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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국의 문화톡톡] 목로주점-재즈 그리고 침묵의 봄
[최양국의 문화톡톡] 목로주점-재즈 그리고 침묵의 봄
  • 최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3.04.0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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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처럼 섬세한 리델 글라스에...루비를 녹인 듯한 액체가 흘러 들어간다. 글라스를 테이블 위에서 가볍게 돌려 공기와 만나게 하면, 향긋하게 일어나는 화려한 향이 비강을 간질인다. 순간 호화로운 꽃다발을 건네 받은 듯한 감각.”

- 신의 물방울1(2005년, 학산문화사), Tadashi Agi/Shu Okimoto -

소음 가득 마음에도 꽃이 핀다. 겨울바람이 잦아들면 어머니 손 편지 같은 홍매화가 피어난다. 붉은색의 꽃이 겹으로 피어, 그 겹겹이 쌓여 있는 틈새는 향기가 된다. 소소리바람을 타고 귀로 전달되는 소리의 향기다. 소리가 멀어져간다. 손 주름 범벅의 투박한 꿈이 산수유의 그림자로 길어지며 아련한 한 폭의 그림으로 되살아난다. 그림자 흔들림을 안고 마음으로 전달되는 질감의 기억이다. 질감 속 무게감이 가벼워져 가며 목련의 긴 사연은 하늘과 땅에서 장단을 치며 베를 짠다. 짜인 베가 곱게 놓이며, 휘모리와 진양조의 농현으로 떨리는 아련한 입맞춤의 맛을 남긴다. 붉음에서 시작한 우리의 봄은 목련의 영혼 같은 하얀 벚꽃이 나비 되어 찾아오며 그 마음의 색으로 일렁인다. 바람비와 함께 붉고 하얀 봄의 흔적이 물방울 되어 흩어진다. 향기, 질감, 맛 그리고 색으로 어우러진 물방울을 우산 삼아 와인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꽃으로 피어난 와인을 만난다.

 

디캔팅(Decanting) / 레드 와인 / <목로주점> / 해피 엔딩

와인은 포도가 재배되는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살아 있는 유기체다. 와인은 제조된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향기, 질감, 맛 그리고 색이 변화하며 진화한다. 와인은 색에 따라 레드 와인(Red wine), 로제 와인(Rose wine), 화이트 와인(White wine)으로 나뉜다.

 

* 레드 와인과 포도잎, Pixabay
* 레드 와인과 포도잎, Pixabay

이 중 레드와인은 붉은색 계열 포도로 제조되는 와인으로, 프랑스어로 ‘뱅 루즈(Vin Rouge)’라고 한다. 주조과정은 적포도 수확→줄기 제거 및 으깨기→1차 발효→압착→2차 발효→거르기→숙성→거르기→병입 과정으로 요약된다. 수확한 포도를 으깨어 압착해 얻어진 포도즙을 발효시키는 화이트 와인과 달리, 수확한 적포도를 으깬 후에 바로 압착하지 않고 커다란 통에 넣고 우선 발효하는 과정을 먼저 거친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수확된 적포도의 껍질과 씨를 걸러내지 않아, 껍질과 씨에 포함된 타닌(tannin)이 레드 와인 특유의 떫은맛과 신맛, 숙성도, 질감 및 알코올 도수를 결정하는 주요 역할을 하게 한다. 또한 타닌 외에 껍질의 안토시아닌(anthocyanin)으로 인해 그 색은 동백꽃과 홍매화를 연상시키며, 빛과 어우러짐을 통해 검붉은색에서 주황색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레드와인은​ 타닌의 항산화 작용으로 인해 상온에서 보관하고 상온(14~18℃) 상태 그대로 마시는 와인으로써, 보통 10℃ 이하로 마실 경우는 매우 거친 질감과 떫은맛을 내게 된다. 그 향은 발효와 숙성의 과정, 품종, 생산지와 빈티지(vintage, 포도 수확 시기) 등에 따라 적포도의 이웃인 체리나 딸기의 향으로 변해온다.

4월의 햇살은 제각각이다. 그 한 조각의 햇살을 받으며, 파리의 선술집에서 에밀 졸라(Émile Zola, 1840년~1902년)의 소설 <목로주점>(L'Assommoir, 1877년)을 읽는다.

 

* 목로주점(L'Assommoir, 1877년)/에밀 졸라(Émile Zola), Google
* 목로주점(L'Assommoir, 1877년)/에밀 졸라(Émile Zola)

가난하고 소외된 도시 하층민인 여주인공 제르베즈. 지겨운 가난과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꿋꿋하게 삶의 터전과 가정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착하고 나약한 성격으로 인한 한계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녀의 소설 속 삶은 돌아오지 않고 있는 남편을 기다리는 새벽 두 시에 시작된다. 이후 다양한 하층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22세를 전후로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삶을 살아간다. 그녀의 선한 의지를 비웃는 듯한 세상 속에서 결국은 운명적으로 정해진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비어 있던 계단 밑 창고에서 홀로 쓸쓸히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장의사 일을 하는 바주즈 영감은 죽은 그녀를 싸구려 관에 누이며 말한다. “누구나 다 가는 거야. 모든 사람의 자리는 다 마련되어 있는 거지. 서두를 필요는 없어. 잘 자라고, 예쁜 아가씨야.” 이 소설은 세탁부인 주인공 제르베즈와 그녀 주변 인물들의 비열하고 추악한 삶을, 작가의 감정 개입 없이 담담하게 그려낸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일부 동화적 서사 구조와 더불어 참을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환경에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19세기 독점적 자본주의의 어두운 현실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의 폐해를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꿈과 희망을 잃고 도구화되고 매몰되어 가는 도시 하층민의 모습을 ‘술(와인)’을 매개로 하여 부각한다.

19세기 <목로주점>은 선한 도시 하층민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비극적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게 하는 상징적 매개물로 그려진다. 지금의 <목로주점>은 포도의 껍질과 씨를 거르지 않고 거듭되는 발효를 통해 숙성을 기다리는 병에 갇힌 레드 와인과 닮은 꼴이다. 이제 우리 모두 해돋이를 들숨의 질감으로 느끼며, 디캔팅(decanting, 와인병을 따서 다른 용기에 옮겨 담는 것)한 한 잔의 레드 와인을 음악과 어우러지며, 행복 회로를 충전하듯 마시면 어떤지. 산소와 같은 선한 의지를 호흡으로 맡고, 마음의 악한 침전물을 제거하여 부드럽고 풍부한 삶의 맛을 나누어야 할 때는 아닐까?

 

청포도 / 화이트 와인 / 재즈(Jazz)와는 / 닮은 세계

 화이트 와인은 주로 청포도 계열 포도로 제조되는 와인으로, 프랑스어로 ‘뱅 블랑(Vin Blanc)’이라고 한다.

 

* 화이트 와인과 청포도, Google
* 화이트 와인과 청포도

주조과정은 청포도 수확→줄기 제거 및 으깨기→압착 및 정제→발효→거르기→숙성→거르기→병입 과정으로 요약된다. 레드 와인과 달리 침용(maceration, 포도를 으깨어 발효시키는 것)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일정 시간의 압착 및 정제 과정을 거쳐 얻어 낸 포도즙의 상단에 형성된, 더 맑은 형태의 주스를 담아내어 발효시킨다. 레드 와인이 포도 껍질과 알맹이의 상호 작용 및 발효에 의해 알코올 성분을 얻는 것과 달리, 화이트 와인은 포도즙에 효모 첨가 및 발효 과정을 통해 고유의 알코올 도수를 갖게 된다. 껍질에 있는 색소의 추출이 적고 껍질과 씨에 포함된 타닌이 레드 와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 떫은맛보다는 순하고 상큼하며 신선한 맛이 난다. 화이트 와인의 색은 연한 산수유꽃과 하얀 벚꽃으로 그림자를 늘려가며, 노랑에서 하양으로의 스펙트럼 향연을 펼친다. 레드 와인에 비해서 항산화제 역할을 하는 타닌의 함량이 적기 때문에 장기 보관이나 숙성을 통한 질감 강화시에는 8~13℃ 사이의 적정 온도를 유지하여 보관하되, 와인의 숙성 속도는 보관 온도와 역의 상관성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 향은 발효와 숙성의 과정, 품종, 생산지와 빈티지(vintage, 포도 수확 시기) 등에 따라 청포도의 사촌인 레몬이나 파인애플의 향으로 더욱 친근하다.

목로주점에서 채워지는 와인 잔을 따라 재즈가 흐른다. 와인은 음악, 그중에서 재즈와 닮은 점이 많다.

 

* 와인과 재즈, Google
* 와인과 재즈

첫째, 즉흥성이다. 포도 재배와 와인의 주조 과정은 어떤 정해진 매뉴얼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토지와 자연환경(일조량, 강수 및 강우량, 바람 세기 및 온도 차이 등)에 따라 그 상황에 맞는 적정한 탄력적 대응력이 필요하다. 이는 재즈의 가장 중요한 특성중 하나인 즉흥연주(improvization)와 맞닿는다. 이는 연주를 하는 동안 연주자들이 즉흥적으로 교감하고 소통하며, 각자의 점으로 흩어져 있는 리듬을 하나의 선으로 통합해 가는 과정인 스윙(swing)과도 연결된다. 결국 재즈의 흥은 연주자와 청자가 유무형의 무대에서 주고받으며 어우러질 수 있는 즉흥에 있는 것이다. 둘째, 정체성이다. 와인을 주조하는 모든 와이너리는 각자의 호흡과 감성이 버무려진 그들만의 방식으로 주조한다. 연주자들은 재즈 음악 연주시 프레이즈(phrase, 악절)별로 가진 고유한 특성을 주입한다. 이러한 프레이즈와 프레이즈의 연주는 연결을 통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마치 하나의 프레이즈를 연주하는 것과 같이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의미와 내용을 가지며 그들의 음악색과 향기를 드러낸다. 셋째, 정반합이다. 와인은 각자의 향기, 질감, 맛 그리고 색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후 숙성과 디캔팅 및 온도 등에 따라 새로운 와인으로 재탄생한다. 재즈를 연주할 때 가장 핵심적으로 소리를 결정하는 요소는 이완과 긴장의 균형을 위한 건강한 긴장감(tension)이다. 재즈의 악보는 그 음악에서 표현해야 하는 것을 모두 담고 있는 것이 아닌, 자유도 높은 음악적 표현을 위해 최적화된 약속을 상징적 기호 체계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불가피하게 악보와 연주자 사이에 공백을 제공하게 된다. 공백을 채워가는 변화의 양과 질에 따라, 동일한 악보에서 또 다른 음악이 연주되는 정반합의 재즈 음악적 특성으로 나타난다.

클래식 음악은 이미 정해진 규범으로서의 악보를 통해, 원곡자의 의도를 알아내고 해석하여 연주하는 것이 연주자의 주된 목표가 되어, 연주자의 자유도는 재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이와 달리 재즈는 순수한 영혼의 울림을 통한, 자유로운 즉흥과 정반합을 위한 위반과 묘합의 흐름으로 이루어진다. 포도의 껍질과 씨의 유무보다는, 으깨고 압착하여 형성된 상단의 맑은 포도주를 발효하여, 순하고 상큼하며 신선한 맛을 내는 화이트 와인의 성격은 재즈와 닮아 있다. 이제 우리 모두 해넘이를 날숨의 질감으로 느끼며, 디캔팅한 화이트 와인 잔을 들고 재즈와 어우러지며, 그 변주의 꿈을 좇듯 마시면 어떤지. 자꾸만 닫혀 가는 세상이 아닌, 우리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건강한 즉흥성이 넘쳐나는 자유도 높은 세상을 위한 향기와 맛이 넘쳐나야 할 때는 아닐까?

 

물방울 / 와인의 DNA / 침묵의 봄 / 흔적 남기기

 목로주점에서 와인을 마시며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ewey Davis III, 1926년~1991년)의 <Kind of Blue-So What>(1959년)을 듣는다. 그는 연주를 통해 “진정한 음악은 침묵이며, 모든 음표는 이 침묵을 받치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침묵으로 향해 가는 길에 한용운(1879년~1944년)의 시<님의 침묵-포도주>(1926년)를 만난다.

“~(전략)~마치 맞게 익은 향기로운 포도를 따서 술을 빚었습니다. ~(중략)~. 님이여 그 술은 한 밤을 지나면 눈물이 됩니다. 아아 한 밤을 지나면 포도주가 눈물이 되지마는, 또 한 밤을 지나면 나의 눈물이 다른 포도주가 됩니다 오오 임이여.”

- <님의 침묵-포도주>(1926년), 한용운 -

이 시에 대해 소래섭은 <임에게 포도주를 바치다>(신동아, 2014년 2월호)에서 “만해의 임에 대해서는 네 가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첫째는 빼앗긴 조국이나 민족의 정기 등으로 보는 민족적 견해다. 둘째는 중생, 불교적 진리, 무아(無我) 등으로 보는 불교적 견해가 있다. 셋째는 민족적 견해와 불교적 견해 등을 절충한 견해이고, 마지막으로는 생명적 근원, 사랑과 희망과 이상의 상징 등으로 보는 작품 중심적 견해가 있다. 어떻게 보든 만해에게 임은 인간 이상의 성스러운 대상이다.~(중략)~.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포도주는 바쿠스 등의 신과 연관되고, 이슬람교에서 포도주는 낙원에 살도록 선택된 자들만이 마시는 술이다. ‘포도주’에서 화자가 임에게 바치는 것은 포도주이자 눈물이다. 임을 기다리는 간곡한 심정에서 흘리는 눈물, 그것은 곧 생명의 정수인 피와 다를 것이 없다. 부드러운 여성적 어조 안에 감춰져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신성한 대상에 대한 지극한 경배와 피를 토할 만큼의 간절한 그리움이다. 그러니 포도주를 선택한 것은 만해의 천재적인 시적 감성의 발로다.”라고 한다.

지구 온난화 영향일까? 조금은 빨라진 봄꽃 나들이 속에서, 봄눈 되어 흩날리는 침묵의 꽃을 안타까이 찾아 나서는 벌들의 비행 소리를 듣는다. 침묵과 소리가 부딪치며 자연의 질서를 향한 봄의 게임으로 어우러진다. 꽃과 벌은 바람과 흙을 향한 무분별한 일방향의 게임을 하지 않고,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양방향의 게임을 한다. 자연의 질서에서 벗어난 세상은 소음을 향한 일방향의 치킨게임(chicken game)을 하며 끝 모를 길을 간다. 치킨게임 중 모두가 피해를 보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우리가 절대 잃지 말아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는 이타적 ‘돈’보다는 이기적 ‘흔적’을 남길 수 있는 향기, 질감, 맛 그리고 색의 DNA를 품은 와인 주조 게임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흔들리는 목로주점에서 재즈를 듣는다. 붉고 하얀 물방울로 침묵의 봄을 그리며, ‘임’을 기다린다.

 

 

글·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전통과 예술 바탕하에 점-선-면과 과거-현재-미래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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