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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특별한 기억의 도시 나가사키 (1)
[이혜진의 문화톡톡] 특별한 기억의 도시 나가사키 (1)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1.01.04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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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시의 노면전차(출처: 나가사키현 관광홈페이지)
나가사키 시의 노면전차(출처: 나가사키현 관광홈페이지)

 

근대 일본의 축약사가 된 도시

 

인류 역사에서 나가사키(長崎)는 히로시마(広島)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도시로 기억된다. 19458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little boy)’8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맨(fat man)’이 한순간에 약 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일본은 8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19399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약 6년 만에 종언을 맞이했다. 이후 일본 역사는 나가사키에 대해 일본 최초의 개항도시혹은 그리스도교 순교자의 도시라는 상징성과 함께 원폭의 도시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했다.

나가사키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중국 대륙과 한반도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예부터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중국과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인 항구도시였던 탓에 다양한 문화가 습합된 음식문화와 함께 가톨릭 성당과 같은 건축문화가 발달한 이국적인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는 일본에서도 독특한 장소로 꼽힌다. 예컨대 나가사키의 3대 명물로 불리는 나가사키 짬뽕, 카스테라, 도루코(터키) 라이스와 같은 먹거리들은 물론 구라바엔, 오우라 천주당, 우라카미 천주당 등의 건축물들은 일본에서도 흔치 않은 볼거리들이다.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 오이타(大分), 구마모토(熊本)와 함께 기타규슈(北九州)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인 나가사키는 한국에서의 이동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일본 최초의 개항과 원폭 투하로 이어진 일본 근대사의 주요 현장을 경험하기에 최적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는 아닌 것 같다.

연합군의 원폭 투하로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초토화되었던 나가사키가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모든 것이 리셋되었을 것이라고 예측하기 쉽지만, 현재의 나가사키는 미쓰비시(三菱)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로 대표되는 메이지(明治) 일본 산업혁명에 대한 긍지와 함께 조선인 강제징용을 둘러싼 문제들이 산재해 있는 등 여전히 2차 대전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예의 주시되고 있다. 여기서는 기타규슈 지역의 필수 여행지라 할 수 있는 나가사키의 할 역사적 현장들을 추천하는 의미에서 데지마(出島), 구라바엔(Glover/Glover Garden), 헤이와코엔(平和公園), 군칸지마(軍艦島/하시마, 端島)를 살짝 돌아보기로 하자. (이 글은 2회로 나뉘어집니다.)

 

데지마(출처: 네이버블로그-뜨개하는하마)
데지마(출처: 네이버블로그-뜨개하는하마)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섬, 데지마

 

나가사키 시내에 위치한 주요 명소는 (1) 차이나타운이 있는 시내 중심가, (2) 구라바엔이 있는 야마테(山手) 지역, (3) 평화공원이 있는 우라카미(浦上) 지역, (4) 나가사키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이나시야마코엔(稲佐山公園) 지역 등 크게 네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이곳을 순서대로 돌아보기 위해서는 나가사키의 명물로 꼽히는 노면전차를 이용하는 것이 시간상이나 동선 면에서 바람직하다. 1895년 교토(京都)에 처음 노면전차가 도입된 이래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 전국 65개 도시로 확대된 노면전차는 일본인들의 주요 이동수단이 되었다. 그런데 1960년대 고도성장기에 자동차 보급이 급증하자 노면전차는 교통 체증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1970년대 말 급속히 사라졌다. 이후 일본 전국 각지에서 움직이던 노면전차들이 전부 나가사키로 모인 탓에 현재 나가사키 시내를 횡단하는 노면전차들은 각각의 독특한 개성을 간직한 채 시내 전체를 누비면서 살아있는 노면전차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나가사키를 상징하는 많은 장소들 중 나는 데지마를 첫 번째로 꼽고 싶다. 이나시야마코엔 전망대에서 보이는 빼어난 나가사키 항구의 풍경이 말해주고 있듯이, 나가사키는 쇄국정책을 거듭했던 에도막부가 최초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중국·조선을 비롯한 외국과 교류하는 창구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 중에서 근대 일본의 완성을 이끈 장소로서의 상징성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데지마다. 1904년 나가사키 항만개량공사로 매립된 이후 원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1996년 나가사키 시의 주도로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점차 옛 모습이 재현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현재까지도 복원 중에 있기 때문에 17세기 에도막부 시절의 현장을 그대로 볼 수는 없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 역사가 보여주는 데지마의 역할이다.

나가사키는 1571년 포르투갈과 무역을 시작하면서 무역항이 되었다. 이후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중국과의 교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런데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상업적 영리 목적 이외에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 천주교 포교를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에도막부는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1634년 약 2년간 그리스도교 포교를 막기 위해 시내에 흩어져 있던 포르투갈인들을 격리하기 위해 나가사키 항 근처에 인공섬을 조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데지마다. 즉 데지마는 나가사키 땅과 작은 돌다리를 연결하여 바다 위에 만든 작은 인공섬으로서, 여기에 포르투갈·스페인 상인과 선교사들이 일본인들과 격리되어 집단 거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1549년부터 1644년까지 약 75만 명의 일본인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데, 이들을 기리시단(吉利支丹)’이라고 불렀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천주교 교리는 봉건적 신분제도의 희생자였던 서민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제공했고, 이것은 곧바로 에도막부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그러던 중 1637년 규슈의 시마바라(島原)와 아마쿠사(天草) 두 지역에서 영주의 과세부과와 기독교 탄압에 반기를 든 민중반란인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자 포르투갈과 스페인인들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히라도(平戸)에 남아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을 데지마로 옮겨왔다. 포르투갈·스페인 상인들과 달리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던 네덜란드는 기독교 포교보다 통상무역에 더 집중했기 때문이다. 1641년 일본에 거주하는 유일한 외국인이 된 네덜란드인 상인들이 일본과 독점무역을 하기 시작한 와중에도 에도막부는 모든 네덜란드인들을 일본 내륙과 격리하기 위해 데지마에 두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포교에 대한 에도막부의 공포가 얼마나 컸는가를 잘 보여준다.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인 데지마는 길이 180m, 60m의 석조제방을 둘러쌓아 일본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다. 내부에는 네덜란드인 20여 명 정도가 살 수 있는 규모의 거주지와 채소밭, 그리고 가축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물은 대나무관을 통해 육지에서 공급받았고, 거주 임대료 외에 일본 내륙에서 공급되는 물자에 대한 비용도 따로 지불했다. 기록에 의하면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은 종종 연을 날려 육지의 일본인들과 연싸움을 하면서 고립감을 해소하기도 했고, 또 나가사키 시내의 게이샤들이 한밤중에 은밀히 데지마를 방문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약 220여 년간 데지마는 네덜란드와의 교역장소로만 활용되다가 1855년 네덜란드와의 화친조약 체결을 계기로 네덜란드인들의 나가사키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더 이상 네덜란드인들의 격리생활이 무색해지자 1859년 데지마를 폐쇄했다. 현재는 1877년 일본 최초의 신학교인 데지마 신학교를 비롯하여 네덜란드 상관장의 저택과 일본 관리들의 거주지 등이 복원되어 개항 당시 서양과의 무역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데지마를 나와 길을 건너면 나가사키 항 주변에 150m에 달하는 복합상업시설인 나가사키 데지마 와프(Ngasaki Dejima Wharf)’가 있는데, 항만을 잇는 소박한 목조 데크는 나가사키 항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한가롭게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여행의 풍미를 만끽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구라바엔(출처: 나가사키현 MATCHA)
구라바엔(출처: 나가사키현 MATCHA)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이 된 구라바엔

 

나가사키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명소를 꼽으라면 아마도 구라바엔일 것이다. 나가사키 항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경지에 위치한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개항 당시 통상무역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비즈니스의 기회를 잡기 위해 들어온 서양인들이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음은 물론, 일본 개항 초기의 역사를 보여주는 서양식 건축물과 함께 그들의 활약과 라이프스타일 등의 역사적 장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나가사키 최대의 명물로 꼽히는 나가사키 카스테라전문점이 즐비한 거리를 경유하여 구라바엔 제1게이트로 입장하는 코스도 많이 이용하고 있지만, 나가사키가 자유무역항으로 번성해간 약 40여 년의 기간 동안 조성된 미나미야마테(南山手)와 히가시야마테(東山手) 지역의 서양 상인 거주지를 함께 돌아보기를 원한다면 오란다자카를 여유롭게 산책하면서 마주치게 될 구라바 스카이로드를 타고 급경사면을 올라가는 루트인 제2게이트 입장 코스를 추천한다.

일본의 100로도 선정된 오란다자카는 네덜란드=홀란드(Holland)의 일본식 발음으로서, 당시 네덜란드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오란다라고 불렀던 것이 차츰 모든 서양인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확대되면서 미나미야마테와 히가시야마테 지역에 조성되어 있는 서양인들의 가옥과 그들이 경영하던 은행, 호텔, 영사관 등이 모여 있던 언덕길(, 자카)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넓고 평평한 모양의 돌이 균일하게 깔려 있는 오란다자카의 양쪽에는 약 200여 년에 걸친 서양과의 교류 역사가 보여주는 서양식 건축물에서 느낄 수 있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나가사키 시내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선사해준다.

경사각 31, 높이 50m, 길이 100m에 이르는 구라바 스카이로드는 산꼭대기에 거주하는 나가사키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2002년 약 32억 원을 들여 만든 일본 최초의 공공 엘리베이터인데, 비스듬한 경사면을 오르는 사행(斜行) 엘리베이터에 이어 수직 엘리베이터를 갈아타면 곧바로 구라바엔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여행객들에게도 매우 편리한 이동수단이 되고 있다.

구라바엔은 원래 1863년 스코틀랜드인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1911)의 저택이다. 현재는 이 부지에 구 미쓰비시 제2도크 하우스, 구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장 관사, 구 워커 저택, 구 나가사키 상업고등학교 정문 수위실, 구 알트 저택, 구 스틸 기념학교, 구 링거 저택, 구 올트 저택과 1878년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서양음식점 지유테이(自由亭)’가 자리해 있는데, 전후 고도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서양식 건축물들이 점차 사라지는 시점에 이르자 1974년 미나미야마테 정비사업을 계기로 하여 나가사키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서 깊은 서양식 저택들을 이 글로버 저택에다 모아 놓고 보존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양관(洋館) 테마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라바(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일본식 발음인 것. 구라바엔에서 가장 화려한 글로버 저택은 일본에서도 가장 오래된 서양식 목조건축물로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1막의 실제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구 워터 저택으로 가는 광장 한 편에는 푸치니의 동상과 함께 <나비부인>의 주인공인 게이샤 초초 상 역을 맡아 무려 2천 회 공연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일본의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三浦環)의 동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글로버는 185921세의 나이에 무역회사 직원으로 나가사키에 들어온 이후, 1864년 자신의 이름을 딴 무역회사 글로버 상회를 운영하면서 나가사키에 서구식 항구를 조성하는 데 주력하고 메이지유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무기와 전함을 일본에 수입토록 했으며 조선업, 철도업, 석탄채굴업, () 사업 등에 손을 뻗치면서 엄청난 부를 획득했다. 일본 최초의 철도건설사업과 미쓰비시 조선소의 기반이 된 일본 최초의 조선소 건립 역시 글로버가 이룩한 성과다. 1875년 강화도에 불법 침입한 일본 군함 운요호도 그가 일본에 팔았던 선박 중의 하나다.

그 외에도 다카시마(高島) 탄광, 구메야마(龜山) 회사, 기린 맥주를 비롯하여 천주교 성당과 주택 건축물 등 일본 최초의 서양식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다방면의 사업에 관여했던 그는 일본 근대화 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초창기 기린 맥주 로고의 기린은 그의 딸 하나 글로버(Hana Glover: 1871-1938)가 그린 그림이라고 전해지는데, 글로버 저택 내부에 자리한 온실에 두 개의 기린 석상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일본인 여성 카가 마키(Kaga Maki)와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글로버가 오사카 여행 중에 만난 나이 어린 이혼녀 야마무라 쓰루(Yamamura Tsuru)와 새 가정을 이루고 사는 동안 태어난 장녀가 바로 하나 글로버이다. 카가 마키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 영감을 준 주인공의 모델인데, 그녀는 나비 무늬가 그려진 기모노를 자주 입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뜻밖에도 카가 마키의 딸인 하나 글로버가 현재 한국의 인천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 글로버는 1896(또는 1897) 구라바 저택 정원에서 영국인 무역상 월터 조지 베넷(Walter George Bennett: 1863~1944)과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하나 글로버 부부가 인천에 정착하게 된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지만, 재능대학 손장원 교수에 의하면 193411월에 발간된 삼천리 6권 제11호의 한 기사 중 <半島配置英米 等 7外交陣容>에 영국영사관 영사대판(領事代辨) 월터 조지 베넷에 대한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02년 인천에서 일양무역회사인 광창양행(베넷상사, Bennet & Co.)’을 설립하고 영국 영사를 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 글로버는 남편을 따라 생면부지의 땅 인천에 정착한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것 같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녀는 1938년까지 베넷과 함께 인천에서 살다가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회에 계속)

 

<참고문헌>

<‘나비부인과 개항기 인천의 인연>, 손장원의 인천근대문화유산답사(2014.12.5.) http://bit.ly/1yRSGY1

 

 * 이 글은 <작가마당> 2016년 하반기호에 실린 것을 수정한 것으로, 20211월과 2월에 나누어 게재한다.

 

·이혜진(문화평론가)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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