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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숙의 문화톡톡]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 물방울에서 시작해서 침묵으로 끝나다
[서곡숙의 문화톡톡]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 물방울에서 시작해서 침묵으로 끝나다
  • 서곡숙(문화평론가)
  • 승인 2023.03.1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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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창열 화백, 물방울을 그리는 추상미술의 거장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김오안 & 브리지트 부이오, 2022)는 김창열 화백의 삶을 담은 영화이다. 김오안 감독은 파리 국립미술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한 영화감독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는 김환기 화백, 박서보 화백, 김창열 화백이다. 김환기 화백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한국의 산천, 백자, 전통무늬 등 한국적 소재를 그렸으며, ‘우주’가 2019년 132억 원에 낙찰되어 한국 미술품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화가이다. 박서보 화백은 K-아트의 선두주자로서 대한민국 1세대 단색화 거장이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림에서 비우는 그림으로 거장이 된다. 김창열 화백은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으로서 오랜 시간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50년 동안 물방울만 그린 화가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물방울 화가’로 불리는 김창열 화백의 삶을 그린 영화이며, 둘째 아들 김오안 감독의 시선으로 아버지이자 예술가인 김창열 화백을 바라보는 영화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50년간 물방울만을 그리는 김창열 화백의 세 가지 얼굴을 드러낸다.

 

2. 물방울과 무위의 길을 걷는 현자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전반부는 물방울을 통해 ‘무위의 길을 걷는 현자’를 보여준다. 예술가 김창열 화백은 언제나 정중하고 조심스럽고 고독하고 무위를 행하며 평온 속에 사는 현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법을 믿는 아이의 진지함으로 산타클로스보다는 기묘한 스핑크스를 닮아 있으며, 구도를 위해 눈꺼풀을 자른 달마대사와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고 팔을 자른 선불교의 폭력성에 매료되어 있다. 아버지 김창열 화백은 관계에서 어떤 빈틈, 균열을 보여주며, 1971년 이후 50년간 물방울만을 그렸으며, 구도, 계획, 인내, 야망, 광기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관계에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물의 형상, 묵직한 사운드, 실루엣, 클로즈업을 통해 현자로서 김창열 화백이 걷는 구도의 길을 표현한다. 검은 화면에 흰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영상은 묵직한 사운드와 함께 어느새 연기가 아니라 흐르는 물로 변화하면서 물의 다양한 형상을 드러낸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검은 화면 속 드러나는 인물의 실루엣, 물감이 묻은 김창열 화백 손의 클로즈업은 고독한 예술가를 표현한다.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그림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줌으로써 물방울의 살아있는 의미를 표현한다. 물의 이미지는 폭포에서 흐르는 물, 신문에 그려진 물, 연못 물 속의 연꽃 등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를 드러낸다.
 

 

3. 물방울과 죽음의 기억을 지우는 눈물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중반부는 물방울을 통해 ‘죽음의 기억을 지우는 눈물’을 보여준다. 아버지 김창열 화백은 격문을 쓴 사실로 체포되고 감금되고 죽음의 위기에서 도망친 과거를 보여준다. 예술가 김창열 화백은 짐승처럼 울부짖는 견고하고 위로할 수 없는 낯선 것을 드러내며, 6·25 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남은 죄책감으로 고통 받으며, 비정형 예술로 탱크에 짓밟힌 사람들의 흔적, 공포, 비명을 그려낸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처녀의 샘>에서 부모는 강도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된 딸의 복수를 마치고 신에게 평화를 간청하고, 딸의 시체를 들어 올리자 거기에서 샘물이 흐르고 그 물로 딸의 얼굴을 닦아 정화시키며 평온을 되찾는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처녀의 샘>을 인용하면서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모든 기억을 물로 지우는 것,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검은 화면, 익스트림롱숏, 편집을 통해 고통스러운 과거, 감춰진 감상주의자, 물의 원천을 표현한다. 장구와 판소리 <심청가>, 물을 건너는 사람들의 흑백화면, 그림 앞에 망연히 앉아 있는 김창열 화백, 시체 속에서 가족을 찾는 소복 입은 여인을 결합한 편집은 과거 피난의 길, 죽음의 길을 형상화한다. 검은 화면, 흰 달의 익스트림롱숏, 검은 모자를 쓰고 걷는 김창열 화백을 연결시키는 편집은 과거의 체포, 감금, 추방의 삶을 형상화한다. 뉴욕에서 그린 추상미술을 계속해서 연결시켜 보여주는 편집은 김창열 화백의 작품세계를 마치 살아 움직이는 그림처럼 표현해낸다. 물방울을 통해 눈물을 그리는 ‘감춰진 감상주의자’라고 말하는 아들의 내레이션, 명작 그림들의 눈물을 클로즈업한 편집, 김창열 화백 그림의 물방울에 대한 익스트림클로즈업을 결합시키는 편집은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그림이 ‘눈물’로 보이는 마술적 순간으로 추상적인 슬픔을 경험하게 만든다. ‘전쟁의 외상을 평생 안고 모든 흐르는 피를 순수한 물의 원천으로 변형하기까지 평생 일했다’는 김창열 화백의 옆모습을 익스트림클로즈업으로 보여주고, 물 흐르는 소리를 먼저 들려준 후 그 다음에 <처녀의 샘>에서 물로 딸의 얼굴을 닦는 평온한 부모의 얼굴을 보여주는 편집 방식은 죽음의 피를 순수한 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김창열 화백의 예술혼을 드러낸다.
 

 

4. 호랑이의 꼬리를 잡은 남자와 물방울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후반부는 물방울을 통해 ‘호랑이의 꼬리를 잡은 남자’를 보여준다. 예술가 김창열 화백은 많은 물방울들에서 빛이 나는 그림을 발견하는 무척 놀라운 현상을 경험했고, 걸레만도 못한 작품이라며 세상·타인과 조우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남자이며, 할아버지의 서예에서 시작된 병적인 창조력으로 생명 탄생의 비밀인 물방울을 그린다. 아버지 김창열 화백은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지만 언제나 거리가 있다. 김창열 화백은 놓으면 집어삼킬 수도 있는 호랑이의 꼬리를 잡고 끝까지 따라가며 진지하게 살았고, 50년 동안 물방울을 그리며 살아남은 인생에 대한 죄책감을 그림으로 승화시켰지만, 그런 자신의 삶을 ‘부질없이 복잡한 나의 삶’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오버랩, 미장센, 여백, 검은 화면으로 고독한 예술가를 표현한다. 출렁거리는 푸른 물과 김창열 화백의 어두운 실루엣의 오버랩은 동일한 물이 김창열의 모습으로 검은 색 물과 푸른 색 물로 보이게 만든다. 화면의 오른쪽에 위치한 김창열 화백의 클로즈업, 중간에 손뼉 치는 손주들, 왼쪽에 놓인 케이크로 표현되는 미장센은 가족들 사이에서도 혼자 침묵하며 거리감을 보이는 김창열 화백의 모습을 표현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의 구름, 검은 화면, ‘김창열 1929-2021’ 자막은 “바로 이것이 부질없이 복잡한 나의 삶이다”라고 말하는 김창열 화백의 목소리와 결합되면서 고독한 예술가를 형상화한다.
 

 

5. 삶의 끝까지 침묵하는 예술가와 물방울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물방울로 삶의 끝까지 침묵하는 예술가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아버지 김창열 화백의 추상적인 눈물과 아들 김오안 감독의 예술적인 영상을 함께 담아내며, 아버지이자 예술가인 김창열 화백에 대한 아들이자 예술가인 김오안 감독의 두 가지 시선을 담아낸다. 예술가 김창열 화백은 세 가지 얼굴, 즉 ‘무위의 길을 걷는 현자’, ‘죽음의 기억을 지우는 눈물’, ‘호랑이의 꼬리를 잡은 남자’를 드러낸다. 첫 장면은 ‘순진한 자에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배움을 정진하는 자에게 산은 더는 산이 아니고 물도 더는 물이 아니다. 경지에 이른 자에게 산은 다시 산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된다.’(불교 속담)에서 시작한다. 이 영화는 김창열 화백에 담긴 물의 이미지를 무위, 승화, 지혜로 담아낸다. 아버지 김창열 화백의 빈틈, 균열, 거리감은 예술가 김창열 화백의 집념, 야망, 광기의 다른 이름이다. 아들 김오안 감독은 ‘아버지 김창열 화백이 자신에게 전달한 것 중에서 꼭 하나만을 간직해야 한다면 그건 지혜도, 끈기도, 자유도, 솔직함도 아니라 아마 침묵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침묵은 지식의 원리이자 내용으로서 모든 것을 드러내며,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어디든 끝에 도달할 때마다, 삶의 끝에서도 마지막에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물의 이미지, 아버지의 이미지, 아들의 내레이션으로 ‘물방울 화가’ 김창열의 작품 세계, 구도하는 진지한 예술가를 형상화한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검은 화면 속 흩날리는 흰 연기가 흐르는 물로 변하는 이미지는 모든 것을 드러내는 ‘침묵’처럼 물의 오묘한 성질을 드러낸다. 사진작가 출신의 감독이 만든 영상은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가 사진 작품처럼 강렬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영화 내내 아버지 김창열 화백의 이미지(영상)와 아들 김오안 감독의 내레이션(사운드)을 결합시키는 것은 예술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예술가 아들의 시선을 보여주며, 아버지에 대한 이해, 예술가에 대한 이해,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 등 김창열 화백의 삶을 여러 가지 각도로 조명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형상화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물로 김창열 화백의 작품세계를 표현하며, 김창열 화백의 클로즈업 혹은 익스트림클로즈업은 구도하는 진지한 예술가를 형상화한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처음에 내뱉는 김창열 화백의 말,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끝까지 여운을 남긴다.

 

*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글·서곡숙
문화평론가, 영화학박사. 현재 청주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사무총장, 한국영화교육학회 부회장, 한국영화학회 대외협력상임이사, 계간지 『크리티크 M』 편집위원장,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종상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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