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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윤석열, 그리고 ‘대안적’ 사실
트럼프와 윤석열, 그리고 ‘대안적’ 사실
  • 성일권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2.09.3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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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과 트럼프.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을 거치지 않고, 단숨에 대통령이 된 두 사람은 그밖에도 몇 가지 면에서 흡사하다.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고, 거짓말이 들통 나도 일단 잡아떼고 본다. 영국을 거쳐 미국에 간 윤석열 대통령이 상스러운 언행으로 ‘국격’을 떨어뜨린 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해도, 메신저 역을 맡은 그의 ‘입’들은 기상천외의 변명을 그럴듯하게 늘어놓으며 사실(Fact)을 갈기갈기 찢어 자신들의 입맛대로 재구성한다.

9월 18~24일, TV 화면에 비친 윤석열 부부의 순방내용을 보면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특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순방에 나서기 전에 대통령실이 배포한 일정을 보면, 여왕 장례식 참석, 유엔총회 기조연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및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회담이 예정돼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것이 없었다. 1분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게 국가 정상의 외교행사임에도 여왕의 장례식 전날 예정된 참배 일정은 현지 교통사정으로 무산됐고, 뉴욕에서는 바이든 대통령과 48초간 대화하고, 기시다 일본 총리와는 30분간의 대담에 그쳤다. 

대통령의 ‘입’들은 바이든과의 짧은 대화를 ‘환담’으로, 기시다와의 만남을 ‘정상회담’으로 포장했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의 저자세 ‘외교’에 안타까움이 치민다. 일본 측이 간담회라고 의미를 깎아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강제동원 피해배상 등 핵심현안에 대한 진전도 전혀 없었고, 한미정상 만남에서 대통령실은 “바이든이 우리측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우려를 잘 안다고 인정한 게 진전”이라고 말했지만, 미 백악관은 만남 결과를 보도하는 자료에 IRA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대통령은 국민적 허탈감을 만회시켜줄 기회를 가졌지만, 남북 현안, 한반도·동아시아 평화 등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철저히 외면한 채, 자신의 대선 후보 시절과 취임식, 광복절에 수십 차례 언급했던 ‘자유’라는 낱말만 공허하게 반복했을 뿐이었다. 많은 시민들은 윤대통령이 그토록 자주 언급했던 ‘자유’의 개념이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추상적인 ‘막연한 자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자유를 듣고 싶어 한다.

 21일 뉴욕 ‘글로벌 펀드’ 행사장을 나서며 윤 대통령이 내뱉은 비속어는 그 대상이 누구였든, 역시 그다운 행동이었다는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그의 발언이 국내외 언론의 톱뉴스로 다뤄지며,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우리 국민을 ‘쪽팔리게’ 만들었지만, 정작 그의 ‘입’들은 그의 욕설 대상이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아니라 한국의 국회의원들과 더불어민주당이라고 주장한다. 한술 더 떠,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홍보수석, 그리고 국민의힘의 강성파 의원들은 야당과 좌파매체가 대통령 순방을 제2의 광우병 조직선동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대통령의 욕설을 보도한 언론사에 국익 훼손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다그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욕설 대상이 미국의회와 조 바이든 대통령인지, 우리 국회와 더불어민주당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도 인간인지라, 영국에서 깎인 체면을 세우려 가뜩이나 기대한 바이든과 만남이 고작 48초 만에, 그마저도 상대방의 일방적인 발언으로 끝났다면 잔뜩 화가 났을 법하다. 검사 시절에 대통령도 구속시켰고, 수하의 검사들이 직전 대통령을 겨냥해 칼춤을 추는 마당에 바이든이 비록 미 대통령이지만, 그의 성정대로라면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말마따나 얼마든지 이 XX, 저 XX라고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카메라가 켜진 줄 모르고, 보좌진에게 푸념하듯 말했다면, 그의 입장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문제는 사건이 발생한 후에 그와 그의 ‘입’들이 대처하는 방식이다. 사실을 비틀어 기이한 사실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거짓을 사실처럼 말한 트럼프의 이른바 ‘대안적 사실’을 연상시킨다. 대안적 사실은 ‘실제로 있는, 입증할 수 있는, 거짓이 아닌 사실’을 뜻하는 단어(Fact)와 대안·대체를 의미하는 단어(Alternative)를 합친 조어로,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새 행정부와 미국 언론이 취임식 인파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가운데 등장한 신조어이지만, 재임 시절 내내 그의 계속된 거짓말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대안적 사실’ 논란은 2017년 1월 20일 열린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참석 인원 공방에서 시작됐다. 로이터통신 등 미국 언론 등은 2009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트럼프 취임식 인파를 비교하는 사진 2장을 공개했으며, ‘역대 최저 지지율로 출범한 인기 없는 정권’이라는 기사를 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에게 관련 브리핑을 지시했으며, 이에 1월 21일 브리핑이 열렸으나 “역사상 최대 취임식 인파”, “42만 명이 워싱턴 DC 지하철 환승역을 이용해 오바마 때의 31만 7,000명보다 많았다”는 등 사실과 다른 내용이었다. 이후 캘리앤 콘웨이 백악관 고문이 NBC 뉴스의 <밋 더 프레스>에 출연해 왜 거짓말을 했는지를 묻는 진행자의 질문에 “당신은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대변인은 대안적 사실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사실, 윤정권이 취한 ‘대안적’ 사실들은 트럼프를 훨씬 능가한다. 얼굴부터 이름, 학력, 이력, 논문, 재산, 러브스토리까지 삶이 온통 의혹으로 점철된 부인과 함께 살면서, 한평생 검사로서 부정부패와의 싸움에서 굽혀 본 적이 없다고 자신만만해하는 대통령은 그 많은 대안적 사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부인 김건희 의혹에 대한 숱한 고발고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이미 무혐의로 결론이 난 것”이라고 밝히고, 검찰은 “별다른 범죄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말해왔다.

윤 대통령은 귀국 후 출근길 도어스테핑에서 문제의 발언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서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한다는 것은 국민을 굉장히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라며, “그와 관련한 나머지 이야기들은 먼저 이 부분에 대한 진상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더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입’들은 대통령의 진상규명 발언에 힘을 얻어 국민들에게 듣기평가를 계속 강요하고, 좌파 언론의 악마화에 뛰어들고 있다.

대통령과 대통령 ‘입’들의 ‘대안적’ 사실을 사실로 끌어올리는 데는 이미 ‘정권이 무슨 말을 해도 지지한다’라는 정답지를 들고서 명백한 실수나 실언, 거짓말 해명조차 기계적 균형보도로 중화시키는 극우언론들의 물타기 보도가 큰 몫을 하고 있다. 마치 <폭스뉴스> 등 극우매체들이 트럼프의 집권 초기에 강력한 우군이 됐던 것처럼...

10월이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은 발행 14주년을 맞는다. 사실로 둔갑한 ‘대안적 사실’이 진실을 밀어내고 있는 지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제도권 언론에 길들여진 아집과 편견의 두터운 벽을 깨고, 독자들이 더 넓고 더 깊은 인식과 사유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진정한 대안언론으로서의 역할과 소임을 다 해내길 새삼 다짐해본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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