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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즈 칼럼] 한국 사회 여성의 시선으로부터: '이상한 나라도, 괜찮을까?'
[서포터즈 칼럼] 한국 사회 여성의 시선으로부터: '이상한 나라도, 괜찮을까?'
  • 김정아(르디플러)
  • 승인 2020.08.10 15: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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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함'을 만드는 불편한 시선
 
[르디플러 1기=김정아] 늦은 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헤어지기가 아쉬워 짧은 산책을 했다. 안국역에서 광화문을 지나 시청 부근까지 쭉 거닐다가 잔디가 푸릇한 광장 주위를 맴돌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친구는 각자가 속한 집단에서 '어딘가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꽤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좋아하는 일에 남들보다 과하게 흥분하거나 관심 있는 주제가 나오면 말이 빨라지는 서로의 모습에서 공통점을 찾곤 했다. 그래서 각자의 '이상한' 면모를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줄 수 있었다. 막차 시간이 가까워져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주위를 스쳐 지나간 이상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가까운 지인부터 유명 인사까지 한참을 그려보다가, 이상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시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상함'은 사회의 기준에 맞지 않은 개인의 특이한 성격이나 행동의 특성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사회의 가치관이 바뀔 때마다 '이상함'의 대상이 달라지고 그 조건도 확장된다. 한때 평범했던 옷차림이나 말투가 몇 년 새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 사람의 시선에 따라 이상함의 조건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마침 오늘 친구를 만났던 모임에서 '굿걸'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이슈가 되었던 여성 래퍼 '퀸 와사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퀸 와사비' 같은 인물들은 여러 차례 우리 주위를 맴돌곤 했다.
 
성에 대해 거리낌 없이 노래하고 '트월킹' 춤을 추는 그를 보며 누군가는 욕망의 해방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의 '노출'을 음흉한 시선으로 훑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는 그의 자유로운 행동이 감수해야 할 따가운 윤리적 시선을 떠올렸을 것이다. 유독 튀고 이상한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그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생긴다. 왜 그들은 굳이 안전하게 사랑받는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평균을 좋아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이 늘 고민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고민할 문제가 아닐까. 나혜석을 지나 설리, 그리고 퀸 와사비까지. 그가 우리 세대에 미칠 파급력에 마음 한편이 조마조마하다가도 한편으론 '이상한' 그가 있어 눈이 떠지고 숨통이 트이는 경험을 한 우리들이니까.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며 자란 우리들은 유독 서로가 서로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타인의 행위와 말에 대해, 한 집단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에 대해 여러 차례 곱씹으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묻는다. 2015년을 기점으로 '탈코르셋' 담론이 한창 불거졌다. 탈코르셋을 통해 여성이 화장을 안 하고, 렌즈가 아닌 안경을 끼고, 편한 옷차림을 하고 학교, 직장에 나와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사회가 '탈코'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이상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꾸미지 않는 나'가 '이상한 나'가 되지 않을 자유였다. 이는 곧 타인의 불쾌한 시선과 언행을 마주하지 않을 자유이다.
 
그러나 어느 때에는 기분 전환을 위해 원하는 메이크업을 하고 좋아하는 옷을 입고 꾸밀 수도 있다. 물론 여성에게 과하게 요구되는 '꾸밈 노동'이라는 사회적 불평등과 '핑크텍스'라는 경제적 비용이 문제시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가는지는 그 누구도, 어느 집단도 획일적인 기준으로 옭아매거나 규정지을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탈코'와 '비탈코'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비추어볼 때 언제나 모순적이고 '이상한' 존재가 되는 것인가?

세 여성이 있다. 한 여성은 짧은 머리에 화장을 하지 않았다. 딱 보니 흔한 '페미'의 모습이다. 두 번째 여성은 짧은 치마를 입고 화장을 짙게 했다. 그를 보며 누군가는 '남자를 유혹하려고 저런 차림을 했나?'하며 문란한 여성이라 치부한다. 혹은 '꾸밈 노동'을 잔뜩 해 여성 인권 증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깨어 있지 않은' 사람으로 여긴다. 세 번째 여성은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화장을 옅게 했다. 그런데, 가장 평범해 보였던 세 번째 여성이 '노브라' 차림이다. 다시 보니 '꼴페미 메갈'인 듯 싶다. 도대체 한국 여성은 이 셋 중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편하게 입든 불편하게 입든 나를 보는 '어떤' 시선들은 언제나 탐탁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중 어떤 시선을 감내할지는 우리 자신의 몫이다. 그런데, 이것 참 불편하지 않은가? 내가 왜 타인의 불편한 시선을 줄곧 감내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나일 뿐인데. 때로 누군가의 '시선'이 나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어 오는 순간 그 시선에 갇혀 꼼짝달싹할 수도 없는 '나'를 마주하기도 한다.
 
이상한 '나'를 만드는 이상한 '나라'

여러 시선과 잣대들이 '나'를 중심으로 겹겹이 포개어진다. 나와 나의 내면에 자리 잡은 타인의 시선이 불편한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자신을 괴롭힌다. 롤러코스터 또한 뫼비우스의 띠의 원리에 착안해 만들어졌듯이, 우리는 때로 수십 번 꼬여 있는 생각의 롤러코스터를 탈 때가 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여성들이 부단히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왜 그럴까? 먼저 이는 '가스등 효과(Gaslight Effect)'와 유사하다. 남자가 집안 가스등의 불을 어둡게 만들면서, 집 안이 어두워진 사실을 알아차린 부인의 말을 왜곡하고 도리어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상한 낙인이 찍힌 부인은 스스로 의심의 대상을 외부 요인인 '어두워진 가스등'에서 내부 요인인 '자신의 심리적•정신적 이상'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마음속 깊이 병이 든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부당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곪아 있다. 그러나 사회는 '병든 티'를 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개인은 차라리 자기 자신과 그 주위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상한 나'에 대한 가스등 효과를 유발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여성이라는 '존재'와 그의 '몸'이 줄곧 범죄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연령, 계층, 직업을 막론하고 여성은 줄곧 성 산업의 연장선 안에서 대상화되었다. 여학생, 여선생, 여간호사, 여의사, 여비서, 여검사, 여아나운서, 여배우, 여아이돌 등 직종을 막론하고 '여성' 성별이 붙으면 외모, 몸매 지적이 줄기차게 나왔다. 그리고 성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여자' 시민이라는 이유로 공공 화장실, 직장, 학교, 수영장 등에서 몰카 위협에 노출된다. 그저 타고난 외적 조건만으로 범죄의 표적이 되니, 여성의 외향(appearance)과 존재 자체에 대한 담론이 중요한 이슈이자 논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성적 대상화를 피할 수 있을까?', '무엇을 입어야 안전하게 거리를 다닐 수 있을까?', '노브라를 하거나 가슴이 파인 옷을 입으면 야해 보일까?',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등등. 질문이 꼬리를 물고 자체 검열을 한다. 또한 타인을 비롯해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미칠 영향을 꾸준히 생각하라고 교육받은 착한 여자들은 나의 외모와 옷차림이 또 다른 여성에게 안길 문제를 생각한다. 과연 많은 남자들도 그들의 옷차림에 영향을 받을 다른 남자를 생각할까? 어느 상황에서 메이크업을 하든 안 하든, 옷차림을 꾸미거나 꾸미지 않든, 때로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비춰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말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사회 문제의 책임 소재를 오롯이 '여성'에게 전가하는 시선이다. 다시 세 여성의 사례로 돌아와 보자. 탈코(탈코르셋의 준말)를 한 여성, 그렇지 않은 여성, 애매하게 탈코를 한 여성까지. 한 개인이 탈코르셋을 하는 동기는 아주 다양할 수 있다. 애초에 화장을 좋아하지 않거나, 편한 옷을 즐겨 입을 수 있다. 그러나 탈코르셋이 젊은 여성 사이에서 '사회적 운동'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그려진 '여성성'의 코르셋 표준이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쳐왔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코'한 젊은 여성을 그저 자기 관리를 안하는 '게으른 사람'이나 사회에 불평불만이 많은 '사회 부적응자'로 치부하는 시선이 있다.
 
그리고 그들더러 제대로 '관리'를 하라며 불편한 굴레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마치 꾸밈의 문제가 개인의 나태함이나 성품에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는 일상적 수준에서 '획일적 대상화'에 대항해 새로운 외적 기준을 마련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힘을 묵살하려는 시도이다.

탈코를 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 그들이 범죄의 대상이 되었을 때(사실 이는 탈코 여부와 상관이 없다.) 그들의 옷차림이나 외모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야하게 입었기 때문에 남성의 성 욕구를 자극했다는 논리이다. 2010년도에 SBS 뉴스에서 성폭력 범죄에 관한 방송을 하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을 확대한 영상을 자료 화면으로 써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방송 이후 노출이 과한 여성의 옷차림이 성범죄를 자극하는 원인인지에 대한 논쟁이 붙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옷차림과 성범죄에 따른 명확한 인과관계는 절대 없다. 오히려 이는 피해자에 책임 의식을 전가하여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격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주체적 섹시', '코르셋 전시' 등의 이유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의 뭇매를 맞아야 할 만큼 사회적 문제의 적극적인 원인 제공자인지는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애매하게 탈코를 한 여성의 경우, 탈코를 지지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자신이 그저 '온건주의자'일 뿐인지 걱정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이 옷도, 저 옷도 맞지 않는 것 같다. 때와 장소에 따라 자신을 여러 모습으로 바꾸어 보기도 하지만 종종 윤리적 감옥에 갇힐 때가 있다. '원피스를 입은 내가 코르셋을 전시하는 것은 아닐까?', '노브라인 나의 모습이 타인에게 불편하게 비춰지진 않을까?'하고 물으며 내면에서 꼬여가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에 비추어 자신을 평가하는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상함의 원인을 결국 한 개인의 성품, 특성, 취향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무엇을 '이상함'으로 규정하는지, 나의 내면에서 꼬이고 꼬인 '이상함'의 굴레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우선 파악해야 한다.
 
데이트 폭력 및 살인, 남교사가 설치한 학교 여자 화장실 몰래카메라, 길거리에서 여성을 따라가 주거공간에 침입한 후 저지른 성범죄,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성착취물을 만들고 유포한 N번방 사건, 아동 포르노 다크웹을 운영한 손정우, 끊이지 않는 문화예술체육계 미투, 여러 보직에 있는 공직자들의 성범죄,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려 면죄부를 준 사법부까지.. 매 순간 벌어지는 사회적 부조리에 적절히 분노하지 않고 대응을 하지 않는 '나라'가 정말 '이상'한 것이다. 이상한 '나'의 모습이 한국 사회 안에서 살아남기에 괜찮은지를 묻기보다, 이상한 '나라國'의 상황이 정말로 살아가기에 괜찮은지를 물어야 한다. '이상함'을 만드는 꼬이고 꼬인 불편한 시선을 풀 실마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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