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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경의 문화톡톡] 클리셰 없이, 악인 없이, 재미는 있게 - <퀸스 갬빗>
[구선경의 문화톡톡] 클리셰 없이, 악인 없이, 재미는 있게 - <퀸스 갬빗>
  • 구선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3.04.17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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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놓치고 지나가는 작품들이 있다. 첫 회를 놓쳐서 이미 중반을 달리고 있거나 혹은 이미 종영까지 해버린 후에 뒤늦게 재밌다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지나간 잡지 같아서 다시 손이 안 가곤 한다. 게다가 이미 클립으로 중요 장면을 다 봐버렸다든가, 유행하는 대사까지 알아버린 후에는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멋지다 박연진’ 같은 대사를 수없이 들어버렸다거나, 최치열 남행선의 침대 키스를 알아버렸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퀸스 갬빗도 그러했다. 아주 열광적이지는 않아도 해외드라마치고 꽤 입소문이 들려왔지만 어쩌다 놓치고 지나갔고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뒤늦게 보게 됐다. 그리고 개인적인 기준에서 최근 본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등극했다.

 

드라마는 주인공 베스의 현재 시점을 잠깐 보여준 후 빠르게 베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1화 스토리의 처음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 교통사고 장면에서 시작한다. 경찰과 사람들이 몰려와 있는 교통사고 현장, 자동차 옆에는 엄마로 추정되는 시신이 반쯤 천에 가려진 채 뉘어져 있고 어린 베스는 불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얼어붙은 채 그 옆에 서 있다. 그리고 베스는 곧 보육원으로 인도된다. 모노톤의 화면, 즐비한 흰 침대, 온기라곤 없어 보이는 보육원의 풍경들, 개인 공간도 없이, 온기도 없이, 딱딱한 의자에 앉아 먹는 맛 없어 보이는 식사. 게다가 보육원에서는 매일 아이들에게 알약을 먹인다.

이쯤 되면 내 안에서 클리셰가 작동한다. 아 저 약은 아이들을 망치겠구나. 통제하고 다루기 위한 약이겠지. 더 나쁜 일들을 상상한다. 저 약을 먹이고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닐까. 또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호되게 혼나는 건 아닐까. 어딘가로 끌려가 폭행당한다든가, 다른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든가.

베스는 수업 중에 칠판지우개를 털러 지하 관리실로 내려갔다가 관리인 아저씨인 샤이벌이 체스를 두는 것을 보고 이에 매료된다. 자꾸 핑계를 대고 지하실로 내려가 결국 체스를 배운다. 또 불안해진다. 저렇게 자꾸 지하실로 내려갔다가는 틀림없이 원장 선생님한테 혼나고 말 텐데. 관리인 아저씨도 해고당해 그나마 있던 친구마저 잃는 건 아닐까. 입양을 원하는 부부가 와서 베스를 만나는 자리, 양부가 심중을 알 수 없는 모호한 눈빛으로 안경 너머로 베스를 훑어보는 순간, 더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또 불안했다. 그러다 그 양부마저 집을 떠나고 홀로 남겨진 양모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피아노나 치고 있을 뿐, 뭘 혼자 해내거나 감당해낼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과연 베스는 괜찮을까. 베스가 체스를 잘 두고 그게 돈이 된다는 걸 안 순간 이제 이용하려는 게 아닐까, 큰 빚이라도 지고 베스에게 떠넘기는 건 아닐까. 그동안 드라마를 보면서 익혀온 클리셰들이 나를 계속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1, 2회를 보고 나서 알게 됐다. 아 이 드라마는 그런 클리셰들을 가지고 있지 않구나. 내 불안한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구나. 그래서 좋았다. 뻔한 클리셰들은 지겨우니까. 그리고 동시에 궁금해졌다. 이렇게까지 클리셰를 비껴가는데 왜 재미있지? 클리셰는 뻔해서 지겹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고 가는 데 유용해서 자주 쓰였고 그래서 클리셰가 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클리셰를 비껴간다면 재밌게 만들기 쉽지 않을 텐데. 3회가 지나가면서 더 궁금해졌다. 게다가 여긴 악인이 없다. 눈에 보이는 적대자도 없다. 고아에, 양부모에, 아직 남성 위주의 세상이었던 60년대 미국이 배경인데, 이렇게나 악인과 적대자를 만들기 좋은 이야기 구조에서 그런 걸 만들지 않고 이렇게 재미있다니. 그래서 곰곰 생각하면서 봤다. 그런데 왜 재미있을까. 

 

물론 이 드라마는 ‘체스’라는, ‘승패가 있는 게임’을 주 소재로 하고 있다. 이기고 지는 승패가 확실한 스포츠나 게임은 결과의 궁금증 때문에 극적인 장면을 만들기에 일단 유리하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런 문법을 확실하게 써먹지도 않는다. 승부가 궁금하여지려면 아슬아슬하게 이기거나 또는 지거나, 두 판 이기면 한 번 지거나, 그래야 궁금해하며 볼 텐데 여기서는 계속 이긴다. 4회에 가서 러시아의 거물 보르고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 후 또 거의 계속, 하는 게임마다 척 척, 힘들게도 아니고 너끈하게 이겨 먹는다. 게다가 우리가 그 승부의 과정을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체스가 우리의 장기와 비슷해 판 위에서 말을 움직이다가 킹을 잡으면 이긴다는 정도의 이해는 있지만 그 과정을 상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니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심각하게 대화로 의견을 나누는 각종 전략 전술이 뭘 의미하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온전히 누군가가 베스가 승, 이라거나 상대가 기권, 이라고 말해줘야 승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직관적으로 승부를 이해하거나 과정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재미있다. 왜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베스는 더 큰 적대자와 싸우고 있다는 걸, 우리가 시종일관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자기 내면의 불안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계속 궁금했다. 베스가 계속 이길 수 있을지,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계속 궁금했던 건 계속 답을 안 줘서다. 판판이 이기고 있는데 왜 안심이 안 됐지? 거의 계속 이기는 장면만 반복되는데. 

베스는 행복한 표정을 한 적이 없다. 괴롭거나 우울하거나 절망했다고 징징거린 순간도 없지만 행복하다고 편안하다고 즐겁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계속 약을 먹고 있었고 그 힘으로 천정의 체스판을 노려보며 수를 계산했고 그러는 동안 계속 지독히도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나 똑똑해 보이지만, 언제 무너질지 몰라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그 표정.

그때 우리가 본 건 베스 내면의 불안이다. 자기를 데리고 죽으려고 했던 엄마, 그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베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거나 인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학위를 가진 똑똑한 여자였던 엄마처럼 베스도 수학을 잘하는 천재적인 아이였으나 안정감 없는 영민함은 더 예민한 불안을 초래한다. 체스는 베스가 자기 인생에서 길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본인이 원했건 아니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베스가 일생을 걸고 싸워온 적대자는 내면의 불안이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남달랐다. 불우한 처지의 주인공을 괴롭히는 확실한 악역이라든지, 경기 과정에서 흔히 나올 수 있는 상대 선수의 음해라든가, 유명인이 된 후에 겪을 수 있는 여론몰이라든지, 이런 외부적인 장애는 만들기도 쉽고 시청자가 더 이해하기에도 명료하다. <퀸스 갬빗>은 그런 문법을 따라가지 않았고 그래서 다른 스타일을 얻었다. 베스의 불안을 말했지만, 우리 역시 인생은 불안하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어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불안한 게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공감 때문에 턱을 고이고 앉은 베스의 커다란 눈망울에 깊이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회에 드라마는 우리를 꽤 위로하고 끝난다. 내내 외로워만 보였던 베스지만 위기의 순간에 보육원 친구 졸린이 찾아와 늘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베스가 승부 내내 만났던 체스 동지들은 중요한 시합의 순간에 모두 모여 함께 수를 의논하면서 베스에게 힘이 되어준다. 샤이벌 아저씨의 부고를 듣고 보육원에 다시 찾아갔을 때, 지하실 아저씨 자리에는 그동안 베스가 나왔던 기사들을 모두 스크랩해서 붙여져 있었다. 그걸 보고 베스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오열한다. 이제 비로소, 어린 날 엄마가 차를 몰고 돌진하던 그 순간의 트라우마가 치유됐었으리라.

베스는 러시아에서의 체스 경기에 승리한 후 이를 체제 선전에 이용하고자 하는 정부 측의 회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정부 관리와 타고 가던 차에서 내려 홀가분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공원에서 체스를 두는 할아버지들 무리를 찾아가고 사심 없는 그들의 환대에 환하게 웃는다. 체스를 두겠냐는 한 할아버지의 제안에 마주 앉아 턱을 고이는 순간, 베스의 표정은 마치 ‘인생에 중요한 건 이런 거야’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보는 내내 흥미로웠고 여러모로 여운이 남는 드라마, <퀸스 갬빗>이다.

 

 

사진 출처-IMDb

 

 

글·구선경
드라마작가. 작가협회 교육원과 대학에서 드라마와 스토리텔링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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