 흔적

당시 일본은 유럽과 러시아에 일본 본토의 식물 연구를 선점당했다. 이후 서구의 앞선 식물학을 따라잡고자, 대만과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그 선봉에 도쿄제국대학의 식물분류학자 마쓰무라 진조(松村任三, 1856~1928)의 제자들이 있었다. 대만의 식물을 연구한 하야타 분조(早田文, 1874~1934)와 조선의 식물을 연구한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이 그들이다.

나카이는 한일합방 전부터 조선의 식물표본을 연구한 공적을 인정받아 조선총독부로부터 후원을 확보했다. 『제주도와 완도 식물조사보고서』(1914), 『지리산 식물조사보고서』(1915), 『금강산 식물조사서』(1918), 『백두산 식물조사서』(1918), 『울릉도 식물조사서』(1919) 및 『조선삼림식물편 제1집~제22집』(1915~1939) 등을 조선총독부 이름으로 출간했고, 『조선식물』(1914), 『동아식물』(1935) 등을 발표하면서 독보적으로 조선의 식물 연구를 선도했다. 

도쿄제국대학 교수로 일본 제국주의의 방향에 동조했던 그는, 학문적 욕망과 출세의 수단으로 조선의 식물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럽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일본을 학문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던 조바심에, 표본에 의존해 지나치게 종을 세분하는 등 무리한 학문적 행보를 보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현재 일본에선 학문적으로는 거의 잊힌 듯하다. 그러나, 한반도에 자생하는 수많은 식물의 학명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어 우리에게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1909년에 조선 정부의 초청으로 한성고등학교에 부임한 모리 타메조(森爲三, 1884~1962) 또한 한국 근대식물학 태동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꾸준히 표본을 채집해 <조선총독부월보>, <조선휘보>. <조선박물학회지>에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1922년에는 총독부의 의뢰를 받고 『조선식물명휘』를 편찬했는데 여러 곳에 분산돼 있던 나카이의 연구성과를 총정리하는 일종의 색인 성격의 작업이었다. 총독부 임업시험장 기사로 있던 이시도야 쓰토무(石戶谷勉, 1891~1958)가 감수를 맡았으며 나카이의 연구 행태에 비판적이었던 두 사람은 조선명, 조선식 한자명, 서식지와 용도에 관한 정보를 추가해 나카이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모리도, 이시도야도 나카이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모리는 나카이와의 경쟁을 피해 어류 쪽으로 연구 분야를 전환하게 된다. 그 외 한성중학교에 부임했던 도이 히로노부(土居寬暢, 1884~?) 등 일본인 박물(博物) 교원들의 연구열은 조선 박물학의 발전과 토착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3년, 일본인 중심의 조선박물학회 결성

1923년에는 조선총독부 소속 전문가들이 주도해 조선박물학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회지인 <조선박물학회잡지>를 통권 40호까지 발간할 정도로 식물을 비롯해 박물 전 분야의 연구를 활발히 수행했다. 창립 당시 회원 수는 명예 회원을 포함해 129명이었는데, 이 중 교원들이 약 절반에 달했다. 박물 교원이었던 모리, 도이와 이시도야 등도 가입해 열심히 활동했다. 또한 박물학의 저변 확대를 도모했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도 가입을 권유했다. 

박물 연구에 관심이 많던 조선인들도 가입을 주저하지 않았기에 당시 모리의 조수였고 ‘한국의 파브르’로 불리는 조복성(1905~1971), 임업시험소에서 이시도야와 함께 일하던 정태현(1883~1971) 등도 참여했다. 핍박받던 시절이었음에도, 다른 분야와 달리 박물학 분야는 비교적 활발한 연구가 가능했다. 이는 일본인 학자들과 박물학 교원들이 중심이 된 단체 또한 역할이 컸다. 

일제강점기에 이런 움직임이 주로 박물 교원들과 그들이 소속된 단체를 중심으로 이뤄진 이유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가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여타 분야처럼 폐쇄적이지 않았고 ‘자연과학’이라는 중립적 요소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문화통치 하에 창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비롯해 검열이나 운영난으로 명멸한 수많은 잡지도 과학기술에 관한 관심과 열망을 함께 보여줬다. 

그런 열망조차 식민시대의 조선인들에게는 멀고 험난한 시대였다. 채집과 표본 제작을 통한 식물 연구 분야는 그나마 조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과학 분야였다. 또한, 우리 자연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근대 식물분류학을 새로운 학문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한반도의 식물을 분류 및 기록하고자 하는 조선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식물학을 박물학으로 통칭했고 그 수준도 대개 식물분류학 정도였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 여타 과학 분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소중한 움틈이었다.

그 중심에는 한국 식물분류학의 태두로 불리는 정태현(1883~1971), 3.1운동 이후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의 수혜로 도쿄제국대학 약학과를 다닐 수 있었던 도봉섭(1904~?), 우리 힘으로 동양 제일의 식물표본실을 구축하고자 했던 장형두(1906~1949), 일본 식물학 잡지에 기고하는 등 학업에 매진했던 박만규(1907~1977), 배화여고보 박물 교사와 고려대 교수 등을 거쳐 식물분류학회장을 역임했던 이덕봉(1898~1987) 등이 있었다. 식민지 최고의 과학 분야 엘리트층이 식물학에서 형성된 것이다.

 

1933년, 조선인들로만 조선박물연구회 창립

조선박물학회는 구성원의 특성상 일본인이 중심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식물학 분야는 타 분야에 비해 개방적이긴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서 인식하는 등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1933년에는 이덕봉, 이휘재(1903~1986)의 주도로 조선박물연구회가 결성됐고 정태현, 도봉섭, 장형두 등이 참여했다. 

조선박물연구회의 창립을 알리는 당시 <동아일보> 기사(1933.6.7)를 보면 조선에 있어서 자연과학의 진흥을 목표로 각 학교의 조선인 박물교원과 기타 박물관계자를 구성원으로 하며 조선에서 나는 동식물의 각 지방 명칭을 조사해 통일시키는 조선명의 조사 사업을 우선적으로 하고 장차 조선명이 없는 동식물에 대해서는 조선명을 제정하는 것을 기치로 내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박물연구회가 조선박물학회와 가장 다른 점은 조선인으로만 구성됐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로 상징되는 일본 당국뿐만 아니라, 조선에 거주하면서 한반도의 박물을 연구했던 일본인의 이해와 조선인의 이해가 뚜렷이 구별된다는 자각에서 조선의 독자성을 도모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창립 당시 조선인 대부분이 조선박물학회를 탈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선일체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일제 당국과 조선박물학회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받았다.

식물부에 참여한 정태현은 임업시험장의 고원(雇員)으로 이시도야의 조림 업무를 돕다가 총독부 기수(技手)가 됐고 1913년부터 나카이의 조수직을 맡아 식물분류학 분야에 발을 내딛게 된 인물로 현장에서 상당한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다. 도교제국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경성약학전문학교 교수로 갓 부임한 도봉섭은 목본 분야의 정태현과 함께 초본 분야에서 쌍벽을 이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후일 6.25 전쟁으로 인해 북으로 가게 됐다. 특별한 점은 이때의 공동연구 경험이 남북한 식물명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동물부도 있었으나 집단적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1947년에 석주명(1908~1950)이 『조선나비 이름의 유래기』를 출간하는 정도에 그쳤다.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조선인에 의한 독자적인 표본 제작과 연구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장형두였다. 도쿄농대의 전신인 도쿄고등조원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식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郞, 1862~1957)에게 사사 받은 그는 마키노를 일생의 지표로 삼아 연구에 매진했다. 지리산, 순천 등 전라도 지역의 식물조사부터 제주, 청송, 동해안과 백두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조사연구의 발자취를 남겼다. 

수많은 표본을 만들면서 나카이의 연구자료를 단 한 줄도 인용하지 않았으며 비록 일본을 통해 근대식물학을 배웠으나 조선의 식물학을 꿈꾸었던 인물이었다. 1933년에는 10여 년의 노력과 사재를 투입해서 제작한 식물표본 7천 점을 연희전문에 기증하고 동양 제일의 식물표본실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 표본들은 일본에만 2,000점 이상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6.25 전쟁 등을 거치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현재 국내에서는 발견되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는 식물 용어의 한글화에도 남다른 애착을 보여 묻사리, 외움닢, 맞돋이, 어겨돋이, 통꽃, 갈래꽃, 높산 등 순우리말을 사용했고, 조선인 중 거의 유일하게 라틴어로 종 기재를 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창씨개명을 거부한 강건한 학자였으나 해방 후 서울사범대학 교수로 재직 중 사소한 오해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고문치사를 당해 그의 원대한 꿈은 스러져 갔다.

1937년에는 조선박물연구회 식물부는 정태현,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 4명의 이름으로 『조선식물향명집』을 발행했다. 우리 땅에 있는 1,944종의 식물을 근대식물학의 분류체계에 맞춰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분류명집이다. 라틴어 학명을 중심으로 식물을 나열하고 대응하는 일본명, 그리고 실제 사용되는 조선명을 로마자 알파벳과 한글로 기록했다. 조선인이 조선명으로 된 식물도감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을 뗀 것이다. 

 

쉬운 명명(命名) 대신, 어려운 사정(査定)의 길을 택하다

조선박물연구회의 설립 취지에 걸맞게, 그들은 과학적 분류 방법을 습득해 식물의 표본을 대조하며 확인하는 절차를 먼저 거쳤다. 다음에는 쓰던 이름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향약집성방』과 『동의보감』 등 향약(鄕藥) 서적들을 검토하고 식물의 산지를 다니며 민중들이 실제 사용하는 이름을 조사했다. 정태현이 그동안 식물표본을 채집하면서 조사해 온 방언도 크게 도움이 됐다. 나카이가 밝혀둔 우리 식물에 자신들이 알고 있는 조선명이나 책상머리에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 손쉬운 방법을 버리고, 3년간 100여 차례 모임과 토론을 거쳐서 식물 이름을 조사하고 정리했다. 

손쉽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명명(命名)의 방법을 택하지 않고 힘들게 조사해 정하는 사정(査定)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나카이가 연구한 3,600여 종 중에서 1,944종의 이름만을 수록할 수 있었다. 일본을 베끼기보다 조선인 스스로 성과를 쌓겠다는 각오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어학회가 핍박받았듯이 일본 경찰의 심한 경계를 받았으며 일본어를 모르는 대다수 사람의 교육을 위해 조선명 작업이 불가피하다고 둘러대어 서슬 퍼렇던 경계를 무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각고의 노력으로 가래, 겨이삭, 진달래, 얼레지, 쇠무릎, 민들레, 개불알꽃, 옹긋나물, 쥐오줌풀 등과 같은 수많은 우리 이름을 오롯이 담을 수 있었다. 그저 머릿속에서 편하게 창출한 고상하고 교양 있는 이름이 아니라 사람과 식물이 생활에서 맺어온 관계를 나타내는 이름을 담아낸 것이다. 『조선식물향명집』을 평가할 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저자들의 작업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깊은 이해 없이 섣불리 우리 식물 이름이 창씨개명 됐다거나 일제의 잔재라고 예단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식물향명집』 발간은 일제 식민체제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 수단은 아니었을지라도 국권 피탈의 고통 속에서 피지배민의 숙명 속에서 조선인 학자들이 취할 수 있었던 식물 연구의 향토화와 민족 정체성의 발견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식물 이름에는 이런 선학들의 노고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성과는 목본식물에 대한 최초의 도감으로 평가되는 『조선삼림식물도설』(1943)로 이어지게 된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조선박물연구회는 조선박물학회를 흡수해 조선생물학회로 재편되고 초대 회장은 도봉섭, 부회장은 이덕봉, 조복성이 맞게 된다. 이어서 2~5대 회장은 정태현이 맡았고, 6대 회장인 우장춘에 이르러 대한생물학회로 개칭한다. 광복 후에도 한국의 동식물 연구를 끌어나가는 견인차가 됐고 식물학계는 이창복, 이영노, 이우철 등 후학들이 학맥을 이어 갔다.

 

민들레 vs. 털민들레, 앉은부채 vs. 한국앉은부채

지금까지 근대식물학의 태동과 우리 식물 이름을 찾고 지키고자 했던 선학들의 발자취를 살펴봤다. 이제부터는 논조가 급격히 변하는 글이 될지라도, 식물학계의 논문이나 심지어 우리 식물 이름을 관리하는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 마저도 우리의 삶이나 해학까지 머금고 있던 전통적인 이름과는 괴리된 조어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짚어보고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새로운 연구의 결과로 그동안 식물에 대한 학명(學名)의 오적용 또는 오동정을 바로잡을 때 생경스러운 우리의 식물 이름 즉 국명(國名)이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너무나 친근한 ‘민들레’라는 식물이 있는데, 이 식물이 이제까지는 일본에 자생하는 ‘Taraxacum platycarpum’으로 알았지만 연구결과 ‘T. mongolicum’이라는 종으로 밝혀졌다. 잘못된 학명을 바로잡은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국명도 ‘민들레’에서 ‘털민들레’로 바꿔 버렸다. 

우리 강토에 실존하는 식물은 그대로인데 학명이 변했다고 우리가 불러온 정겨운 이름 ‘민들레’를 일본에 자생하는 종에 내어주고 우리나라 자생종에는 생뚱맞게 ‘털민들레’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이상하지 않을까. 차라리 우리나라에 없고 일본에 자생하는 ‘T. platycarpum’을 ‘일본민들레’로 불러줄 것을 식물학계에 제언해 본다. 

예 하나만 더 들어보자. ‘앉은부채’라는 천남성과 식물이 있다. 모양이 마치 앉아있는 부처와 같다 해 붙은 이름인데 와전된 것이다. 이를 이제까지 학계에서 ‘Symplocarpus renifolius’이란 종으로 알고 있었지만 연구결과 새로운 종으로 밝혀짐에 따라 ‘S. koreanus’라는 학명을 새롭게 부여했다. 연구 결과에는 박수를 보낼 일이지만 문제는 국명이다. 

그동안 우리가 ‘앉은부채’라 부르던 이름을 외국에 자생하는 종에 줘버리고, ‘S. koreanus’에 ‘한국앉은부채’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붙였다. 한국 특산종임을 강조하고 싶었을지는 모르나 남의 나라 자생식물에 우리 이름을 내주고 우리 자생식물에는 굳이 한국이라는 이름을 붙여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우리끼리 부르는 이름인데 국어를 굳이 한국어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명이야 엄연히 식물학의 영역이지만 국명은 식물학의 영역이기 전에 민중의 삶과 함께하는 언어의 영역이다. 민중이 실생활에서 식물과 맺어온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책상머리에서 함부로 재단할 일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민들레’, ‘앉은부채’ 같은 우리 식물을 우리 강토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자신들이 알던 이름을 붙이거나 새로이 명명하는 쉬운 길을 접어두고, 실생활에서 민중들이 쓰는 이름을 우선적으로 조사 및 정리한 선학들의 모습과도 괴리된다. 그 엄혹한 시절에도 찾고 지키고자 했던 우리 식물 이름이자, 우리의 정체성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글·최동기  
물리와 통신을 전공하고 통신회사에서 사업기획과 신규사업 업무를 담당했다. MRO 비즈니스 1세대이기도 하다. 현재는 야생화와 수목 탐사에 심취해 식물학과 농학을 공부하고 있다. (주)해밀 대표이며 공동저서인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로 2022년에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우수편집도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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