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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문화톡톡] 의병의 말 그리고 의병의 날
[김정희의 문화톡톡] 의병의 말 그리고 의병의 날
  • 김정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3.05.15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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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누가 지켜야 하는가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공부하라는 부모님이 있냐고. 학생들은 책상을 치며 쓰러질 듯이 웃었다.

6월 1일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인 의병의 날이다. 이 날은 홍의 장군 곽재우가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날(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이다.

외침이 잦았던 우리나라에서 의병은 시대마다 등장했다. 임진년의 의병부터 한말의병까지 그리고 광복이 되기 전 1940년 충칭에서 조직된 광복군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까지 포함하여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친 이들은 늘 존재했다. 그나마 관군과 함께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임진년의 의병들에 비해서, 한말의 의병들은 오롯이 그들만의 힘으로 일본과 싸워야 했다. 한말 의병투쟁을 하다가 희생된 이들은 많게는 20만 명까지, 일본 자료를 근거로 5,6만 명의 의병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관동의병대장기 강원대학교 박물관
관동의병대장기 (강원대학교 박물관)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종군기자가 의병을 인터뷰하는 장면의 대사이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의병들이 ‘어차피 죽을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의병들도 ‘어차피 죽을 것’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승산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 수 있는가. 

이 대사는 작가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1907년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기자였던 매켄지가 의병들을 직접 만나 나누었던 내용이다. 매켄지는 이들을 촬영했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사진을 재현한 장면이 등장한다. 이듬해 출간한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매켄지는 일본군들이 의병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몰살했는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이 죽을 것임을 알면서 일본군들과 싸우는 의병들에 대해서 ‘그들이 보여 주고 있는 표현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자기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그들은 폭도다. 묻혀야 할 이름이고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아야 한다. 외신에 단 한 명의 이름도 새어 나가지 않게 해라. 역사에 절대 남아서는 안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중 이토 히로부미의 말이다. 실제로도 일본군은 1907년 우리나라의 군대를 해산시킨 후 이어진 항일의병을 폭도라 규정하여 무자비한 학살을 이어 나갔다. 

남성들만 의병에 나간 것은 아니었다. 윤희순 (1860~1935)은 본인의 이름을 적은 경고장을 직접 써서 배포한 것을 시작으로 의병활동에 평생을 바쳤다. 이 경고장을 직접 보면 화려한 문장도, 유려한 글씨체도 아니지만 “남의 나라를 침범한” “짐승 같은 왜놈 원수”에 대해 공감을 하게 되고, “조선 안사람이 대표로 경고한다. 조선 선비 아내 윤희순”이라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그 용기와 결연한 의지에 감탄과 존경심이 절로 든다. 보란 듯이 본인의 이름을 쓴 경고장이라니.

“좋은 말로 달랠 때에 너희 나라로 가서 너희 부모와 가족을 데리고 살아가며 너희 나라를 잘 보살펴 살도록 하여라”

윤희순은 이외에도 <안사람 의병가> <의병군가> <병정가>등 의병가사를 만들었다. 정미의병 당시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 무기와 화약 제조뿐만 아니라 직접 군사훈련에 참여하였다. 경술국치를 당해 춘천 의병장이었던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 의병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고려구’란 마을을 일구었고, 53세 때인 1912년 중국 환인현에 ‘노학당’을 세워 항일인재 양성에 힘썼다. 2002년 후손들이 중국 요녕성 환인현 노학당 터에 노학당유지비를 건립하였다.  

“충효정신은 잊어서는 안된다. 윤씨 할머니가 자손들에게 보내는 말이니라. 소망 충효 애국정신 자손만대보존”

 

윤희순이 쓴 경고장 (강원대학교 박물관)

“그대는 나아가시오. 나는 한 걸음 물러나니”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이다. 

주인공이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이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녀는 평양에 도착했을 것이고, 평양에서 만주로, 상해로 광복군으로 항일투쟁을 이어갔을 것이다. 어쩌면 미국으로 가서 대한여자애국단에 들어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을 수도 있다. 

“꼭 대한의 권리라야 나의 권리가 되며 대한의 자유라야 나의 자유가 되며 대한의 행복이라야 나의 행복이 되나니.”
- 100년 전 대한여자애국단 한성신의 말 (신한민보 1920년 9월 23일)

“우리는 어떤 처지로 어떤 곳에 있던지 꼭 대한 여자들이로소이다.(중략) 꼭 대한의 권리라야 나의 권리가 되며 대한의 자유라야 나의 자유가 되며 대한의 행복이라야 나의 행복이 되나니 (중략) 이를 벌써 깨달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오라비, 누이, 동생들은 대한의 권리, 자유, 온갖 행복을 위해 피를 흘렸으며 죽지 아니 하였습니까? 그런데 만일 해외에 있는 대한 여자로 자라난 우리도 그 책임과 의무를 잊어버리고 일시 혼자 잘 먹고 평안히 있는다면 무엇이 그리 기쁘며 무엇이 그리 만족하오리까?”
- (김동우, 뭉우리돌의 바다, 수오서재, 2021 재인용)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100년 전 이 땅에 살고 있었다면 광복이 되기까지 이십 여년의 시간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 시간을 알 수 있으나 1923년을 살고 있었을 사람들에게 내일은 어떤 의미였을까?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은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도산 안창호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대한민족 전체가 독립을 믿으니 대한은 독립이 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은 독립이 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오.” 라고 말했다.

도산은 옥고를 치르고 병을 얻어 1938년에 숨을 거두었다. 

 

서울에서 의병을 기억할 수 있는 곳 -왕산로

허위(1855~1908) 의병장의 호를 딴 왕산로는 동대문구 신설동역 교차로에서 동대문구
시조사 삼거리에 이르는 3.17km길이의 도로이다. 왕산 허위는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1905년 <배일 격문>을 배포하였고, 1906년 산남의진을 결성하고 1907년 군대해산으로 의병전쟁이 확대되자 연천, 적성 일대에서 의병봉기 하였다. 1908년 1월 초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여 허위가 이끄는 약 300명의 선봉대가 동대문 밖 약 30리 지점(현 망우리공원)까지 진격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서울 진공작전이 실패한 후 경기 북부에서 의병 전쟁을 수행하다가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평리원 재판에서 한국인 판사와 검사에게

“나는 일본인에게 피착 되었으니 본국 관인은 묻지 말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될 때 일본 승려가 불경을 외우려 하자, 

“혹 지옥으로 떨어진대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으랴.”면서 거절하였다. 

시간은 흘러간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도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시간 속에서 연결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 되찾고자 한 이들이 염원했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나아가시오. 나는 한 걸음 물러나니”

 

 

글·김정희(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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