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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탄천 동행] 붉은토끼풀의 생환을 염원하는 기도, 혹은 욕망의 알고리즘
[안치용의 탄천 동행] 붉은토끼풀의 생환을 염원하는 기도, 혹은 욕망의 알고리즘
  • 안치용
  • 승인 2023.05.06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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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둥빈둥 플로깅과 강과 함께 흐르는 세상 엿보기’ 3

어린이날 온종일 비가 왔다. 어린이가 없는 집이라 큰 상관이 없다만 어린이가 있는 집이라면 낭패이지 싶다. 어린이날에 오히려 밖에 안 나가는 집이 있지만,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나가야만 하는 집이 있는 법이다. 내 관심사는 어린이날 다음날인 토요일. 주말마다 탄천을 걷다 보니 주말에 비가 오고 안 오고가 신경이 쓰인다. 이미 두어 번 치른 수중전에서 좀 불편을 겪었다.

비오는 운중천
비오는 운중천

이런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귀신같이 광고 문자가 날아왔다. 머릿속을 맴돈 단어는 장화였는데 쿠팡이 보내준 상품명은 레인부츠. 낮에는 무심히 넘겨버렸다가 밤에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들이 알고리즘이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신의 다른 말이 아닐까. 새벽배송이란 문구에 마음이 흔들려 결국 주문하고 만다.

어떤 이들은 반대로 새벽배송이란 문구 때문에 쿠팡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한 관행이 노동자를 너무 힘들게 한다고, 양심상 그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고. 크게 보아 같은 의견이긴 하지만 심지가 굳지 못한 나는 쿠팡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편안함에 익숙해져서 빠져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저녁에 핸드폰으로 검색하고 클릭하여 아침에 와 있는 풍경이 반복되면, 새벽배송이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이 되면, 내 머리의 인식은 재바른 손에 영향을 적게 미친다. 쿠팡만 그런 게 아니라 유통업계 전반에 새벽배송이 퍼져나간 상황이어서 점점 더 양심이 무기력해진다. 물론 변명이고 핑계이다.

새벽기도가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를 새벽배송이 채우는 듯하다. 가치를 배제하고 냉정하게 요즘 새벽을 풍경만으로 판단해, 그렇다. 그냥 그게 팩트. 개탄할 일일까. 새벽기도가 뜨겁다고 꼭 신앙이 뜨겁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개탄한다면, 새벽기도가 사라진 것보다 새벽배송이 만연한 것을 먼저 개탄해야 하지 않을까. 다만 기도 없는 신앙이 위태롭다는 데엔 많은 선각이 같은 의견이었다.

운중천
운중천

알고리즘 님이 내 양심을 고려했는지, 레인부츠라는 것이 새벽에 배송되지 않았다. 바지 아래쪽이 젖은 이전 경험을 반영해 면이 아닌 폴리 계열 섬유 바지를 입고 걸었다. 가진 신발 중에서 가장 빗물을 덜 흡수할 것 같은 신발을 신었다.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과 같게 신발 속이 침수됐다.

분당한신교회에서 탄천으로 가는 길이 불어난 강물로 막혀 있다.
분당한신교회에서 탄천으로 가는 길이 불어난 강물로 막혀 있다.
차단선 너머의 백로
차단선 너머의 백로
차단선 너머 백로
차단선 너머 백로. 뭔가를 먹고 있다.

분당한신교회에서 탄천으로 가는 길은 많은 비로 물이 불어나 통행이 막혔다. 통행차단선 너머에서 자유롭게 거니는 백로를 잠시 바라본다. 안 그래도 운중천 쪽으로 가보려던 참이어서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향했다. 운중천에서 금토천으로 넘어가서 판교의 심장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NHN 넥슨 등 대표적인 ICT기업이 강가에 성처럼 치솟은 탄천의 참모습. 알고리즘의 성지. 새벽기도를 새벽배송이 대체한 세태와 겹쳐졌다. 그렇다고 새벽기도가 기독교나 다른 종교를 살려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천변에 나뒹구는 페트병 입장에서 나 같은 사람은 천적이어서 페트병이 보통 음습한 곳에 위치하지만, 가끔 오늘 본 페트병처럼 당당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는 예외가 있다. 비가 오는 날, 가로등에 전기를 공급할 용도로 끌어다 놓은 전력선을 페트병이 지켜주고 있었다. 전기가 결코 만나지 말아야 할 비를 깔끔하게 차단해준 폐페트병. 어느 충직한플로거가 그 병을 쓰레기라고 주워가지는 않을까, 이런 걱정은 아무 쓸모가 없고 머리에 약간의 열을 올리는 데에나 혹시 도움이 될까. 이틀가량 제법 많은 비가 오며 기온이 내려가 몸이 스산했다.

폐페트병으로 전력선이 비에 노출되는 걸 막아놓았다.
폐페트병으로 전력선이 비에 노출되는 걸 막아놓았다.

물이 불어나며 물속에 고립된 붉은토끼풀꽃들이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려 버티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비와 바람까지 가세하고 있어 붉은토끼풀이 곤경을 이겨낼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이 비가 그친 뒤에도 붉은토끼풀이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부질없는 생각이다. 그래도 내기를 걸라고 한다면 붉은토끼풀이 강물과 비바람에 뽑혀 나가지 않는 쪽에 걸겠다. 우리는 부질없는 생각을 부질없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1220)

이른바 레인부츠는 나의 플로깅이 끝난 뒤에 도착했다. 새벽배송이 아니었지만 2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 빠른 배송이다. 장화를 신고 걸었으면 나의 양말이 행복했겠다. 하지만 마치 조난신호인 양 물 밖으로 꽃을 내밀어 흔들던 그 붉은토끼풀과 비교하면 어찌 불평할 일인가. 내일 그 풀의 싸움이 해피엔딩이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지만, 풀의 자리를 기억해낼 것 같지가 않다. 다른 붉은토끼풀을 보고 너로구나하며 반가워하지 않을까. 사실 그래도 그 풀이 고맙다고 화답하지 않을까.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춤·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이자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분당한신교회 전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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