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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의 문화톡톡] 여기-지금 다시 도착한 바울로의 서신
[이 호의 문화톡톡] 여기-지금 다시 도착한 바울로의 서신
  • 이호(문화평론가)
  • 승인 2022.11.1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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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사도 바울>

글쓰기(를 포함한 모든 언표 행위)란 어쩌면 무인도에서 유리병에 넣어 대양으로 띄워 보내는 편지 같은 것일 수 있다. 누구에게 도착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발신되는 편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거기에는 SOS 대신 수신자를 주체로 호출하고 가야할 길을 일러주겠다는 글귀들로 가득하다. 그러니 글쓰기는 분명히 시대착오적이고 담론 공간 착오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편지(언표)의 수신자들이 어떤 환경, 어떤 시대, 어떤 문화에 살고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생각들을 불특정 다수에게 특정한 매체를 통해 전달하는 행위인 것이다.

언젠가 한번 읽고 가끔씩 사진첩을 넘기듯 다시 열어보게 되는 텍스트가 있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책은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이다. (한국) 기독교 알러지가 있는 분들에겐 안됐지만 사도 바울 이야기와 기독교 얘기가 많이 나오므로 이 책을 소개하는 이 글도 읽지 말 것을 권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통 기독교 이야기가 아니라 사도 바울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하면 보편성의 정초자로 수용하여 이 세상을 횡단할 것인가의 이야기라는 것 정도가 그나마 안정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성스러운 텍스트’라는 것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 담론의 시대이니, 그러기가 더욱 쉬울 것이기는 하다. 그래서 고전은 선택적으로 ‘열린 텍스트’이거나 ‘닫힌 텍스트’다. 바디우에게는 닫힌 텍스트인 셈인데, 바디우는 그래도 그것을 자기 식으로 읽는다. 바울 서한의 바디우식 해석인 셈이다. 끝없이 사건을 말하면서 바울을 자기 식으로 전유하는 방식. 그런데도 진리에 무한히 접근하고 있으며 진리의 파편들을 생산하는 이 독법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바디우에 따르면 바울이야말로 우리의 동시대인이다. 그가 처해진 당대 로마 상황과 우리 시대는 아주 닮아 있다. 하나의 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식민지배 하의 약소국에서 하나의 특수한 사상을 전지구적인 보편성의 토대로 만든 사도 바울의 상황을 우리 시대의 문제틀과 중첩시키는 실력이 볼 만하다.

 

책 내용이 음미할 내용은 많으나 이곳에서는 짤막하게 기독교의 3가지 표어 피스티스, 엘피스, 아가페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자. 먼저 ‘피스티스’에 대하여. 기독교도들이 말해 주지 않지만 바디우가 친절히 알려주는 게 있다. 믿음이란 결국 공적인 선언을 통해서만 정초 지워지는 주체의 구성인 것이란 것. 이것이 초창기 기독교도들이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죽어가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의 본 뜻이다. 분명 죽음을 앞두고서 그들이 겪었을 두려움과 공포, 한 없이 나약해짐과 믿음을 소유한 것에 대한 회의는 예측가능하다. 그러니 결국 믿음이란 그들을 조롱하는 로마시민들 앞에서 끝내 죽음을 감수하는 그 과정이 믿음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믿음의 소유를 구성하는 양식인 것이다. 그 행위를 통해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믿음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디우의 용어로 ‘사건’이 있어야 가능하다. 보편성의 횡단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같은 사건(다시 말해 주체로 구성되는 사건)이 주어져야 한다. 진리와의 조우(사후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진리의 사건성 말이다.

엔도 슈사꾸의 <침묵>에서 제시된 상황의 딜레마가 있다. 일본의 마을에 포교하던 신부가 관아에 붙들려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면 자신이 전도한 수십 명의 사람들은 살아난다. 반면 자기가 믿음을 유지하면 그 사람들은 죽는 상황이다. 이는 휴머니즘의 차원에서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딜레마다. 사랑의 차원에서 그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기 위해 자기 믿음을 부인하는 이 신부의 행동은 쉽사리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믿음의 구조에서 보자면 그 신부는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희생’을 한 것이지 믿음의 차원에서 행위(선택-배교)한 것은 아니다. 즉 그의 희생은 인간적인 희생으로서 높이 살만한 것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되,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뜻이 된다. 즉 그는 휴머니스트로서의 자기희생을 한 사람이지 믿음의 사람은 아닌 것이다. 자기 믿음을 버려서라도 남을 구원하겠다(그것은 결국 현세에서의 생명연장과 고통의 경감일 뿐이지만)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 그리스도인이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휴머니스트이기를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그 소설은 ‘휴머니즘이냐 신앙이냐’를 대립적으로 인식한 한계에서 나온 딜레마를 제시한 이야기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게 사건(믿음)으로 주체성이 구성된(누벼진) 주체는 이제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는 여정에 올라서게 된다. 비로소 그의 인생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주체의 이야기가 된다. “진리의 사건 이후 보편성을 이 세계 안에 기입하고 이 보편성이 주체들을 삶의 길에 합류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법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그에게 임무로 주어진다. 이것이 그의 소명 즉 ‘사랑의 임무’가 된다. 그러나 이 길은 쉽지 않다. 이 세계는 본성상 진리와 대립되고, 보편성이 횡단하지 못하도록 무수한 격자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유의 가능태적 힘에 대해 선언된 사유”이다. 그러나 성스러운 텍스트는 말한다.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이라고. 이 대목에서 믿음은 사랑으로서의 실천이 된다. 믿는다면 실천한다. 실천함으로써 믿음이 담보되고, 진짜 믿음은 (사랑을, 사랑으로서)실천한다. 진짜 믿음은 수고(사랑하려면 수고-실천해야 한다)를 동반하고, 그 날이 오게 하기 위해 행동을 유발한다. 믿음은 불확실성 속에서 그것을 희망하는 능력이고, 그것을 행동으로서 아는(이루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성서는 다시 말해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그리고 끝으로 ‘엘피스’라고 불리우는 ‘희망’이 등장한다. 희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어떤 사건, 즉 신에게서 버림받을 사람과 구원받을 사람을 선별하는 사건에 대한 희망이다. 정의는 실현될 것이고, 희망은 바로 이 진리의 마지막 법정에 의탁될 것이다. 정리하면 믿음은 행위(에르곤)에 비교되고, 사랑은 고역, 노력, 고통에 비교된다면 희망은 참을성, 확고부동함이나 인내에 연관된다. 그러므로 바울에 따르자면 희망은 객관적 승리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주체적인 승리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주체적 차원은 극복된 시련이지 우리가 그것의 이름으로 시련을 이겨내는 어떤 것이 아니다. 희망은 실행(믿음의 실천으로서의 사랑)의 시련 가운데 있는 충실성의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실재를 가리킨다.

끝으로 왜 보편성인가 하면(여기서 보편성은 전체주의가 아니다) 차이나 특수성은 결국 “너는 A냐, 나는 B다. 그러니 우리 그냥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도록 하자”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상대주의로 떨어진다. 상호주의 역시 A와 B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A와 B가 관계되려면 둘은 평등해야 하고(호혜성) 서로 사랑(호의)해야 한다. 따라서 바디우가 생각하는 보편주의는 바로 특수화하는 차이를 억압하지 않으며, 이 차이들을 가로지르는 보편성인 것이다. 허무적 상대주의가 차이와 자유라는 이름으로 횡행하고 거대한 제국의 법이 무차별적으로 격자들을 만드는 이 세계에서 바디우의 <사도 바울>이 우화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마 아직도 전시대적 사고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필자의 낡은 관념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씁쓸히 찾아온다.

 

 

글 · 이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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