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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경의 문화톡톡] 같은 주제를 말하는 다른 방식 - <더 글로리>와 <사랑의 이해>
[구선경의 문화톡톡] 같은 주제를 말하는 다른 방식 - <더 글로리>와 <사랑의 이해>
  • 구선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3.01.16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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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1월의 주제는 <더 글로리>였다. 간만에 정주행한 드라마였다. 작가, 감독, 배우, 모두 기대할 만한 조합이었고 뚜껑을 열어보니 그 기대를 충족시켰고 살짝 스쳐 가는 한두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정주행을 부르는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별다른 기대 없이 클릭한 또 다른 드라마는 <사랑의 이해>였다. 조금 사색적인(?) 제목 때문에 고개를 갸웃하며 보기 시작한 이 드라마는, <더 글로리>처럼 몰입되지는 않았지만 대신 덜 긴장하고 덜 힘들어하며 편안하게 볼 수 있다는 미덕이 있었다.

두 드라마의 여운을 즐기던 중, 얼핏 봐서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드라마가 묘하게도 같은 지점을 건드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는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하여 주인공이 복수를 해나가는 강한 스토리이고 또 하나는 은행을 배경으로 젊은 남녀들의 엇갈리고 이어지는 말랑한 사랑 이야기이다. 하지만 두 드라마 모두 이 사회의 계급과 차별의 문제가 배경에 깔려있고 그로 인해 일어난 갈등이 인물 간의 주요 장애 요소로 작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더 글로리] 메인 포스터
[더 글로리] 메인 포스터

<더 글로리>는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의 김은숙 작가 집필, <비밀의 숲>의 안길호 감독 연출, 거기다 배우 송혜교가 주연을 맡아 진작부터 기대를 모으고 있던 기대작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끔찍한 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동은(송혜교 분)이 자살 대신 복수를 선택한 후 성인이 되어 차근차근 가해자들을 응징해나가는 이야기다. 작년 12월 30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후 단 3일 만에 2,541만 시청 시간을 기록하며 단숨에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TV(비영어) 부문 3위에 오른 데 이어 2주째에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8부작인 시즌1을 다 본 시청자들은 3월에 공개될 시즌2를 벌써 기다리는 중이다.

이 드라마에서 인물들 간에 갈등이 생기는 가장 큰 배경은 사회경제적 차이이다. 박연진(임지연 분)은 세명시에서 막강한 재력을 행사하는 엄마 덕분에 어릴 때부터 안되는 것도 없고 겁나는 것도 없이 자라왔다. 친구들을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고 차마 저럴 수 있을까 싶은 그 어떤 짓을 해도 엄마가, 선생이, 학교가 그녀를 보호했다. 당연히 선과 악의 판단은 없고 내가 좋은 것과 싫은 것, 재밌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만이 행동의 기준일 뿐이다. 결혼할 때도 자신의 그런 삶을 계속 보장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남자를 선택했고,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던 삶이 사랑하는 딸에게까지 고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반면 문동은은 일찌감치 아버지는 부재했고 엄마는 동은을 보호할 힘은 물론 의지도 없는 인물이다. 동은의 학교 자퇴 사유를 ‘부적응’으로 적는 데 동의하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동은 인생의 장애 요소가 되는 엄마다. 이런 동은에게 교사나 학교가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부모의 사회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나뉜 그들의 계급은 매우 선명하고 도저히 쉽게 바꾸거나 올라설 수 있는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더 글로리] 포스터
[더 글로리] 포스터

이러한 계급 관계는 동은을 괴롭힌 5명의 가해자들 사이에서도 촘촘하게 형성된다. 박연진은 결혼 후에도 전재준(박성훈 분)과 바람을 피우며 관계를 이어 나가지만 결코 그를 결혼 상대로 고려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쾌하게도 박연진의 남편인 하도영(정성일 분)의 재력과 능력이 전재준과 그 집안보다 월등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탁소집 딸인 최혜정(차주영 분)은 이들보다 배경이 떨어지는 탓에 무리 안에서도 늘 무시와 조롱을 당하지만 그래도 스튜어디스라는 정확한 직업을 가진 덕분인지 또 다른 남자 동창인 손명오보다는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손명오(김건우 분)는 무리의 가장 아래 서열에 위치하여 전재준의 가게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고, 엄마 덕에 화가라는 이름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이사라(김히어라 분)의 마약 심부름 등 이 무리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 결국 이들은 친구라는 이름은 허울일 뿐 명확하게 서열과 이해가 작동하는 또 하나의 작은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로맨스 드라마의 대가로 김은숙 작가를 기억하는 이들은 학교 폭력과 복수극이라는 소재의 선택이 의외라고 여겨지기도 했지만, 초기 로맨스 작품에서 그린 악역들을 떠올려 보면 <더 글로리>의 악역들이 그렇게 낯설지 않다.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그걸 실현할 돈과 권력이 있고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기까지 한, 양심 따위 없이 잘 살 수 있는 이 사회의 1% 상류층’을,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을 핍박하는 적대자로 흥미롭게 생생하게 보여줬었다.

 

[사랑의 이해] 포스터
[사랑의 이해] 포스터

<더 글로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명하게 선 그어 보여주고 있다면, <사랑의 이해>는 이와는 전혀 결이 다르다. 여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인생을 살아내는 평범한 인물들이 다만 서로 다른 입장과 위치 때문에 갈등이 일어날 뿐이다.

주인공 하상수(유연석 분)는 명문대, 강남 8학군 출신, 금융권 취업이라는 스펙으로 보아 얼핏 금수저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편모슬하에, 강남이지만 반지하에 가까운 집에서 자랐고, 어머니는 ‘원장’이라는 직함으로 불리긴 하지만 직접 자기 몸을 써서 일을 하는 에스테틱의 관리사이기도 하다.

여주인공 안수영(문가영 분)은 고졸 출신으로 일반직과 분류되는 서비스 직군이며 이로 인해 은행 내에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은근한 차별을 당한다. 잡일이 생기면 으레 안수영의 차지가 된다거나, 퇴근 후 접대 업무 동반을 요구하기에 만만하다거나 하는 식의, 명확하지 않아서 더 잔인한 차별들이다.

안수영보다도 더 불안한 존재는 청경인 정종현(정가람 분)이다. 용역회사를 통해 월급을 받을 때 차별을 실감한다는 그는 은행에 근무하지만 은행 사람이 아니고, 업무 범위가 모호한 채로 직원들의 심부름이나 은행 내 청결 유지 등 잡일들을 군말 없이 하는, 할 수밖에 없는 위치의 사람이다.

굳이 줄을 세워보자면 하상수-안수영-정종현의 서열이 매겨지고 여기에 박미경이라는, 하상수보다 높은 계급의 진짜 금수저가 존재한다. 아버지는 기업 대표이고 ‘지점장님보다 좋은 차는 곤란하기에’ 바로 다른 차를 구매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그런 재력과 배경 때문에 당연히 위축될 일도 없고 당당할 수 있는, 그래서 받는 질투와 선망이 유일한 불편함인 금수저다. 지금 고객과 원장으로 만나 상수모와 우정을 쌓고 있는 미경모가 그들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과연 이들의 관계를 지지해줄 수 있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상황이다.

이 드라마는 이렇게 섬세하게 계급을 보여준다. 이 사회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A4용지를 접어서 낸 금처럼, 선명하지만 지울 수는 없는 차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을 연애와 결혼에 결부시켰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현실 연애를 보여주는 드라마가 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훨씬 계산에 밝고 낭만이 없다는 식의 발언은 할 필요 없다. 돈이냐 사랑이냐, 결혼의 조건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언제나 있었던 주제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더 좋았던 이수일과 심순애의 그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에도.

그래서 이 드라마는 로맨스의 향기가 약하다. 연애보다는 현실 연애에 방점이 찍혀있다. 만약 유연석, 문가영이라는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서 그들의 멜로 모멘트를 기대하고 들어온 시청자라면 적잖이 실망을 느끼고 떠나갔을지도 모른다.

 

[사랑의 이해] 포스터
[사랑의 이해] 포스터

<더 글로리>는 시청자들에게 시즌2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게 만들었다. 정확히 이야기의 반이 남은 셈이니 이제 시작이기도 하다. 아직 다 못 푼 주여정(이도현 분)의 스토리 등이 아쉬웠던 개연성을 보강해줬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문동은의 복수극이 어떻게 완성될지가 가장 기대되는 시청 포인트다.

더 궁금한 것은 <사랑의 이해> 쪽이다. 사랑의 이해는 이 글을 쓰는 현재 8회까지 방영되었다. 역시 딱 절반을 온 셈인데 지금까지 한 커플은 이뤄졌다가 막 위기를 극복한 참이고 또 한 커플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곧 무언가 큰 위기가 닥쳐오리라는 떡밥을 남기고 8회가 끝났다. 당연히 이 지형도가 흔들려야 드라마는 이어질 수 있고 재밌을 텐데 그 갈등 요소를 어디에서 끌어낼지 궁금해진다. 계급과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연애와 결혼의 방정식이라는, 다른 드라마와 차별되었던 그 요소가 마지막까지 극에 녹아들어 잘 마무리되기를 기대해본다.

 

‘우리는 논픽션을 읽을 때는 방패를 치켜들고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픽션에 푹 빠지면 감정이 움직여 지성의 방패를 떨어뜨리고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조너선 갓설)고 한다. 바로 시청자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작가가 할 일이다.

작가들의 메시지는 드라마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재미있는 스토리 아래 녹아들어 정신없이 보고 나면 여운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게 드라마의 덕목이고 매력이며 잘 된 드라마다. 주제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혹은 보고 난 후, 계급과 차별에 대해, 이 사회의 불평등과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한 번쯤 생각을 환기하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드라마 주제가 구현되는 방식이다.

두 드라마가 어떻게 시청자를 빠지게 유혹하고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가는지, 아직 조금 더 음미할 기회가 남아있다.

 

 

글·구선경
드라마작가. 작가협회 교육원과 대학에서 드라마와 스토리텔링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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