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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의 문화톡톡] 하늘을 쳐다 보지 마세요, 화면을 보세요
[이 호의 문화톡톡] 하늘을 쳐다 보지 마세요, 화면을 보세요
  • 이호(문화평론가)
  • 승인 2022.09.05 1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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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충돌할 각도로 거대 혜성이 다가온다. 지구의 전파망원경으로 그 혜성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제 우주선을 발사하여 혜성을 폭파시키고자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시추에이션이다. 하지만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마겟돈>(1998)이 아니라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Don’t Look Up>(2021)이다. SF 액션활극이 아니라 코미디 풍자극의 상황이다. 따라 선남선녀들이 잔뜩 나와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영웅적인 모험을 펼치다가 거룩한 희생으로 지구와 사람들을 구하고 세상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는 식의 서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이 영화에서 그 혜성은 예측 궤도 그대로 지구와 충돌하고 지구는 종말을 맞이한다.

 

이 영화는 혜성이 다가온다는 묵시론적 종말 상황을 설정하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여기’의 문화와 문명을 블랙코미디로 잘 묘파하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보면서 쓴웃음을 지을 수 있는 사람, 마음이 착잡해지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수정할 수는 없더라도(아마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는 구조적이므로!) 인간 존재의 고유한 자기반성 능력이 아직은 활성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재미가 없었다거나 도무지 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면, 그는 이 영화와 감독이 비판하고 있는 작금의 문명 세태에 대한 조금의 비판적 거리도 취할 수 없이 사회와 문화에 동일화되어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비판하면 반성적 모드를 작동시키기보다는 불편함과 불쾌함으로 반응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영화는 미국 미시건 주립대학교의 천문학과 교수 랜달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박사과정생인 케이트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가 지구로 날아오는 혜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혜성의 크기는 5~8킬로미터의 크기이며 태평양에 떨어질 것이며 그 충격으로 지구는 멸망할 것이다. 이 사실을 먼저 알아낸 그들은 미국 정부에 알리고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 대책을 강구할 것을 요구하지만, 대통령(메릴 스트립)은 그런 것에 대해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영화에서는 이런 상황을 설득력 있게 잘 그려내고 있다. 정치 지지율과 대중들의 반응 같은 것들에만 신경을 쓰는 백악관의 정치가들은 닥쳐온 재앙마저도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지지도를 끌어올릴 연출(Show business)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든 문명권, SNS로 전세계가 하나로 묶여 있는 작금의 사태에서 미디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서 사람들을 기이한 상태에 놓이게 만들었다는 것을 웃음으로 잘 보여주는 문명비판이다.

 

대통령과 백악관이 시덥지 않은 반응을 보여주자 민디 일행은 직접 언론에 제보를 하며 인터뷰 방송에 출연하지만 뉴스쇼의 사회자(케이트 블란쳇)는 재치 있는 농담만을 일삼으며 하나의 가십거리를 대하듯 한다. 사람들이 도무지 진지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 것에 폭발한 케이트는 그저 “매체 훈련이 안 된 사람”일 뿐이며, 민디 역시 SNS의 반응을 즐기기 시작한다. 즉 사람들은 사태의 진실을 대면하기 보다는 어떤 뉴스든 그것을 하나의 즐길거리로 여길 뿐이며 밈으로 만들어 버린다. 끔찍한 뉴스조차, 그래서 진지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 앞에서도 사람들은 늘 해왔듯 패를 나누어 설전을 벌이든지, 밈 사진을 만들어 공유하며 웃음거리와 놀거리로 향유할 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문제는 지구의 멸망 앞에서도 그러고 있으니까 문제인 것이다. 혜성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단계까지 접근해 와도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에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라는 파와 쳐다보지 말라는 파로 나누어 대립할 뿐이다. 미디어를 통해 현실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한 단계를 넘어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혜성을 폭파시키기 위해 우주선을 발사하는 장면을 자신의 정치적 쇼로 이용하던 대통령에게 찾아온 피터 이셔웰은 스마트폰을 개발하는 혁신 기업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대통령에게 혜성을 그냥 폭파하지 말고 지구로 가져와 혜성의 금속을 지구상의 희소한 자원으로 이용하자고 말한다. 그리하여 혜성 폭파 임무 우주선은 지구로 회귀한다. 그리고 끝내 피셔웰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재앙마저도 자신의 기업과 주가 상승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과학기술 혁신가이자 지구 경제 개발자와 정치지도자의 협업이야말로 정말이지 뛰어나게 생산적이고 혁신적인 사고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이러저러한 진행 속에서 중국과 러시아 인도의 우주선 발사도 실패로 끝이 나고, 남은 것은 피셔웰의 나노봇을 이용한 행성 분쇄 밖에 없는 상황에서 피셔웰의 시도는 결국 혜성 분할에 실패하고 만다. 이 와중에서 민디 교수와 피셔웰의 대화는 주목할 만하다. 민디가 피셔웰을 ‘사업가’(비즈니스맨)이라고 부르자 분개한 피셔웰은 민디에게 자신의 알고리즘은 민디에 관한 4천만건의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1994년부터 내린 모든 결정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민디의 건강검진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대장 용종이 있다는 것도 먼저 알았고, 심지어는 민디에 관한 모든 정보를 집약해 “나는 당신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인지’가 아니라 ‘무엇인지’다. 즉 인간 대상은 그가 하는 행동과 결정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고, 그의 행위는 그의 소비성향에 따라 구분될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결정하면 그것은 곧 돈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 때문이다. 피셔웰은 민디에게 덧붙인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높은 도덕적 신념을 근거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쾌락을 좇고 고통에서 도망친다. 들쥐들처럼.…” 알고리즘은 96.5%의 정확성으로 민디의 죽음까지 예측한다. 그는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갈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모든 것이 알고리듬의 패턴 분석 속에 인간 고유의 실존 같은 것은 설 자리가 없다. 혜성이 다가오면서 보여주는 모든 인간들의 반응은 얼마든지 예측 가능하고 분류 가능한 정보더미들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에게로 돌아가 신에게 기도하며 차분하게 죽음을 맞이할 때, 그가 가지고 있는 그만의 삶의 정향성 따위 역시 분류가능한 하나의 패턴일 뿐이다. 즉 그의 영혼은 측량되지 않으며(솔직히 측량할 필요조차 없다. 영혼 따위는 돈이 되지 않으니까!) 그저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 패턴의 하나로 분류될 뿐인 것이다. 이것이 끔찍한 디스토피아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하지만 괜찮다. 괜찮기는커녕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자 도래할 미래이며 앞으로 인류가 배우고 익혀야 할 미래적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산업을 일으키고 경제에 피를 돌게 할 것이다. 심지어 선택사항도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도태이자 죽음이며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은 돈을 버는 일에 계측할 필요가 없는 배제시켜야 할 존재들에 불과하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자 몰래 준비해둔 비행선에 탑승하여 지구를 빠져나가, 냉동 휴면 상태로 수만년을 떠돌다 지구와 같은 조건의 행성에 도착한 이셔웰과 대통령은 알고리즘이 예언한 대로 브론테록에게 잡아 먹힌다. 브론테록에게 잡아 먹힌다는 것은 예언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는 알고리즘. 이것이 아마 이 영화에서 비판하는 사회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마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이자 주제는 뉴스쇼에 나와서 (매체 훈련이 덜 된 태도에 불과할 뿐인 태도로) 절규하듯 외치며 열폭하는 민디(디카프리오)의 발언일 것이다.

“우리끼리 그런 최소한의 합의도 못하고 처앉았으면, 대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거예요? 아니, 서로 대화가 되기는 해요? 어디가 망가진 거예요? 어떻게 고치죠? 아무래도 이 정부는 싸그리 미친 것들 같다고요! 우린 전부 다 죽을 거예요! 집에 가야겠어요. 정말 간절히 집에 가고 싶어요.”

 

 

미국의 세태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영화지만, 글로벌화된 지구 덕분에 이 영화에 나오는 미국인들의 상황은 전지구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저개발 국가에서도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세상이니 말이다. 이 영화는 마치 트루먼 쇼을 시청하며 트루먼의 탈출을 응원하던 사람들이 그 쇼가 끝나자 다른 채널의 볼거리를 찾아 헤매는 장면에서 예언됐던 것의 진도가 한발 더 나아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해서 재미있고 그만큼 더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영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스스로를 고쳐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심지어는 이런 생각마저 그저 구닥다리 패러다임에 길든 구태의연한 인간관일 뿐이라고 알고리즘적으로 분류되었을 것이 분명하니, 영화를 끄고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쇼츠’나 구경하다가 잠들고 다시 일어나 일터로 향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을 터이다.

 

 

글 · 이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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