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폭포수’의 영화와 ‘분수’의 영화
‘폭포수’의 영화와 ‘분수’의 영화
  • 임정식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2.06.30 1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2019)는 현대 일본의 오사카와 도쿄를 배경으로 한 멜로 영화다. 한 여성이 외모가 똑같은 두 남성과 겪는 사랑과 갈등이 담담하면서 잔잔하게 펼쳐진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파워 오브 도그>(2021)는 1925년 미국 몬태나의 목장을 배경으로 하는 ‘제인 캠피온 식 서부극’에 멜로, 미스터리, 서스펜스가 혼재된 영화다.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두 인물군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과 대립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전개된다. 이처럼 두 영화는 표면적으로 배경, 사건, 장르, 서사 전개 과정이 서로 다르다. 두 감독은 2022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후보에 함께 올랐는데, 제인 캠피온이 오스카 역사상 세 번째로 여성 수상자가 됐다(하마구치 류스케는 <드라이브 마이 카>로 후보에 올랐다). 

그런데 <아사코>와 <파워 오브 도그>에서 서사의 핵심 요소인 각 인물을 캐릭터로 바꿔서 살펴보면 매우 비슷한 점이 눈에 띈다. 한 여성을 사이에 두고 두 유형의 남성들이 시소처럼 움직이며 갈등과 대립을 반복한다. 그리고 인물들 사이에 발생한 사건은 자연과 문명, 인간관계에 관한 사유와 성찰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두 영화에 나타난 캐릭터와 결말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를 보여준다. 즉 <아사코>와 <파워 오브 도그>는 동서양의 문화, 구체적으로는 자연과 문명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자연과 문명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형제 신화 모티브와 관련돼 있다는 점도 관심을 끈다. 

 

<아사코>, 동양의 ‘폭포수’식 자연관 돋보여

 

아사코와 바쿠
아사코와 료헤이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에 관해서는 얼마 전 타계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수필 ‘폭포와 분수’에서 명쾌하게 설명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폭포수는 동양문화, 분수는 서양문화의 원천이다. 폭포수와 분수는 자연/인공, 심산유곡/도시, 숨어 있음/드러나 있음의 속성이 있다. 폭포수는 중력에 순응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분수는 중력을 거슬러 역류하는 물로서 자연의 질서를 부정하며, 제 스스로의 힘으로 중력과 투쟁한다. 폭포수와 분수는 자연 그대로의 힘과 인위적인 힘의 산물이다. 여기에 바로 운명에 대한, 인간에 대한, 자연에 대한 동양과 서양인의 두 가지 다른 태도가 생겨난다. 서구인이 말하는 창조의 힘, 문명의 질서, 사회의 움직임은 저 분수의 운동과도 같은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폭포수와 분수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자연관과 세계관을 비교한 이어령의 통찰력은 참으로 놀랍다. 

<아사코>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료헤이와 아사코가 강을 함께 바라본다. “더러운 강물이군.” 료헤이가 말한다. 아사코는 그래도 아름다워.라고 말한다. 료헤이와 아사코의 대사를 합치면, ‘더럽지만 아름다운 강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두 남녀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같은 마음이 아니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떠나 첫사랑 바쿠에게 갔다가 돌아온 참이니, 두 사람의 대화가 버석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료헤이는 아사코를 밀쳐내지는 않는다. 바쿠는 거칠고 야성적이고 제멋대로인 인물이다. 그는 신발을 사러 간다고 떠났다가 5년 후에 돌아온다. 아사코가 료헤이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직후다. 료헤이는 다정하고 섬세하고 착하다. 아사코는 처음에는 료헤이를 밀어내지만, 결국 그에게 마음을 연다. 하지만 바쿠가 다시 등장하자 그를 따라나섰고, 우여곡절 끝에 료헤이에게 돌아와 함께 강물을 바라본다.

<아사코>의 바쿠는 보리(麥)를 뜻한다. 바쿠의 여동생은 쌀을 의미하는 마이(米)이고, 바쿠의 아버지는 홋카이도에서 곡식을 연구하는 전문가다. 바쿠는 농사를 짓던 종족의 후손이다. 그런데 맥이라는 한자어에는 맥(貘)도 있다. ‘테이퍼(Tapir)’라는 이름의 동물이다. 이 麥과 貘이라는 동음이의어는 바쿠와 료헤이의 관계다. 바쿠와 료헤이는 외모는 같지만 서로 다른 인물이다. 그런데 바쿠는 곡식이다. 료헤이는 곡식을 재료로 삼아 술을 빚는 일을 한다. 아사코는 물맛이 중요한 커피를 만든다. 아사코는 바쿠와 료헤이를 이어주는 존재다. 바쿠는 농경문화, 료헤이는 현대 문명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바쿠와 료헤이는 적대적이거나 모순적인 관계가 아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는 사이다. 그들의 관계는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형제 신화의 인물과 같다. 바쿠와 료헤이는 인류 문명의 변화 과정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 변화 과정에서 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곡식(바쿠)이 술(료헤이)로 바뀌는 것에 불과하다. 보리와 술은 형태와 성질만 차이 날 뿐,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곡식이 있어야 술을 빚을 수 있다. 바쿠가 있어야 료헤이가 존재한다. 료헤이가 바쿠의 세계를 통과해 온 아사코를 받아들이는 행위와 남자 배우(히가시데 마사히로)가 1인 2역을 맡아 료헤이와 바쿠를 연기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아사코>는 자연과 문명이 순리에 따라, 폭포수가 아래로 흐르듯이 자연의 이치에 맞게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말한다.

 

<파워 오브 도그>, 서양의 ‘분수’식 세계관 부각돼 

<파워 오브 도그>의 마지막 장면. 조지와 로즈가 차에서 내려 포옹을 하고, 아들 피터가 그 모습을 2층에서 지켜본다. 이들 부부는 필 버뱅크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참이다. 조지와 로즈 부부의 포옹은 필의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필과 조지는 형제애가 두터운 듯하면서도 성격은 딴판이다. 필은 목장의 지배자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마초다. 돈을 노리고 조지와 결혼했다고 로즈를 비난한다. 조지는 과부인 로즈에게 연민을 느낀다. 로즈의 아들 피터는 섬세하고 유약해 보이는 청년이다. 악보가 그려진 종이로 꽃을 만들고, 외모도 옷차림도 여성스러운 면이 있어서 게이라고 놀림을 당한다. 로즈는 필의 압박에 스트레스를 받아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만다. 따라서 캐릭터의 관점에서 보면, 필과 바쿠, 조지(피터)와 료헤이, 로즈와 아사코는 서로 대응하는 존재다.

<파워 오브 도그>에서 필은 자연과 야성을 상징하는 존재다. 그는 몸을 씻지 않고, 말타기에 능숙하고,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잔다. 반면 조지는 목욕을 즐겨 하고, 예의가 바른 인물이다. 필과 조지의 관계는 형제 신화 속 인물들과 비슷하다. 실제로 필은 자신과 동생 조지를 로물루스와 로무스에 비유한다. 그런데 두 사람은 옷차림(카우보이 복장/양복), 이동수단(말/차) 등에서 공통점이 없다. 그들의 차이는 자연과 문명이 교차하는 시대의 흐름을 드러낸다. 

 

현대 문명을 대변하는 피터
자연과 야성을 상징하는 필 버뱅크

실제로 영화의 배경인 1925년은 19세기 중후반부터 본격화됐던 서부 개척시대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시기다. <파워 오브 도그>에서는 형제간 갈등이 필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문명의 아들인 의과대학생 피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필의 죽음과 함께 카우보이 시대는 흙먼지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다. 단절의 역사다. 조지와 로즈, 피터는 인위적인 힘과 투쟁을 통해 필을 극복함으로써 자신들의 시대를 맞이한다. 조지와 로즈의 포옹은 필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하는 세레모니다. 

<아사코>에서 바쿠와 료헤이는 ‘다르지만 같은’ 혹은 ‘같으면서 다른’ 인물이다. 아사코는 바쿠를 통과해서 료헤이에게 도착한다. 아사코는 바쿠와 료헤이를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인물이다. 세 인물의 관계는 자연과 문명의 이치를 상징한다. <아사코>는 그것이 순리라고 말한다. <파워 오브 도그>는 한 세계를 지배하는 강력한 존재를 극복해야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강조한다. 문명의 질서, 사회의 움직임을 만드는 원천은 투쟁이라는 서양문화의 세계관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다면 <아사코>는 폭포수의 영화이고, <파워 오브 도그>는 분수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생태주의 관점이 아니더라도, 두 영화를 통해 자연과 문명, 인류 역사의 변화 과정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인식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글·임정식
고려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스포츠조선 연예부장, 청룡영화상 심사위원 역임. 스포츠영화를 포함해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네이버영화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