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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일본 천황제의 장소성을 둘러싼 자폭의 장면들
[이혜진의 문화톡톡] 일본 천황제의 장소성을 둘러싼 자폭의 장면들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0.11.02 0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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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원절’을 둘러싼 문제들

일본에서 2월 11일은 <일본서기>에 기원전 660년 초대 천황으로 기록되어 있는 진무천황(神武天皇)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한 ‘건국기념의 날(建国記念の日)’로 지정되어 있다. 즉 당시의 역사학자들은 이 신화적 인물인 진무천황이 야마토국을 정복하고 즉위한 것이 기원전 660년 음력 1월 1일의 일이었다고 주장했는데, 1872년 메이지 정부에서 이 날짜를 양력으로 대체하여 ‘기원절(紀元節)’로 공식화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하지만 이 기원절은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패배한 후 군국주의의 잔재로 지목되어 1948년 GHQ(연합군 총사령부)에 의해 폐지되었다. 기원절에 대한 GHQ의 이해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기원절은 전시 중 초국가주의에 이용되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의 기원은 실증되지 않는다. 진무덴노 기원은 600년의 오차가 있다. 이처럼 과장된 기원 때문에 모든 나라보다 우수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잘못된 신앙이 만들어지고 초국가주의, 군국주의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계황, <기억의 전쟁>, 이화여대출판문화원, 2003.)

 

그 뒤 세월이 흘러 1950년대 중반 무렵 보수 측에서 기원절 부활을 위한 움직임이 시도되었지만, 진무천황 즉위의 연월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보류해야 한다는 의견과 과거 진무동정(神武東征) 이야기가 ‘대동아전쟁’과 같은 침략전쟁을 독려하는 데 활용되었다는 점을 들어 참의원에서 폐기하는 등 ‘건국기념일’을 제정하는 법안은 제출과 폐기를 번복하며 난관을 겪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건국기념일’이 아니라 ‘の’를 삽입하는 것으로 합의, ‘건국기념의 날(建国記念の日)’로 명칭을 정함으로써 ‘국가가 건립된 사건 그 자체를 기념하는 날’로 해석의 폭을 넓혀 관련된 오해를 최소화하도록 했다. 또한 이와 관계된 각계의 지식인으로 구성된 심의회에 자문을 구하고 수차례의 수정과 협의를 거쳐 1966년 6월 25일 일본의 ‘건국기념일’ 개정 법안이 제정되었다.

천황제 국가라는 특성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국경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건국기념일에는 매년 다양한 축하 행사와 축제가 개최된다. 이 행사들 중에는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일군의 시위대도 참석하는데, 매년 황실의 존속과 폐지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의 보수단체들과 이 시위대가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하곤 한다. 이 반천황제 시위는 건국기념일 이외에 쇼와천황(昭和天皇)의 생일을 기념하는 쇼와기념일(4월 29일)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난 종전기념일(8월 15일)에도 반복되고 있다.

이 시위는 반황실 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의 신좌파 단체 ‘반천황제운동연락회(反天皇制運動連絡会)’를 중심으로 아시아평화협회 재팬, 새로운 안보행동 실행위원회, 개헌과 천황의 전쟁책임을 묻는 4·29집회 실행위원회, 쇼와천황 건국기념관 건설저지단, 일한민중연대 전국네트워크, 히노마루·기미가요 강제에 반대하는 시민운동네트워크, 야스쿠니해체기획 등 약 60여 개의 단체가 참여하는 반체제적 시민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 탓에 이 단체들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전쟁 가능성이 부상하는 사태에 대해 강한 우려감을 표명하면서 국제무대에서의 전쟁 반대와 재일미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한다. 이렇게 이들이 천황제 폐지와 국가행정조직 개혁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이유는 현재 일본의 정치·사회체제가 차별을 불러일으키는 원흉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불경죄’의 모순

과거 일본 국가에서 천황을 부정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불경죄’에 해당되었다. 가령 1880년에 공포된 일본형법은 천황과 황족 및 신궁과 능묘의 존엄을 해치는 행위를 ‘불경죄’로 명문화하고 이에 대해 2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것을 규정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당시의 문학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최초로 불경죄가 적용된 작품은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尙江)의 남편의 자백(1906)이다. 이 소설에는 도쿄제국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천황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당시로서는 천황을 문학작품에 등장시키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불경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1910년 일본 정부는 이 작품을 발매금지했다. 마침 1910년은 천황암살계획의 주모자인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혁명세력 20여 명이 검거된 대역사건이 발생한 해였기 때문이다.

근대 일본의 신도(神道)와 기독교가 충돌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불경죄는 1891년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의 불경사건을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다. 기독교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가 제일고등중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할 때 ‘교육칙어’에 대한 예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강제사직처분을 받았는데, 당시 이 사건은 천황에 귀의하는 ‘신도’가 과연 종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인들의 심성에 자리한 근본적인 질문을 자극한 계기가 되었다. 전전(戰前)의 ‘대일본제국헌법’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함과 동시에 신도란 서양적인 종교의 개념이 아니라 일본인 전체가 신앙으로 갖고 있는 문화의 토대임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치무라의 ‘불경사건’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개인의 신앙과 신도 사이의 위화감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고바야시 타키지(小林多喜二)의 소설 게잡이공선(1929)도 불경죄가 적용된 작품이었는데, 이로 인해 고바야시는 치안유지법으로 체포되었다. 사실 이 작품에는 천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부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게잡이 선원들이 자신이 처해 있는 사회적 부당함과 부조리를 서서히 깨달아가면서 마침내 자본가의 정점에 자리해 있는 천황가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로 인해 선원들이 저항에 의미로 천황가에 헌상하는 게 상자에 “돌멩이도 넣어라”라고 발언한 부분이 바로 불경죄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가 <비 내리는 시나가와역>에서 쇼와천황의 외모를 묘사한 “콧수염 안경 새우등의 그”라는 표현과 함께 “그의 가슴에 칼을 찔러”와 같이 천황 암살을 암시하는 듯한 표현 역시 개정판에서 복자(伏字) 처리를 강요당했다.

이 시기의 불경죄는 우익작가의 작품에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혁신 우익의 거물인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의 저서 <일본 이천육백년사>는 일본의 역사 이념을 계보학적으로 서술한 것인데, 이 책의 내용 중 “일본은 아이누민족의 국토였다”, “조정은 단지 최고 족장인 천황을 의장으로 하는 족장상담소에 불과하다”라는 표현을 문제 삼은 극우단체 ‘원리 일본’은 오카와를 향해 연일 극심한 공격을 가했다.

또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신대사 연구(神代史の研究)>(1940) 역시 일본신화의 정통성을 벗어난 역사 기술을 문제 삼은 ‘원리 일본’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신대사 연구>는 ‘황통보(皇統譜)’를 조사한 뒤 일본신화의 천손강림을 부정하고 “고사기와 일본서기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일본은 훌륭한 나라”임을 밝힌 실증주의적 내셔널리즘에 의거한 것이었지만, 천황의 절대성을 부정했다는 점만으로도 쓰다의 역사서 역시 불경죄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일본 이천육백년사>는 개정 요구를 받았고, <신대사 연구>는 발매금지처분을 받았다.

 

미적 천황제의 정념

1945년 천황의 ‘인간 선언’ 직후 1947년 ‘일본국헌법’은 이 ‘불경죄’ 항목을 삭제하고, 천황은 일본과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의미의 ‘상징천황제’를 제1장 제1조에 명문화했다. 전후(戰後)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문화방위론>(1969)에서 상징천황제를 ‘문화’의 개념으로 옹호한 바 있었는데, 이때 일본 문화를 무차별적으로 포괄하는 공동체의 이념으로 기능하는 천황이란 황제 권력으로부터 초월하여 문화의 전체성을 책임지는 존재로서의 천황을 재개념화 한 것이다. 즉 천황은 국가와 국민의 에고이즘이지만 가장 반대 극에 위치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인데, 미시마는 그것을 ‘대동아전쟁’의 원리로 간주되었던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의 천황제와 구분하기 위해 ‘미적 천황제’라고 불렀다.

미시마는 문화 개념으로서의 천황이 부정되거나 전체주의 정치이념을 포괄해야 할 때야말로 일본 문화의 진정한 위기가 도래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전체주의를 경계하면서 동시에 천황의 ‘외부’에서 천황을 투사하고자 하는 이해방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없는 장소(‘천황’의 ‘외부’)를 통해 자족적인 문화를 비판하는 행위란 자기동일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쉽게 납득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실적인 권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언제나 강력한 존재성으로 표상되는 천황에 대한 관련 서적은 비판과 옹호를 반복하면서 현재까지 일본 사회에서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천황제를 둘러싼 일본 지식인들의 다양한 제스처들이 반복되고 있는 재생산의 담론 유형들이 집중되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주목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1936년 2월 26일-29일에 육군 황도파(皇道派) 청년장교들이 ‘쇼와유신단행(昭和維新断行)・존황토간(尊皇討奸)’을 내세우면서 내무대신 사이토 마고토(齊藤實)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국정쇄신을 꾀하고자 했던 반란사건, 즉 ‘2·26사건’을 통해 유명해진 <쇼와유신의 노래>는 천황제 옹호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애국심이 천황의 이름으로 부정되는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일명 <청년 일본가>라고도 불리는 이 노래는 1930년 ‘5·15사건’의 주모자 중의 하나이자 일본 제국의 해군중위 미나미 타쿠(三上卓: 1905-1971)가 작사·작곡한 곡으로서, 당시 황도파 군인들이 부패한 재벌과 정치가 및 고위 군부의 밀월관계를 타파하고 천황 친정의 국정쇄신을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쿠데타가 정당한 행위라는 점을 암시하는 우국충정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스스로 천황의 ‘신민(臣民)’이자 ‘의사(義士)’임을 자처했던 육군 황도파 하급장교들의 바람과 달리 천황은 이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했는데, 이때 장교 한 명이 자결하고 군인 13명과 민간인 4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고도국방국가에 대한 구상은 더욱 현실화 되었고 또 군부 정치세력이 더욱 확대되어갔다는 사실이다. 저 완고한 내셔널리스트들은 불경한 범죄자들을 색출하고 국가 신화에 반하는 자들을 처단해버리는 등 천황과 국가의 정통성을 보존하는 일로 자신의 열의를 불태웠지만 결국은 자기 조직 내부의 모순으로 폭발해 버렸다. 젊은 일본 군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쇼와유신의 노래>가 원로와 권신, 재벌을 숙청하고 국가 개조와 혁신을 주장하는 군국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지만, 그것을 쇼와천황에 대한 불만으로 이해한 일본 정부가 1936년 금지곡 처분을 내렸던 것 역시 과도한 정념의 에너지가 결국은 자기 내부에서 폭발해버리는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준다.

 

<쇼와유신의 노래>

멱라수의 파도가 치고 무산(巫山)의 구름이 어지러운데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는 의분(義憤)으로 끓는 피가 넘쳐흘렀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을 뽐내기만 할 뿐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고

재벌들은 자신의 부(富)를 자랑하기만 할 뿐 사직(社稷)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네

 

아- 인간은 번영해 가는데 국가는 망해가는구나

눈 먼 백성들이 활기치는 인간 세상의 흥망은 꿈만 같고

세상은 한 판의 바둑과 같네

 

쇼와유신(昭和維新)의 봄 하늘에

정의로 뭉친 대장부들은

가슴 속으로 백만 장병이 되어

산화하는 벚꽃이 되리라고 기도한다

 

죽은 지 오래된 시체를 넘어

구름처럼 떠다니는 이 한 몸은

나라 걱정에 떨쳐 일어나

장부의 노래를 부르는가

 

하늘의 노여움인가 땅의 음성인가

도저히 심상치 않은 울림이 들리네

백성들이여, 영겁의 잠에서 깨어나라, 일본의 새벽에서

 

보라, 구천의 구름이 드리우고

사해(四海)의 물은 우렁차게 외친다

혁신의 날은 오지 않았건만

일본의 저녁 바람이 부는구나

 

아- 비통한 천지에서 길을 헤매는 사람들이 걸어가는구나

영화(榮華)를 뽐내는 더러운 세상에서

그 누구인가, 저 높은 망루에서 내려다보는 자는

 

공명(功名)은 그저 꿈의 흔적일 뿐

진실된 마음은 사라지지 않으리

인생의 의기를 깨닫는다면

그 누가 성패의 시비를 가리겠는가

 

그만 두어라, 이소(離騷)의 비곡(悲曲)을

비분강개의 날들은 이미 지나가버렸도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검은 확청(廓淸)의 피로 약동하리라

 

<참고문헌>

이계황, <기억의 전쟁>, 이화여대출판문화원, 2003.

 

이 글은 <문화 다> 2017년 6월에 게재되었던 글을 수정한 것이다.

 

이혜진·문화평론가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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