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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업보
분단의 업보
  • 김혜성 l 탈북 작가, 재불 한인
  • 승인 2023.12.2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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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 도문시에서 바라본 두만강 건너 북한 남양시 전경. 작가의 고향과 가까운 곳으로 꿈에서 그리던 모습을 빼닮았다.

오늘도 오밤중 꿈속에서 고향 집 문턱을 넘다가 깼다. 이렇게 밤마다 꿈속에서 고향을 다녀온 게 수천 밤이다. 아니 셀 수 없이 많다. 나는 뒷산에 숨어 있다. 산에서 내려와 고향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 이방 저방 뒤져 보지만, 그립기만 하던 어머니의 얼굴은 보이질 않는다. 그렇게 오늘 밤도 허탕을 치고 보위부에 쫓기며 두만강을 넘으려는데 강을 따라 휘둘러 쳐진 견고한 철조망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다 깼다.

함경북도 새별군 종산리. 내가 버린 고향 땅에 나를 낳아서 젖을 먹여, 사람 모양을 갖춰 살 수 있게 키워준 어머니가 홀로 남겨져 있다. 고향에는 어머니의 노쇠함을 돌봐줄 피붙이가 없다. 어머니는 젊음을 태워가며, 배 아파가며 자식 셋을 낳았다. 그러나 그 자식들은 병에 걸려 죽고, 월남하고, 정치범이 돼 감옥으로 갔다. 이제 늙어버린 어머니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이렇게 밤중에 고향의 꿈을 꾸다 깬 날은 눈을 꾹 감고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신께 기도를 드린다. 도와주세요. 신이시여! 노모가 깊은 잠을 자고 있을 때 그녀의 영혼을 거둬가소서! 병을 앓지 않게 하소서! 마음 고생, 몸 고생까지 팔자 고약한 그 노인네 죽을 때만이라도 편안하게 죽게 해 주소서!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다.

나는 고향에 가족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한 많은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내가 탈북시키려던 동생은 잡혀서 정치범 수용소로 갔다는 소식만 들릴 뿐, 생사를 알 길 없다. 한때는 동생의 생년월일을 써 가지고 점을 잘 보기로 유명하다는 소문난 무당들을 찾아다니며 생사만 확인해 달라고 빌었다. 동생을 내 손으로 정치범 수용소로 보낸 것 같아서였다. 그때 데리고 나오지 않았으면 북한에서 고생은 했겠지만, 살아 있긴 했을 텐데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밤잠을 못 이룬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만약에 저랬더라면, 하는 그런저런 생각들은 결국에 ‘죄책감’이라는 결정체가 돼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내 탓이다. 그래 내 탓이다! 동생의 손을 잡고 두만강을 함께 건넜어야 했는데… 아니야 아니야. 그때 데리고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나는 그저 내 여동생이 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남쪽 나라에서 마음씨 좋은 총각을 만나 오손도손 살게 하고 싶은 그 마음뿐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동생의 인생을 부숴버렸다. 가족과 자유, 가족과 꿈, 가족과 나, 핏줄과 나의 미래,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꼭 선택을 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그 결과로 나는 풍요를 얻었고,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희망은 고향 땅에 두고 있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다. 고향을 떠나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 냈는지, 어머니 없는 하늘 아래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날 밤을 새워가며 긴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 한 많고 설움 많은 삶을 살아 낸 노모의 주름진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오르겠지… 안다 안다,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내일 밤에는 모레 밤에는 고향에 안 갈 거라고,
밤마다 제발 나를 고향 땅에
데려다 놓지 말라고 기도하고 잠들어도,
나는 두만강을 건너 고향 집 문턱을 넘고 만다.”

 

프랑스에서의 삶은 평온하다. 나를 움츠러들지 않게 하는 나지막하고 적당한 크기의 건물들은 남프랑스의 소박한 자연 속에 파묻혀 있다. 여유롭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편안한 미소가 넘친다. 길을 걷다 눈을 마주치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도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띠며 낯선 모습의 이방인인 나에게 친절한 인사를 건넨다. 늘 같은 시간에 학교에서 마주치는 이미 얼굴을 익힌 이웃들은 안부까지 물어 온다. 

내 집 주변에는 백 년도 넘게 이 땅을 지켜 온 것 같은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등하교를 시킬 때면 소나무 가지 위에 앙증맞게 작고 귀여운 새들이 지저귀며 우리를 반겨준다. 내 집안에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가득 퍼져올 때,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과 남편을 바라본다. 이 모든 것들을 한 부분 큼지막하게 뚝 떼어내 가지고 내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살아남길 잘했다. 살아남았으니 이런 행복도 맛보네. 기특하다 기특해. 잘했어 참 잘했어. 스스로에게 무한한 격려를 보내다가, 그러다가 문득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죄책감. ‘내가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고 있구나. 동생을 사지에 밀어 넣고, 고향에 노모를 홀로 남겨 두고, 그 나라를 뛰쳐나와 결국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고 있구나.’ 

내가 만든 가족은 여기에 있지만, 나를 만들어 준 원래의 가족은 북한에 남겨 뒀으니, 나는 그 사이에 끼어있다. ‘분단’이라는 수난의 역사 속 한가운데 내 가족이 들어가 있고, 나는 내 혈육들을 통해서 분단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이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하겠지. 언젠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면, 그날이 오면 마음을 좀 덜 써도 될까?

분단의 원인은 뭘까? 서로 미워하고 반목하고, 다름을 틀림이라고 배척하고, 서로가 정의라고 우겨댄 결과는 아닐까? 민족이란 뭘까? 민족이 먼저일까, 계급이 먼저일까? 나는 아직 민족이라는 개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프랑스 같은 다문화 다민족 사회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가끔은 구시대가 남겨 놓은 흔적 같아 보이기도 한다. 북한에 혈육을 두고 온 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잊혀 가는 게 아쉽고 걱정이 된다. 그래도 내가 기댈 데는 남쪽 사람들밖에 없는데, 그 사람들이 화합하고 좋은 나라를 만들어 줘야 고향으로 돌아갈 꿈이라도 꿔 볼 텐데…

섬처럼 남겨진 작은 나라에서 단일 민족의 혈통적 명맥을 유지하는 민족이 세계에는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우리는 좁아터진 나라에서 왜 이렇게 싸우기만 했을까? 싸우기만 할까? 서로 선을 긋고 차별하고 헐뜯고 미워하기만 할까? 고립되고 비좁은 땅에서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과밀한 인구가 생존을 다퉈야 해서 그런 걸까?

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북한과는 인연이 끊긴다. 내 동생의 생사는 죽었다고 포기하면 될까? 누가 이야기해 준 것처럼 ‘죽고 사는 것은 그 아이의 운명이다.’라고 생각하면 나는 프랑스에서 만든 새로운 가족과 소소하게 일상의 평화로움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아이들과 함께 고요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문득문득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와 생사를 모르는 동생에 대한 미안함이 떠올라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옅은 미소를 띠며 마음을 다잡지만, 내 눈은 허공을 가르며 마음 한쪽 방 한 칸을 북에 남겨둔 가족들에게 내줄 수밖에 없다. 내 민족의 땅에서 내 조상들이 물려준 업보인 ‘분단’, 그리고 내 손으로 만든 업보인 ‘생이별’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나는 왜 하필이면 한반도에서, 북한에서 태어났을까? 아휴! 지겹기도 해라! 무슨 망령이 내 등짝에 들러붙은 것 같다. 이렇게 지겨운 고통을 내 대에서 끊어 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 싸우지들 말고, 대화를 나눠 봤으면 좋겠다. 다르면 다른 대로 존중하고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걸까? 영토는 작아도 넓은 아량을 품으면 큰 나라가 되는 게 아닐까? 서로를 포용하고 살았더라면 분단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미련만 내려놓으면 되는데, 왜 나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아 보려고 하는 걸까? 부모도 내 마음에서 지워내고, 동생에 대한 기억도 다른 수많은 이유들로 덮어내고 말이다. 근데 그게 되질 않는다.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망울을 어둠 속에 처박은 내 동생의 인생이 가여워서, 내가 그 아이를 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전옥아! 이 하늘 아래 살아는 있는 거니?
살아 있어 달라고 부탁하려니 언니가 염치가 없다.
네가 있는 그곳은 살아 숨 쉬는 게 지옥이라지!
내가 내 손으로 너를 사지에 밀어 넣었다.
언니는 천국에 갈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언니는 다음 생이 있겠지. 
전옥아! 다음 생에는 네가 나의 자식으로 태어나렴.
내가 너를 소중하게 보듬을 거야.
너를 위해 나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기꺼이 다 내어 줄 거야.
그러니 꼭 나에게 와야 돼. 내가 정말 미안해서… 
너는 이제 나의 꿈속에도 찾아오지 않는구나.
내가 할 말이 참 많은데… 
전옥아! 언니가 너를 기억하고 있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너를 생각하면
태양빛에 색이 바랜 연분홍색 우산을 쓰고
초원에서 거위들을 방목하던 모습이 떠올라.
언니를 어머니처럼 의지한다고 했었는데, 전옥아! 
언니는 너를 한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언니의 마음 한편에 따뜻한 방을 내주고
너의 이름 세 글자를 자주 꺼내 보고 있어.
그립다.’

 

오늘 밤도 ‘제발 나를 고향 땅에 데려다 놓지 마세요.’라고 기도하고 잠들어도 나는 두만강을 건너 고향 집 문턱을 넘는다. 

 

 

글·김혜성
2004년 16세에 탈북해, 대한민국에서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연세대 인문학부에 입학해 역사학을 전공했다. 2017년 프랑스인 남편을 만나 두 자녀를 낳고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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