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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적 없는데 꼭 어디서 본 거 같아…”
“본 적 없는데 꼭 어디서 본 거 같아…”
  • 구선경 | 드라마 작가
  • 승인 2022.05.3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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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일상 콘텐츠

오십 대 아저씨 네 명이 북한산을 오른다. 한 아저씨는 틈만 나면 “열정! 열정!”을 외치며 인생의 열정을 강조하고 한 아저씨는 영등포 상가번영회 회장이라는 직함을 자랑스러워하며 열정 아저씨가 차지하고 있는 산악회장직을 남몰래 노리는 중이다. 1976년부터 미국에 살다 온 또 다른 아저씨는 이제는 팝송 가사를 한글로 적어 불러야 할 만큼 영어와 멀어졌지만 그래도 이 멤버들 앞에서 미국썰을 풀기엔 부족하지 않다. 배재고 물리 교사인 마지막 아저씨는 산에서 보는 풀마다 먹을 수 있는 거라며 입에 넣지만 제대로 맞힌 적은 없고 달달한 주전부리를 몹시 밝히는 편이다. 이들은 주말마다 산에 올라 등산로 지도 앞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사진을 찍으며 어릴 때 소 키우던 얘기부터 김신조 청와대 침투 사건에 이르기까지 과거사를 팩트 반 허풍 반으로 늘어놓는다.

 

여기까지 보고 나면 영상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이제는 목소리가 남편보다 더 커진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량 자체가) 그들의 부인과, 문 꼭 닫고 들어가 도통 말 붙일 짬을 주지 않는 그들의 자식들까지, 보지 않았는데도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한 코너인 “한사랑 산악회” 이야기다. 처음 그들을 봤을 때는 30대 개그맨들의 분장과 연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고 ‘어딘가 얼굴은 익은 거 같은데 (이들은 각각 KBS와 SBS 공채 개그맨 출신이다) 누구지? 진짜 산악회 채널인가?’라고 한 1분쯤 고민했었다. 5, 60대 아저씨의 디테일을 무섭도록 완벽하게 재현해낸 이들은 자식들 이야기, 자식들의 연애 이야기 등으로 계속 세계관을 키워 가고 있다.

 

새로운 플랫폼이 만들어낸 새로운 순간들

얼마 후 이번엔 당근마켓에서 거래하는 남편들이 찾아왔다. 퇴근하고 집에서 입고 있던 위아래 색깔 안 맞는 티와 반바지를 입은 남편 둘이 아내의 지시를 받고 중고 거래를 하러 골목길 모퉁이에서 만난다. 핸드폰으로 지령을 내리는 아내의 아바타가 되어 아이의 장난감 활이 몇 번을 쏜 것인지 과녁은 있는지 확인한다. 잘 쏴지는지 직접 해보라는 아내의 말에 쏴보는 척 뜸을 들였다가 잘된다고 거짓말하는 정도가 이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반항이다. 오늘 이뤄지지 못한 거래를 위해 다음날 다시 퇴근 후 이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남편들은 퇴장한다. 그 와중에도 아내의 지시대로 ‘음쓰’를 버리기 위해 문 앞에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

유튜브 채널 <너덜트>의 “당근마켓 남편들” 이후에도 새로운 일상 디테일을 살린 유튜브 콘텐츠들은 계속 찾아왔다. <숏박스>의 “장기연애” 시리즈를 보면서 요즘 연애의 풍속도를 전혀 알 수 없는 나이임에도 크게 공감하며 머리를 끄덕였고, 강유미의 “ASMR 시리즈”를 보면서는 생전 가본 적도 없는 명품관 오픈런에 줄 서 있는 기분이 들거나, 미대 입시를 준비 중인, ‘덩어리’를 잘 못 그리는 입시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하나의 장르가 된 브이로그가 진짜 일상을 찍어 올리는 것과는 달리 (물론 그것도 진짜 그대로의 일상은 아니지만) 이런 유튜브 콘텐츠들은 다른 결로 우리의 일상을 보여줬다. 어떤 장면은 정확히 내가 경험한 순간과 일치해서 놀랍고 어떤 장면은 보거나 경험하지 않았지만, 꼭 저럴 것만 같은 느낌을 줘서 감탄하게 만든다.

이러한 경향을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 지칭한다. 1960년대 후반 극사실적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미술의 사조에 붙여졌던 이 이름이 최근의 대중문화 트렌드의 특징을 설명하는 신조어로 활용되고 있다.(1)

 

하이퍼리얼리즘을 보여주는 또 다른 콘텐츠-웹드라마

드라마에도 하이퍼리얼리즘형 드라마들이 나타났다. 중소기업에 다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짧은 콘텐츠를 만들어 올려 대박이 난 유튜버 빠니보틀의 <좋좋소> 이야기다. 여행 유튜버로 활동하던 그는 코로나로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자 뭘 할까 고민하다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생각으로 자기가 잘 아는 중소기업 이야기로 웹드라마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2)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계획보다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형식을 드라마에서 찾게 됐다는 의미로 읽힌다. 기존의 형식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시작했던 그의 의도가 시청자에게 가 닿았고 <좋좋소>는 시즌을 거듭해 제작, 인기를 끌고 있다. 거대 플랫폼인 왓챠에서 본격적으로 제작을 맡았고 최근에는 칸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에도 초대되어 그야말로 ‘레드카펫’을 밟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 드라마의 미덕도 경험했거나 혹 경험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회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냈다는 데 있다. 너무나 내 얘기라 혹시 나를 관찰했나 신기했다는 댓글이 있는가 하면 떠올리기도 싫은 회사생활을 소름 끼치도록 똑같이 재현해놔서 불편해서 못 보겠다는 댓글도 있다. 어쨌든 ‘소름 끼치도록 똑같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또 다른 작품은 카카오TV의 <며느라기>다. 이미 인스타툰으로 크게 공감을 얻었던 원작을 웹드라마로 각색했고 배우 박하선은 헤어스타일까지 똑같이 재현해내면서 원작의 민사린과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줬다. 원작에 열광했던 3040 여성들에게 역시나 큰 공감과 지지를 얻으며 화제가 되었다.

이런 웹드라마들은 기존의 레거시 미디어의 드라마들과 스타일을 달리한다. 한 회가 60분에서 70분이 기본 길이인 기존 드라마들과 달리 웹드라마는 20분 안팎으로 매우 짧고 그마저도 길이가 유동적이다. 미니시리즈라면 무조건 16회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기존 드라마와 달리 회차도 자유롭다. 기승전결을 따라 감정을 쌓고 터뜨리고 마무리하는 방식의 드라마와는 구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웹드라마가 소소한 일상의 현미경적인 묘사와 그로 인한 깊은 공감에 더 무게를 두게 되는 이유다.

 

일상의 장면 묘사에 친절해지는 드라마들

최근 들어 기존 드라마에서도 이런 경향, 즉 극의 서사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캐릭터의 자그마한 디테일에 집중하는 드라마들이 종종 보인다.

작년에 인기를 끌었던 <그해 우리는>은 서사의 진행이 느리다. 이렇다 할 치열한 갈등도 없다. 대신 드라마는 그들의 인생의 순간들을 천천히 펼쳐서 보여준다. 강당에 줄 서 있다가 처음 마주쳤던 그 순간, 같이 비에 젖은 채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어느 날, 잡았던 손을 놓아버렸던 저녁의 골목길...

이 드라마가 제공하는 재미는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팽팽한 삼각관계의 긴장감이나 첨예한 갈등 같은 것들이 아니다. 남들만큼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던 여주인공에게 그게 다냐고, 난 니가 그렇게 열심히 살길래 더 큰 꿈이 있을 줄 알았다고, 해맑게 말하는 남주인공의 한마디는 둘 사이에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디깊은 해자를 만든다. 아무것도 아닌 그 한마디가 여주인공에게 사랑하려던 마음을 접게 만들었던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해서 시청자가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 이 드라마의 매력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닫거나 여는 건, 어이없게도 그런 짧은 찰나 때문이라는 것을, 드라마가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는 행복하다.

<그해 우리는>의 열풍 이후 찾아온 또 다른 청춘 로맨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좀 더 극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예를 들어 희도와 유림의 라이벌 관계의 갈등, 펜싱 경기의 결과에 따른 긴장감 등등- 이 드라마도 역시 청춘의 어떤 순간들을 포착하는데 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일례로 태양고 무리가 단체로 바닷가로 놀러 간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일련의 시퀀스는 엄밀히 말하면 스토리의 진행을 위해서 꼭 필요하진 않다. 좀 더 짧아도 상관없었을 것이고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서라면 뭔가 ‘쓸모 있는’ 에피소드가 더 나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조바심 내지 않고 이들의 청춘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작가가 청춘이란 무엇인지 이들의 꿈과 바람은 무엇인지 말할 짬을 준다.

스토리보다 디테일이 좋은 시청자라면, 천천히 인생을 반추하는 호흡이 좋은 시청자라면 즐겁고 행복하게 이 드라마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

일상의 장면에 집중하는 콘텐츠가 많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새로운 플랫폼 덕분이다. 유튜브는 개인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고 그곳에서 개인들은 제각기 수백, 수천 가지의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기존의 레거시 미디어에서였다면 <좋좋소>나 <피식대학>, <너덜트>는 상상하기 어려운 콘텐츠였거나 실현됐다고 해도 지금의 수위나 스타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결국 <좋좋소>나 <한사랑 산악회>나 <너덜트>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좋좋소라는 명칭부터 불가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유튜브여서 가능한 콘텐츠였고 충분히 마음껏 구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OTT의 출현은 드라마 형식의 다양화를 가져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회차도 회당 분량도 자유로워졌다. 제작비와 시청률 등의 문제로 고정적인 편성 형태를 고집했던 때보다 오히려 이야기 자체에 좀 더 집중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10부 정도로 적당한 아이템이라면 굳이 16부에 맞춰 늘리거나 덧붙이지 않고 내 이야기에 가장 적당한 포맷으로 콘텐츠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형식도 다양해지고 내용도 다양해진 셈이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존 틀에 균열이 생기면 ‘하던 대로’ 할 수 없어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역으로 그만큼 기회가 많아지는 것이기도 하다. 변화의 시기에 기회가 있다는 말이 있다. 새로운 창이 계속 열리고 있는 지금, 오리지널리티로 무장한 신인들이 다양한 매력의 작품을 선보이기를, 그래서 더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시청자를 위로하고 즐겁게 해주기를 기원해 본다.

 

 

글·구선경 
드라마 작가. 작가협회 교육원과 대학에서 드라마와 스토리텔링 강의 중이다.


(1) 이준석, 정원식 <하이퍼리얼리즘형 웹드라마 “좋좋소”의 콘텐츠 특성 연구> 한국멀티미디어학회 논문지 25권 1호.
(2) 이화선 기자 <유튜브 드라마 ‘좋좋소’ 총감독 ‘빠니보틀’ 대박 뒷이야기> 신동아 202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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