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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슬픈 초상
지식인의 슬픈 초상
  • 조한욱 l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 승인 2021.01.2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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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 전만 해도, 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희생자가 2백만 명을 넘어 아직까지 그 위세가 지속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영역에 걸쳐 코로나 바이러스가 초래한 심각하고도 지대한 변화는 여전히 예측을 불허한다. 그에 상응하듯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일들도, 어제의 큰 사건이 오늘의 더 큰 사건에 의해 무색해진다. 백인 경찰의 흑인 피의자에 대한 과도한 대응에서 비롯된 연쇄반응은, ‘민주주의의 산 표본’을 자처하던 미국의 민낯을 드러내며 대선의 판도까지 바꿨지만, 의사당 침입 테러의 여파는 지금도 높기만 하다.

나는 현재의 상황을 진단할 식견도 없으며, 미래를 위한 처방을 내놓을 능력은 더욱 없다. 다만 미국이 난국을 타개하는 과정을 보면서, 이른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 부러울 따름이다. 국내의 ‘주류 언론’을 통해 접하는 ‘여론’이라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와 부끄러운 대비를 보이며 자괴감만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역사, 그 중에서도 서양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지식인이 취해야 할 태도라고 알고 있는 것을 이 글을 통해 상기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것은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1798~1874)에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미슐레는 원 사료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프랑스사와 로마사를 비롯해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이 그를 최고의 역사가로 꼽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의 문서에 매몰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민중』이라는 저서를 남긴 점이다. 그는 그렇게 당대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지식과 역사와의 대화를 통해 『민중』을 집필했다. 집필 목적은 분열된 프랑스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정신적 힘을 공급하려는 것이었다. 미슐레에 비하면 능력은 딸리더라도, 시늉은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나는 이 글을 쓴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 1992 - 셰마 마도즈

뛰어난 연출능력으로 엄청난 팬을 거느린 역사 강사가 방송에서 퇴출됐다. 사실 그 방송은 시청률에만 관심이 있는 방송국과, 자신의 성공에 도취하면서 더 큰 성공을 취하려는 장본인과, 어떤 검증도 없이 스타의 말이라면 일단 열광하며 진실이라고 믿는 시청자들의 합작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그는 이전에도 수많은 오류를 지적받았고, 명예훼손 소송까지 걸려 있었음에도 건재해보였다. 그러나 고증에 참여했던 전문가의 지적에 더해 학위논문 표절 문제까지 불거지자, 결국 방송은 조기종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만큼 재미있게 역사를 전달하지 못한 기존의 학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타당한 면이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여기는 학자라면, 역사학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기본적인 사실의 확인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재미를 위해 학문의 철칙을 위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철칙을 지키면서도 역사학의 재미를 확장시킨 학자들도 충분히 많다. 방송국은 새로운 인재를 발굴했다기보다는 맛깔스러운 먹잇감을 골랐던 것이고, 그 먹잇감이 상한 것임을 뒤늦게 안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에게는 뛰어난 전달능력이 있으니, 추후 그를 다시 유용한 자원으로 재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공을 위해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그것을 능력으로 인정받는 사회에서나 통용될 논리다. 부정한 능력도 능력일까? 부당한 방법을 쓰더라도 성공하기만 하면 그것이 정당한 능력이 되는 것일까? 선수든 지도자든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행동하고 가르치는 스포츠에서 스포츠맨십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심판을 속이는 능력이 스포츠맨으로서의 능력일까?

그의 잘못에 대해서는 응분의 처벌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그 주장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그 주장은, ‘표창장과 마약의 기막힌 대비’라는, 또 다른 생각거리로 이끈다. 죄에도 경중이 있다. 따라서 죄를 다루는 법에도 경중이 있다. 헌법, 법률, 명령, 조례 등으로 하향하는 법의 위계질서에서 하위법은 상위법에 위배될 수 없다. 그런데 법이 아닌 도덕의 영역에서 다뤄야 할 표창장에 대해, 헌법이 보장해야 할 자연권인 생명권과 행복추구권까지 무시해가며 수사-기소-재판하는 행위는 법의 원칙과 정신에 대한 몽매이거나 정면 도전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들이 그런 식으로 법의 질서를 무시하는 배경에는 이른바 ‘진보지식인’이라는 이들의 무분별한 ‘청렴의식’도 깔려있다. 잘못이 있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는 것이다.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신앙의 문제를, 현실의 삶에 적용시키려는 무분별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십보백보’라는 고사성어를 아주 싫어한다. 무게와 거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양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시장의 상인들에게 저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모르는 것일까.

세계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고, 국내에서도 역서가 출간돼 널리 읽힌 책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원전까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독자가 있다. 그는 ‘극장의 우상’을 경계해, 아무리 명성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직접 검증-확인을 거친 후 수용해야 한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고를 삶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오랜 기간에 걸쳐 공들여 찾아낸 수많은 번역의 오류가 시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돌아온 담당자의 답변은, “유학을 다녀왔는가? 학위가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런 냉담한 반응보다는, 차라리 그 대답이 “상세한 지적이 고맙고, 다음 판본에서는 반드시 반영하겠다”라는 진정어린 약속이 돼야 하지 않을까?

확실히 우리에게 성현들의 철학적 가르침은 상식의 함양이나 입시를 위해 암기해야 할 지식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극장의 우상’도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답의 힌트에 불과하다. 명문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그 대학의 교수가 썼거나 번역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올라서고 있는가? 이 문제의 원인은 출판사인가, 독자인가? 여기에, ‘사회구조’라는 원인까지 추가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작 독자의 주목을 받아야 할 책들이 무시되고 사멸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나는 밀리언셀러 한 권이 있는 곳보다, 만 권 팔리는 책 백 권이 있는 곳이 훨씬 건강한 사회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토록 왜곡된 독서시장에서 이제 천 권 팔리는 책조차 흔치 않다.

확실히 여기에서는 가치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게 부각되지만, 그것마저도 오용돼 훼손되기에 이르렀다. 잘 알려져 있듯 막스 베버는 ‘가치중립성’이라는 개념을 정리한 사회학자다. 내가 베버에 관심을 두던 때만 해도 ‘몰가치성’이라고 통용되던 그 개념은 ‘가치 지향성’ 또는 ‘가치 개입성’이라는 한층 상위의 개념을 보조하는 연구의 시행수칙 정도에 불과했다. 즉, 연구자는 자신의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연구의 주제를 설정하되 연구과정에서는 어떤 선입관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그 개념을 ‘탈가치성’이라는 말로 번역했었다. ‘몰가치성’이라는 말은 가치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이기 쉽기에, 연구과정에서는 잠시 가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탈가치성’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예컨대 내가 한일관계사를 연구하더라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그 과정에서 엄정하게 배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치관에 대해 확고하게 밝혀야 할 주제에 대해 ‘가치중립성’을 거론하며 대답을 유보하겠다는 학자가 한 명 있다. 그 단호한 학문의 시행수칙이, 혹시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바뀔까 두렵다.

한 때 진보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사람들이 변절한 것 같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나는 그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는 않는다. 아마 그들은 본래 참된 지식인이 아니었을 것이고, 이제야 그 사실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된 지식인’이란 연륜을 거듭할수록 진중함을 더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전달하는 지식은 경쾌하게 우리의 뇌리에 내려앉아 통찰을 제시하며 우리의 삶을 밝혀준다. 역사의 무게를 느끼며 그것을 내면화한 사람이라면 그의 지식이 어떻게 바뀔 수 있겠는가? 단지 더 단단해지면서도 경쾌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변절자’들에게서는 단단함과 경쾌함을 찾을 수 없다. 단지 버거운 무게만 느껴질 뿐이다.

이탈리아의 고독한 천재로, 영감의 원천인 잠바티스타 비코는 낮은 신분임에도, 수사학 교수로 활동하며 지식으로 먹고 살았다. 그는 귀족들의 눈에서 벗어나면(즉 그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코는 노골적으로 민중사관을 설파하지는 못한 채 단편적으로 이곳저곳에 그 편린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식인이 지향해야 할 모범으로 비코를 꼽는 이유다. 비코의 비밀을 알아챈 미슐레는 프랑스의 현실과 그것을 접목시키고자 『민중』을 썼다. 아일랜드의 문호 제임스 조이스는 그 모든 것을 알아챈 뒤 모든 계층의 모든 사람들이 등장하는 축제의 장을 열기 위해 16년에 걸쳐 실험정신의 정수로 꼽히는 『피네간의 경야』를 썼다. 이렇게 참된 지식은 연륜을 통해 단단하되 경쾌해진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의 지식인이 설정해야 할 지표로서 소설가 이청준이 설정한 지식인의 슬픈 운명을 소환하고 싶다. 평론가들은 그의 『조율사』를 두고, “짜임새가 없는 풀린 작품”이라고 폄하했지만, 나는 내 의식의 형성에 가장 크게 공헌한 소설로 주저 없이 『조율사』를 꼽는다. 이청준은 유신의 마수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 주인공 지운의 입을 통해 말한다. 참된 지식인은 대중을 태우고 노를 젓는 뱃사공으로서, 가야 할 목표를 알지만 “그 방향이 아니라 다른 힘을 중화해 배가 그쪽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엉뚱한 삿대질을 해야 하는 슬픔을 감수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지식인은 자신을 알고 시대를 알면서도(알기에), 올바른 방향으로의 항해를 위해 확고하게 설정된 가치관을 가지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리라. 이곳에서 지식인인 척하는 ‘지식상인’들에게는 자신만이, 자신의 이익만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도처에 숨어있는 참된 지식인들에 의해, 배는 결국 목적지를 향해 항진할 것이다.  

 

 

글‧조한욱

1992년 한국교원대학교에 부임해 2019년 퇴임할 때까지 문화사학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주로 문화사와 관련된 저서를 옮기고 집필했다. 주요 저서로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 『서양 지성과의 만남』, 『역사에 비친 우리의 초상』, 『내 곁의 세계사』, 『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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