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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각자도생의 환멸을 극복하는 방식 - 이창기, 정영, 김사인의 시를 중심으로
[이병국의 문화톡톡] 각자도생의 환멸을 극복하는 방식 - 이창기, 정영, 김사인의 시를 중심으로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19.12.1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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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멸의 오늘

오늘을 연다. 2010년대의 마지막의 12월, 백지 위에 놓인 오늘을 연다. 상투적인 표현이겠지만, 다사다난했던 2010년대와 작별하는 이곳에 놓인 오늘이라는 문이 입구인지 출구인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어두컴컴한 백지가 파도처럼 넘실댄다. 어느 먼 곳의 구조 요청처럼 지금, 여기의 시편들이 허우적대고 있다.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해 우리가 수행했던 그 많은 날들로부터 우리가 도달한 시간이 완결된 것인지, 어떤 면에서 우리는 다른 형태로 침몰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안 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파문(破門)을 향해 쉽사리 손을 뻗지 못하는 것은 면피의 수단으로 자신의 손을, 몇 번의 클릭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자기 검열일지도 모르겠다. 그 위를 유영하는 시편들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환멸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극복하려 한다. 대의를 위해 극적인 화법으로 말하는 시편들이 주종을 이루는 것은 어쩌면 가장 강력한 저항의 방식일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의 다단한 문제들 속에서 가라앉지 않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처럼 보인다. 강한 목소리, 그리고 연대.

 

출처:개인소장
출처:개인소장

모든 시대에 작가들은 연대하여 사회 문제에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에서부터 민주화 투쟁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소외된 계층이 겪어야만 했던 사회 구조의 모순과 국정농단 등 총체적 위기의 순간들에 언제나 작가들의 목소리가 함께 했다. 그렇게 각각의 목소리를 모아 단일한 의지를 천명했다. 거대한 담론에 적극적으로 저항함으로써 익숙함을 무너뜨리고 상징질서의 오류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작가들의 연대는 의미심장했다. 이합집산처럼 보이기도 하고 뚜렷한 단일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의견을 말하고 현실에 참여했다. 인터넷 환경으로 비롯한 에스엔에스처럼 파편화된 상태로든, 작가회의나 각종 문인 협회들을 중심으로 한 상태로든 다양한 방식의 현실 참여를 통한 사회적 발언이든. 접근 매체가 다양해짐으로써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도 다양하게 변모하였다. 느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거미줄처럼 연결된 네트워크는 파편화된 것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또 다른 연대의 가능성이며 서로 다른 일상을 재배치함으로써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었다.

익숙함이 생경함이 되고 생경함이 익숙함으로 전환되면서 고립된 듯 보이는 시의 말들이 꿈꾼 연대는 어떤 방식으로든 소기의 성과를 성취하기도 했다. 2000년대 ‘미래파’의 미학적 모험은 2010년대 시적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변주되고 전유되었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고민이 더해져 오늘의 시는 미래파로 명명된 시인들의 실험적 측면을 단순히 형식적 측면으로 끌고 오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 내적인 정치적 발화로서의 내용적 측면에서도 더 많은 읽을거리를 내포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 그 이후,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촛불혁명 이후, 우리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연대를 통한 저항의 방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시는 어떠해야 하는가. 거대 담론을 말함으로써 사회의 오류를 말하는 방식은 이해와 인정을 가능하게 하지만 공감하기는 어렵다. 나무 한 그루에서 숲을 보는 것이 시의 일이라면, 이 글에서 다룰 이창기, 정영, 김사인의 시편들은 시가 환멸의 오늘을 견디고 위무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한 그루 나무들이다. 세월호 사건 직후 상재된 그들의 시를 읽어보려는 시도는 그들의 시에 대한 뒤늦은 응답이 되겠지만, 2010년대를 마무리하는 지금 다시 그 무렵의 우리를 기록하는 또 다른 자리와 시의 쓸모에 대한 사유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2. 나란한 연대의 시 - 이창기 『착한 애인은 없다네』(창비, 2014)

 

출처:창비 홈페이지
출처:창비 홈페이지

이창기의 『착한 애인은 없다네』를 펼치는 순간, 꽉 들어찬 문장들의 무게가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묵직하게 다가오는 시어들이 매 시편을 어떻게 채우고 있는지 궁금하다. 시집을 여는 시는 「시의 시대」. 달걀을 통해 시를 이야기한다. “비좁은 닭장에 갇혀, 애비도 없이” 낳은 달걀은 ‘소비’라는 “약속된 미래”를 보장받지만 “세상 밖으로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까보면 노른자도 있다.” 마치 “진짜”처럼. 그것이 ‘시’라고 시인은 말한다. “진짜 같”은 그래서 “까보면 노른자도 있”는 것이 ‘시’라고. 시인의 ‘시’가 지닌 “노른자”는 무엇인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약속된 미래”인가. 아니다. 우리의 오늘은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는 존재들이 견뎌내야 하는 “비좁은 닭장”이라는 두려움만 가득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시부터 혼란은 시작된다. 길고 긴, 산문의 형태로 채워진 시편들을 통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만 하는가.

이창기의 시들은 일종의 패러디와 알레고리의 형식으로 앞을 막는다. 앞을 막는다, 는 말처럼 우리는 냉장고에서 꺼낸 달걀이 아니라 달걀을 맞은 어마어마한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위압감에 사로잡힌다. 패러디이기 때문에 시의 내용은 어렵지 않다. 다만 시를 채우고 있는 시어들이 각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시집의 불편은 뭔가 다르다. ‘미래파’로 지칭되는 2000년대 중후반 시인들의 시가 제각각 다른 목소리의 조화로운 향연이었다면 이창기의 시는 강한 의지가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 같은 불편의 조화로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낯선 의미들이 주는 즐거움 앞에서 하나의 시적 경향을 겪어내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었다면 이창기의 시는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맨얼굴을 마주하는 체험을 하게 한다.

 

그녀에게 스물하루 동안 유료 낚시터에 앉아 있다 갑자기 신선이 되어 미래의 일을 내다보며 신령스러운 무리들을 이끌고 다니는 남편이 있었는지, 아니면 음주운전 단속에 걸려 곤욕을 치른 스무살이 넘은 아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거칠고 타락한 길들이 그녀의 반듯한 걸음걸이를 위해 실룩거리며 종아리에 낯선 근육을 차곡차곡 늘려갔다는 점이다. 오늘만큼은 자신의 맨발이 낡은 슬리퍼짝에 엮여 세상모르고 끌려다니거나, 어두운 장화 속에서 잔돌이나 지푸라기, 죽은 곤충의 일부와 함께 뒤엉켜 지낸다는 것이 그녀는 무엇보다 싫었다.

- 「뾰족구두를 신고 밭일을 가던 그녀는 누구였을까?」 부분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녀의 내밀한 사정은 알 수 없고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오로지 “거칠고 타락한 길들이” 그녀의 “종아리에 낯선 근육을 차곡차곡 늘려갔다는” 것만을 본다. ‘나’는 타자의 고통과 마주하기 전까지는 타자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하다. ‘나’의 맨얼굴은 그 앞에서 오롯하게 드러난다. “과수원에 꿈을 묻고 살다 끝내 파산한 한 많은 농부의 여린 아내”인지 “과장된 몸짓의 리포터”인지 “착하고 효성스러운 막내딸”인지 알지 못하는 ‘나’는 ‘그녀’ 곁을 스치는 사람일 뿐, 길을 함께 걷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시의 ‘노른자’를 음미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맨얼굴의 참혹함이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걸을 수 있을까.

“절룩이며 돌아오는 패자를 맞는/착한 애인은 더 이상 없다”(「‘파이팅’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고 시인은 말한다. 그 앞에 선 화자는 “그가 보이지도 않는 양/그냥 지나쳐야 한다지?”란 말을 하며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것은 ‘나’의 얼굴, 우리의 얼굴이다. 이는 타자에 대한 윤리가 아니다. 레비나스 식으로 말하자면 타자는 주체의 얼굴을 드러내 주는 존재이다. 시인은 이 타자의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이 시집의 무게에 눌려 혹은 오늘이 무게에 눌려 ‘침묵’을 선택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을 넘어 시인이 사유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 경쟁 사회, 타자를 소외시키고 우열에 따른 지배/피지배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사회에 대한 무책임을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달걀로 바위를 내리치는 한이 있어도, 꽉 막힌 벽 앞에 서 있어 그 벽을 향해 소리밖에 지를 수 없다 하여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시인은 말한다. “‘파이팅’에 압도당해 절망한 시인들”의 말을 “귀담아들어서는 안된다”고 자학의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암울하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웃고 떠들며/다시 한번 간단하게/‘파이팅’의 축배를 드는 대열에 속하”기 위해 타자를 외면하고 한국 사회의 모순에 고개 돌리게 된다면 우리는 절망적인 미래만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패자를 위무해 줄 “착한 애인은 더 이상 없”다. “착한 애인”이 되어줄 이유도 없다. 그저 “내게 던져진 질문이 아니”라며 외면하지 않는 행동이면 충분하다.

 

우린 서로 만난 적이 없으므로

침묵이 먼저다

왜 그래야 했는지 동기가 불분명하므로

침묵이 먼저다

검찰이 수사하고 있으므로

침묵이 먼저다

내부 고발자의 진술을 배제했다 해도

침묵이 먼저다

결정적인 증거가 조작되었다 해도

침묵이 먼저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므로

침묵이 먼저다

정부의 발표를 듣고 난 뒤에도

침묵이 먼저다

 

침몰하는 배에서 보내온 학생들의 문자와

모든 약속

그들이 함께 나눈 이야기가

증거 불충분으로

파기 환송된다 해도

우리 안에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어

괜찮다 다 괜찮다

다시 시작하자고 울부짖어도

-「이것은 내게 던져진 질문이 아니다」 전문

 

“우린 서로 만난 적이 없”다하더라도 “결정적인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그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품고 이 사회에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시인은 역설한다. “내게 던져진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부조리한 한국 사회에서 홀로 “침몰하”게 될 것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세월호 사건을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 조금 정치하게 말하여 한국이라는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았던 일들은 그 이전에도 무수히 많았다. 그때마다 우리는 ‘침묵’을 말했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명령은 한국 사회의 폭압적 성격을 단적으로 지시하는 언술이 되었다. “내게 던져진 질문이 아니”라고, ‘나’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고 ‘침묵’하는 순간 “우리 안에 자유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질 것이며 “괜찮다 다 괜찮다”라는 연대는 저 어둡고 깊은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말 것이다.

“홀로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더라도 “가끔 주위를 둘러보”는 것.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을 남기고 먼 길 떠났던 누군가가” “등 돌려 도시락을 먹고 있는”(「홀로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을 땐」) ‘나’의 어깨를, 우리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그것이 침몰하는 우리를 구하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것이 시의 “노른자”이면서 “비좁은 닭장”을 넘어 “약속된 미래”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3.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 정영 『화류』(문학과지성사, 2014)

 

출처: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
출처: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

그러나 이창기의 시편들은 종종 곤혹스러움을 남긴다. 확성기를 통해 굴절된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라고 할까. 범박하게 말하면 문학이 말해야 하는 바를 강박적으로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상대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계몽적이기를 지향하는 과잉의 지점들이 표출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강한 자의식으로 말미암아 시적 긴장감이 강요되고 쉽게 피로해진다. 그것은 오히려 시인의 목소리를 외면하게 하는 잘못을 가져올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정영의 시를 읽어보고자 한다. 정영의 두 번째 시집 화류의 1부에 해당하는 “花”를 읽다가 이창기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연대가 혹시 이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정영의 시집 화류는 연대를 향한 시의 목소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표와 닮아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어딘지 무겁고 절망스러워 실패와 좌절을 안고 살아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포기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여러 시편에서 엿보인다. “절망하기엔 손가락이 너무 많은 짐승이라”(「흰 소 한 마리 구름을 끌고」) “아무 할 일이 없는 그런 나무둥치”(「꿈이란 위로가 없었다면」)같은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라 위안으로 삼게 한다. 절망하지 않도록 곁에서 든든한 “나무둥치”가 되어줄 것만 같은 마음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치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러한 위로를 가능하게 하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잊어버렸을 때를 대비하고 판단의 기초가 되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뜻의 비망증명(備忘證明).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나’는 “꽃들이 소멸할 때를 위해 준비해둔 조화(造花)같”(「비망증명(備忘證明)1」)다는 불안. ‘나’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들,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힘에 부쳐하는 태도. ‘너’와 소통하고 싶어 하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들을 삶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너’와의 관계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먼저 바라보는 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일이 우선되어야만 그 이후를 내다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밥을 먹는 행위는 사는 내내 치졸했고” “누군가 떠난 자리에 앉아 체온을 더해보았지만/저녁이 뜨겁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둠이 고마”울 수밖에. 뒷공론, 뒷담화. 혹은 치졸한 삶에 대한 나 자신의 기만이랄까. 스스로를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갈등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지난밤의 사람들이 옅은 맥박처럼 흔들리다

시름한 입김도 없이 사라지면

내가 하려다 만 말들만 식은 밥처럼 놓여 있었지

(……)

모든 약속들은 철로변의 풀처럼 뒤엉켰고

난 목이 꺾여도 상관없는 풀처럼

지나가는 기차에게 팔다리를 내주어도 상관없어

그러니 울 것도 없었지

(……)

앞으로도 서로의 몸을 씻겨줄 일 없으니

고마워할 일도 미안해할 일도 없어

그냥 서 있지

 

눈을 감고 서로의 우는 얼굴을 좀 만져보자고 했던가

누가

- 「비망증명(備忘證明)2」부분

 

이런 ‘나’의 불안과 갈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비망증명(備忘證明)2」는 ‘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언제나 버겁다. 그것은 ‘나’가 “탄성 없는 영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 “새벽 정류장에 서면 환하게 밝아지는 고독” 속에 갇혀 있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이야기는 허공에 흩어지고 제대로 오가지 못하여 “옅은 맥박처럼 흔들리”기만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 “서로의 몸을 씻겨줄 일” 더는 없고, “이발과 박음질을 반복하며 몸을 꾸준히 말며/과거를 망각하는 기술을 습득”해야 했던 ‘우리’의 이야기일 것이다. 갈라진, 우리. “눈을 감고 서로의 얼굴을 만져보자고 했던” ‘우리’가 더 이상 없어 ‘나’ 홀로 “그냥 서 있지”. 그 쓸쓸함과 고독이 ‘나’의 목소리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 말하지 않으면 잊혀질, 그렇게 사라져버릴 무엇으로 만들 수 없는 기억들의 기록. 그리고 그것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것은 결국 ‘나’를 비추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너’를 ‘나’의 공감 안에 두어야 한다. 그것이 그 당시 한국 사회의 참혹함을 견뎌내는 이들과 나란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가능성이며 절망을 이겨내는 방식이었다.(물론 이는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비록 “내일은 더 아픈 가을이” 온다 하여도 “난독된 책들과 부적합한 교감 사이에서 허둥대”(「추락의 자세」)는 일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파편화된 존재들이 하나로 엮여 서로 교감하고 공감하게 되면 비록 “매일 조금씩 더 높은 곳에서 나를 밀어”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말의 회오리 속에서/점점 두꺼워지는” 사전을 만들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으며 “가련한 소통”(「가련한 사전」)이나마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말이다.

 

나는 보았다

거리의 취한 사내들이 죽은 제 다리를 떼어내며 걸어가고

여인들은 침실에 앚아 그 다리를 주무르다 잠드는 것을

(……)

누군가 사라진 자리에선

풀이 자라는지 따뜻했다

- 「집 밖의 삶」 부분

 

이 구슬이 나를 비추고 저 구슬이 비추고 나를 비춘 그 구슬이 또 저 구슬에 비치고 그 비친 구슬이 또 저 구슬에 비치고 세상 끝 모를 구슬들이 나를 비추니

(……)

무주(無住)의 밤기차는 눈발 속에서도 달리고

허공에서 숨을 놓는 바람도 나를 버려두고 가니

나는 어떤 죽음이어야 좋다고 껴안을까

「불어오는 바람을 가만히 품고 싶었으나」 부분

 

‘가련’하지만 가능한 ‘소통’은 “집 밖의 삶”의 쓸쓸함과 고독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섬세한 감각으로 “집 밖의 삶”에 공감하도록 독자를 이끈다. 공감을 통한 동일시는 연민과는 다르다.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것과 다른 것처럼. 시는, 문학은 바로 그 지점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대 담론을 끌어안고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는 목소리 역시 중요하다. 그것은 일종의 중심으로 흔들리지 않는 변화의 가능성을 담지한다. 자기(自己)를 오롯이 세움으로써 그 바깥을 아우르는 힘이 그것이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 같은 든든함이다. 그러나 시가 그곳에 머문다면 자신의 권위에 눌려 가지를 뻗지 못할 것이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뻗어 있는 개인들의 일상을 시의 자장 안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파편화된 외부의 존재들을 그대로 바라보며 그것을 자신의 반성적 자각 안으로 환원하여 주체의 내면으로 귀착시켜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누군가 사라진 자리”를 이어 ‘풀’을 자라게 할 ‘따뜻함’을 구할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에서 파편화된 존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품는다. “풀이 자라는지 따뜻”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역설적으로 “누군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타자는 언제나 부재이며 스쳐가는 것이다. ‘나’를 품고 가지 않는다.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 “불어오는 바람을 가만히 품고 싶었으나” 그것은 그저 나를 스쳐 지나갈 뿐이며 그 뒤에 남는 건 울음뿐이다. “나는 어떤 죽음이어야 좋다고 껴안을까”하는 의문은 “한 그물에 꿰인” ‘구슬’처럼 “나를 비추고” “나를 비춘” 구슬이 “저 구슬에 비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그 스침이 비춤으로 바뀌는 경험을 한다. 타자와 주체가 교통할 수 있는 연대의 문학적 정신이 알레고리적 장치로 환기되는 것이다. 시인이 껴안을 ‘죽음’은 서로를 ‘비추고 비친’ 관계의 총체가 아닐까. 그것은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목적론적인 지향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연대로 대안적 가치를 궁구하면서 공감의 윤리를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결국 ‘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 영원히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우린 우리의 말을 영원히 짐작할 뿐”인 “가련한 소통”만을 반복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들의 사전”을 두껍게 만들어 가며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저마다의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로 엮어 오늘의 우리의 삶과 사회, 역사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시가 내디뎌야 할 방향인 것이다.

 

4. 가만히 곁을 지키는 힘 -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2015)

 

출처:창비 홈페이지
출처:창비 홈페이지

1981년 『시와경제』 동인 결성에 참여하면서 시를 발표한 김사인 시인은 민중적이며 저항적인 시를 쓰고 노동해방문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을 발표한 이후 서정적인 모습만이 부각된 것 역시 사실이다. 두 번째 시집을 먼저 읽고 어느 정도 편견에 사로잡힌 채 펼쳐 든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이전에 갖고 있던 김사인 시인에 대한 생각들이 중첩되어 곤혹스러웠다. 어쩌면 그것은 이창기의 강박적 사회 인식이나 정영의 쓸쓸함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을 말하고 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회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발설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면서 거기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서정적인 자아를 매만지는 모습은 과잉으로 점철된 이천 년대 시가 지향해야 하는 시적 방법론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린 당나귀 곁에서의 시인의 말을 보면 시인은 ‘어린 당나귀’를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이놈”이라고 말하며 서로를 견디고 있다고 말한다. 곁에서 서로를 견디는 행위, 그것이 “이토록 사무쳐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새날이 오리라고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가는 데까지 배밀이로 나아갈 뿐”이라고 말할밖에. 그렇게 나아가는 행위가 시인의 시 속에 온전히 드러나고 있다고 말한다면 성급한 것일까. 특히 「내곡동 블루스」의 국정원을 지나 「꿈」의 노동자까지, 3부의 시편들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개괄하고 이를 시의 품 안으로 들이는 시인의 모습이 온몸의 사무침을 곁에 두고 궁굴리는 노력처럼 보인다.

 

곁의 여자는 손거울을 꺼내 루주를 바른다. 맞은편 짧은 치마 아가씨가 그물스타킹 발을 벗어 구두 위에 얹고 조는 동안, 그 곁 검정 배바지의 사내는 다리를 턱 벌리고 오가는 사람을 아래위로 흘긴다. 손잡이에 매달려 통화에 빨려든 젊은 여성은 배꼽과 허리만 남긴 채 이곳에 없고, 그 앞에서 발을 떨며 문자메시지를 찍어대는 노랑머리 대학생의 구멍난 청바지 틈으로 맨살이 아프다.

 

다들 고향에는 윗대 산소와 큰집 작은집과 논둑길과 동구 앞 개울도 있던, 봄이면 우물가로 앵두꽃도 한철이던, 할아버지는 사랑에서 에에퉤 위엄 있게 가래침도 뱉던 집 자손들이다.

 

어디서 또 만나겠는가

만난들 알아보겠는가 우리는

그림자가 없으니.

-「그림자가 없다」 전문

 

시적 화자는 지하철 맞은편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각자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타인을 묘사하는 화자의 시선이 2연에서는 그들의 기원으로 훌쩍 건너뛴다. 전통적 인식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공유하는 고향과 그곳 어른들의 모습이 지금 눈앞의 타인들과 겹쳐지면서 다른 존재가 아닌 ‘나’와 같은 기원을 가진 ‘자손’이 된다. 담백하게 표현된 이러한 인식은 전통적 서정시의 관념적 주관성을 극복하고 있다. ‘다른’ 존재라고 생각할 때와 그러한 인식이 하나의 막을 뛰어넘어 ‘같은’ 존재일 수 있다는 인식의 자장 안으로 침투하면서 이 시의 시적 전망은 서정적 주체의 감정적 개입을 통한 세계의 인식이 아닌, 주체와 타자의 기원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존재가 관계 맺는 방식을 역사적 차원에서 사건화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독특한 위치를 갖게 한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재현되는 시적 대상이 시적 화자의 인식과 주관을 통해 역사적으로 재구성됨으로써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가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런 인식의 과정을 통해 낯선 존재로 다른 위치에 있는 타자는 ‘나’와 나란한 위치에 있는 동등한 존재가 된다. “그림자가 없”는 ‘우리’는 “어디서 또 만나겠는가/만난들 알아보겠는가”라는 언어로 부정되는 싶지만, 그 이면에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충만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자손들”이며 서로의 “맨살이 아프다”는 것을 연민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언제, 어디든 서로를 알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는 그저 나직하게 “에이 시브럴-”(「에이 시브럴」) 이라고 읊조리며 곁을 나누지 않을까.

시인이 말한 “배밀이로 나아”가는 일이란 결국 시를 쓰는 일이다. 거창하고 독한 목소리가 아니라 “인간미가 있는” 시심을 품고 써 나가는 각 편의 시들인 것이다. 벗들의 죽음을 끌어안고 그들을 추억하는(「김태정」, 「박영근」, 「바보사막」 등) 방식이든 아니면 개의 죽음을 해탈과 병치시키는(「좌탈」) 방식이든 타자에 대한 공감의 영역에서 서로를 곁에 두고 이를 품어내는 시가 바로 시인이 말하는 사무침을 안고 나아가는 일이다. 그것은 “서리태를 볶아 와/팔순의 아버지와 작은아들 나와 손녀아이가 둘러앉아”(「삼우 무렵」) 나눠 먹는 일이다. “남모르게 따뜻한 등/업혀 가만히 자부럽고 싶은” “둥근 봉분 하나”(「둥근 등」)를 떠올리며 그 곁에서 “아무도 묻지 않고/오독오독 콩을 깨”(「삼우 무렵」)물어 먹는 일이다. 풍경 안에 대상을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만나게 하여 그 인접성으로 말미암아 개별적 존재와 사건들을 하나의 우주적 구조 안에 포함한다.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달팽이」 전문

 

우주는 어디 먼 곳에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다. “달팽이”로 표상되는 신체의 감각기관은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낱으로 목을 축”이지만 오랜 시간과 공통된 인식으로 상상적 공간을 열어준다. 「그림자가 없다」의 경우처럼 상황 속으로 역사가 흡착되면서 형성된 공간은 시적 화자뿐만 아니라 “누구건” 차이를 두지 않는다. 2연에서 달팽이는 “바깥 기척에 허기”져 있고 홀로 “저 쓸쓸한 길을” 낸다. 쓸쓸하고 고독한 존재로 형상화된 달팽이는 개별자로 위태롭다. ‘바깥’으로 지칭되는 세계와 연결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 그는 “달팽이가 아니라” “옛적 누이”이거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그 누구일 수 있다. 상상된 역사적 공간에서 개별자는 ‘우리’로 전유된다. 3연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로 나아간다. 그곳은 더 이상 “쓸쓸한 길”이 아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길이 무너지고/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한없이 느린 배밀이로/오래오래” 나아가게 된다. 좌절과 절망의 길이라 생각되던 ‘구멍’이 현실적 공간의 상징이라 하더라도 그 길의 끝은 엄연히 존재하리라 믿기에 “더듬더듬”이나마 갈 수 있게 된다. 이 상상적 공간에서 그려지는 삶은 2019년, 오늘 우리의 삶에 대한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네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더듬더듬/먼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삶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그 길을 ‘함께’ 걸어갈 ‘누구’가 아닐까. 가만히 곁을 지키는 타자의 존재만으로도 현재를 살아가는 이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시가 삶의 곁을 지켜 나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촛불혁명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그 일은 성취된 가능성이었을까. 타자의 곁에서 조용히 함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는 현재 한국 사회가 지닌 갈등의 골은 깊다. 촛불혁명으로부터 비롯된 광장의 목소리가 하나로 묶여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성취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정치적 의미로 무장한 언어들이 난무하는 현실의 갈등 속에서 문학은 어떤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인 문제에 문학이 복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진보적 가치를 담지한다는 점에서 마땅한 일이다. 그것은 나무의 뿌리와 같이 한 사회를 지탱하는 문화적 역량과 바탕이 된다. 그 토대에서 우리는 타자와 소통하며 새로운 가능성의 열매를 꿈꿀 수 있다. 뿌리와 같은 네트워크의 연쇄가 다양한 목소리의 연대를 불러오고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처럼 문학은, 시는 각자도생의 환멸을 극복하여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의 성취를 나눌 수 있게 하는 유용한 쓸모라 생각한다. 이창기, 정영, 김사인의 시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지점에 놓여 있다. 이 글은 어떤 면에서 이전까지의 유용한 쓸모가 이후의 쓸모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엿보고자 한 글일 수도 있다. 시간을 관통하여도 여전한 그 쓸모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뭔가 잃은 듯 허전”할지라도 “죽기 좋은 날”처럼 “방천에 넌 광목처럼/못다 한 욕망들도 잘 바래”질 날에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며 “저무는 일의 저 무욕”(「무릎 꿇다」)을 우리 곁의 모든 존재와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출처:개인소장
출처:개인소장

사진출처 : 개인소장 및 창비, 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

 

글: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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