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청년 빈곤을 그리는 유일한 곳, 2022년 한국 독립영화
청년 빈곤을 그리는 유일한 곳, 2022년 한국 독립영화
  • 송아름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31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멤버 모두가 2000년생으로 구성된 호미들(Homies)의 EP 앨범명은 <Ghetto kids>다. 앨범명에서 예상할 수 있듯 수록된 곡들은 가난과 분노, 그리고 불안을 담고 있었다. 한 유튜브 채널에서는, ‘중년을 넘어선 이들에게 20대가 쓴 가난이야기’라며 호미들의 노래를 소개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그들(중년을 넘어선 이들)은 그렇게 젊은이들이, 202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가난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아해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어떻게 가난에 대해 알 수 있는지, 그들이 가난이라고 느끼는 것이 정말 본인들이 지나온 그 가난과 같은 것인지를 되물으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가난의 존재를 의심스러워했다. <사이렌(Siren)>의 뮤직비디오와 노래, 그리고 가사까지 본 그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가난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이곳에 분명 잔존하고 있는 빈곤의 면면을 확인하고 나서 이어갈 말을 찾지 못했다. 그만큼 젊은이들의 가난은 우리 밖에 있었다.

2022년 한국 사회에서 빈곤을 확인할 길은 없다. 경제적 문제를 겪다 사망한 이들을 짧게 브리핑하는 뉴스 정도가 아니고서야 가난한 이들의 삶은 비춰질 틈을 찾지 못한다. 어떤 매체도, 장르도, 프로그램도 가난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많은 프로그램들은 과연 저런 곳이 있을까 싶은 거창한 공간들은 자주 소개하지만, 그 반대는 꽁꽁 감춰둔다.

현명한 판단일 수 있다. 빈곤이 혐오가 된 대한민국에서 굳이 그것을 보여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테니까. ‘냉정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는 무적의 수식어를 앞세워 몇몇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돈이 몰리는 것을 이상하지 않게 만들고, 그것이 얼마나 불어나 어떻게 소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사람들이 더 높은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멋대로 추측하는 편이 나은 것이다.

특히 젊다는 것은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고,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게 하는 데 완벽한 필요충분조건이기에 청년들의 빈곤은 더더욱 감춰진다. 최근 청년들을 위한 각종 정책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거기에는 이를 찾아보는 것도 힘들거나 그것에 호응할 정도에도 닿지 못하는 빈곤 속에 놓인 이가 있을 것이라는 배려는 없다. 

그래서 바로 이들이, 그러니까 어떤 길도 보이지 않는 곳에 젊은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그 사실을 인정한 최근의 독립영화는 반가우면서도 쓰리다. 그 어느 때보다 팍팍한 그들의 삶은 약 10년 전 청년들이 집중적으로 포착됐던 때에 비해 너무도 위태롭게 메말라 있다. 그들은 이제 안온하든 그렇지 않든 내 몸을 누일 공간조차 사치가 된 시대에 던져져 있었다.

 

영화 <홈리스>(임승현, 2022)

2010년대 초중반 청년들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을 때, 그곳의 청년들은 현재 자신들이 어떤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이때의 영화들은 많은 청년들이 안정이라는 기대에 밀려 청춘과 멀어진 안타까움이나(<족구왕> 우문기, 2013), 내 자신이, 내가 경멸하는 이들처럼 될지 모른다는 불안(<잉투기> 엄태화, 2013), 편의점이라는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는 좁아진 삶에 대해(<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김경묵, 2013) 솔직하게 풀어냈었다. 답답함에 대한 그들의 불만은 조금은 유쾌하게 또 조금은 심각하게 2010년대의 청년을 설명했다. 누군가의 꽁무니만 보며 달려야 하는 현실에(<명왕성> 신수원, 2013),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위계에(<들개> 김정훈, 2013) 대항하기 위해 ‘사제폭탄’을 준비할 객기라도 있었던 것은 그때의 이야기다.

주목할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은 때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독립영화 속 청년들은 노동과는 거리가 멀거나 노동시장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시점에 있었고, 아직 노동의 대가로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적어도 나의 꿈과 기대를 당장의 평온함으로 대체하기 싫다는 생각도 여기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기성세대들의 치사함에 자신의 안정이 담보됐다는 것을 깨달은 <10분>(이용승, 2014)의 호찬(백종환 분)이 영화의 마지막, 상사의 정규직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즉 2010년대의 청년들은 아직 자신의 생존과 돈이 연결돼 있지 않은 이들이었다. 

 

영화 <축복의 집>(박희권, 2022)

그로부터 10년, 이제 독립영화 속 청년들은 일을 시작했고 그럼에도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 흔적은 집이 곧 공포의 공간이 되는 것으로 서서히 드러났다. 암전 속 답답한 숨소리로 자신의 삶을 드러냈던 <축복의 집>(박희권, 2022) 속 해수(안소요 분)는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자신의 가쁜 흔적을 어둠 속에 숨겼다. 그는 바삐 걸음을 옮기며 공장과 음식점에서 끊임없이 일하지만 곧 사라질 집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집이라고 찾는 곳은 곧 철거될 예정이며, 누구도 모르게 처리해야 할 시신이 있는 곳이다. 그 집에서 따라 건넨 물은 누구도 마시지 않으며, 해수 자신도 그곳에서는 씻는 것 외에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 집은 자신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곳이자 위 세대가 만들어 놓은 빈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곳이다. 피곤한 몸을 편히 누일 수도 없고 여기저기 붕괴의 흔적과 마주해야 하는 곳, 그곳에 해수의 집이 있었다. 그 당연한 본능의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집이 그에게 주어진 공간의 전부였다.

 

영화 <복지식당>(정재익·서태수, 2022)

나의 의지대로 몸을 편히 쓸 수 없게 됐을 때 집은 돈을 쥔 채 청년을 옥죄기도 한다. <복지식당>(정재익·서태수, 2022)에서 신체의 활용능력에 맞지 않는 장애 판정을 받은 재기(조민상 분)는 빨리 돈을 벌겠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늘 집주인에게 사정했다. 몸은 집을 벗어나기 힘들지만 그 집은 돈이 아니면 유지할 수 없다. 장애인의 일자리는 기업의 혜택 구조에 따라 중증 장애 판정을 받지 않으면 오히려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나마 부모님이 남긴 낡고 작은 건물은 계단을 오를 수 없는 그에게 불필요하지만 역시나 어렵게 아들을 키우고 있는 누나를 위해 쉽게 팔 수도 없다. 젊은 나이는 그에게 무엇도 보장해주지 않고, 어떻게든 움직여보려던 그의 노력은 낮은 장애등급이라는 난관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날아드는 독촉들은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면서 그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었다.

청년들의 빈곤과 주거의 문제를 좀 더 직접적으로 연결한 영화 <홈리스>(임승현, 2022)는 아직 우유도 떼지 못한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어린 부부의 모습을 비춘다. 닥치는 대로 배달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들에겐 찜질방에서 지내는 것이 최선일 정도의 돈만 주어질 뿐이다. 찜질방은 아이가 쉽게 다칠 수 있는 곳이며, 이는 곧 병원비라는 감당 못할 일로 이어진다. 

도무지 버틸 방법이 없다고 좌절하던 때, 한결(전봉석 분)은 고운(박정연 분)과 아기를 작은 주택으로 데리고 간다. 한결은 이 집에 홀로 계시던 노인이 자신에게 이 집을 돌봐달라며 부탁하고 여행을 떠났다고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느껴지는 불안이다. 그 집은 한결이 자주 배달을 가던, 종종 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가 살던 곳이다. 불안한 한결의 눈빛과 고운을 단속하는 행동 등은 한결이 어떻게 이 집이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지, 아니 어떻게 빈집으로 만들었을지를 의심하게 한다. 바로 이 의심, 그러니까 이 절박한 부부가 작은 장소라도 점유하기 위해 누군가를 해쳤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바로 현재 청년들의 이야기다.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에서 수남(이정현 분)이 미친 듯이 일한 결과로 장만했던 초라한 집, 그리고 그조차 행복이 아닌 남편의 코마로 이어지면서 성실한 노력만으로 얻을 것이 없다는 점을 이미 암시했기 때문이다. 철저한 이해관계와 개발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수남이 할 수 있는 것은 분노에 찬 복수뿐이었다.

그리고 이젠 그 복수의 힘조차 남지 않은 청년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부모가 없거나 부모조차 쪽방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은 청년들의 빈곤이 얼마나 구조적인 것인지,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나약한 것으로 전락했는지를 명백히 보여줬다. 그들은 분노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듯 고요히 또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내지만, 그 노력은 생존조차 보장해주지 않는다. 

가난한 청년이 왜 우리에게 보일 수 없었는지에 대한 10년 전의 고찰(1)이 현재까지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이어지고 있다. 청년들은 어떻게, 얼마나, 언제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갈아가며 살아가야 하는가.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 등 관련 글을 쓰고 있다. 


(1) 안수찬, ‘가난한 청년은 왜 눈에 보이지 않는가?’, 민주정책연구원, 2011년 4월. https://v.daum.net/v/568a3f8ea2b881063b26e712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