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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진의 문화톡톡] 〈동물농장〉이 응시한 사회주의만?
[엄윤진의 문화톡톡] 〈동물농장〉이 응시한 사회주의만?
  • 엄윤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3.06.12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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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는 알파벳을 전부 배웠지만 묶어서 읽을 줄 몰랐다. 복서는 D자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그는 커다란 발굽으로 흙에다 A B C D를 쓰고는 귀를 뒤로 축 늘어뜨리고 때로는 앞머리를 흔들면서 글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전력을 다해 그다음 것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정말 그는 여러 차례 E F G H를 배웠지만 그 글자들을 읽히면 이제는 A B C D를 잊어버렸다. 마침내 그는 처음 네 글자만으로 만족하기로 작정했고 하루에도 한두 차례 기억을 되살려 그 글자들을 써보곤 했다. 몰리는 자기 이름 여섯 글자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나뭇가지로 말쑥하게 자기 이름을 만들고는 꽃 한두 송이로 그걸 장식한 다음 그 주의를 빙빙 돌며 감탄하고 했다. 그 밖의 다른 동물들은 A자 이상을 배울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양, 암탉, 오리 같은 좀 더 둔한 동물들은 칠계명을 외울 수조차 없음이 밝혀졌다. 스노볼은 한참 생각한 끝에 칠계명을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는 한 마디의 격언으로 훌륭히 요약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 격언에 동물주의의 기본 원칙이 들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동물농장〉, pp. 60-1.

 

사회주의 실험은 정말 실패한 걸까?

 

지적 권위가 있는 유명 인사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 진영의 정치인도 미디어에 나와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난 늘 의아했다. 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조지 오웰의 소설〈동물농장〉의 영향일까? 소위 386 운동권 세대들은 사회주의를 생각할 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Vladimir Ilich Lenin)이 이해해 실험한 사회주의만을 바라봐서 그런 걸까?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말한 사회주의는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낀 노동자들의 각성에서 비롯하는 거였다. 하지만 구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과 북한식의 사회주의는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일어난 일종의 정치적 실험이었다. 그러니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제대로 겪지도 않고 사회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실패한 구소련의 사회주의엔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포함된 독재 정치에 가까웠다고 평가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동물 농장〉을 쓴 조지 오웰은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소련의 정치적 행태를 비판적으로 응시했다. 오웰이 자신의 책에서 그린 것처럼, 구소련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와 그 사회주의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사회주의 진화 과정과 닮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태동한 곳은?

 

19세기에 서유럽의 상당수 국가는 산업혁명을 겪으며 제국주의 광풍에 빨려 들어갔다. 제국의 확장을 위해 많은 수의 공장 노동자와 군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영국을 비롯해 유럽의 주요 나라들은 대중교육 기관인 학교를 설립해 자국민들에게 읽고 쓸 줄 아는 법과 간단한 계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대중 교육을 제공했다. 그러면서 농업 기반 사회에서 도시의 산업 사회로 변모해 갔고, 농사를 짓던 대부분의 사람이 도시의 공장노동자로 삶의 양태가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잉여가치를 독차지하려 했던 공장주와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인해 많은 도시 노동자의 삶은 피폐해졌다. 점진적으로 노동자는 자신의 계급과 자신을 그 계급으로 몰아넣은 적대적 계급을 인식하게 되었다. 자본가와 노동자란 두 계급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자본주의와 노동자, 그리고 참혹함

 

19세기에서 20세기 초중반까지 유럽 자본가들의 행태는 악랄했다. 19세기 중반 영국 리버풀의 노동자 평균 수명이 20대 중반이었을 정도로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이 처참했다. 각종 산재와 열악한 노동환경이 많은 이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유럽 노동자의 임금은 간신히 생계를 이어 나갈 정도였다. 하루에 최소 열두시간을 공장에서 노동해도 손에 쥐어지는 건 목숨을 근근이 이어 나갈 정도의 빵값이 전부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이 정도의 임금에서도 저축해 돈을 모았다.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은 배고픔을 참아가며 모은 노동자들의 이 돈도 빼앗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래서 묘안을 냈다. 자본가 자신이 소유한 공장 인근 해안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놓고 그 해변에 식당과 간단한 여가 시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기차 타고 그 해변으로 가서 여가를 즐기라고 권했다고 한다. 빵값을 아끼며 모은 돈마저 자본가 자기 돈으로 여겨 그 돈을 다시 회수하고 싶었던 거다. 이런 식의 사업이 소위 현대 레저 산업의 시초였다. 노동자들의 권리 침해도 상상을 초월했다. 19세기 중엽 이전에 영국은 9살 이하 어린이 노동을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탄광과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뿐인가? 최소 12시간의 노동을 마치고 퇴근한 이들이 밤늦게까지 술 마시는 것을 막기 위해 공장 도시의 통금시간을 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면 그다음 날 오전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니 이것을 막기 위해 통금시간을 정한 것이다. 노동자를 탄압하는 또 한 부류도 있었다. 소위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었다. 노동자들이 낸 세금으로 월급 받는 경찰은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탐욕에 연대해 저항하면 처음엔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치 세력과 결탁한 자본가가 은밀히 SOS를 정치권에 보내면, 경찰은 경찰봉을 들고 파업하는 노동자들에게 돌진해 폭력을 행사했다. 민중을 지키는 지팡이가 아니라, 그 지팡이로 민중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다. 어디선가 많이 보던 모습 아닌가?

 

그 참혹함에서

 

현대 복지국가로 명성이 있는 스웨덴도 지난 세기 초에는 노동자들이 파업했을 때 경찰이 노동자들에게 총을 쏘기도 했었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있고 난 뒤 노동자들은 두 가지 선택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할지, 아니면 노동자들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지킬 방법을 계속해서 모색해야 할지를 말이다. 기나긴 논쟁과 고민 끝에 자본가들이 골프하거나 와인 마실 때, 노동자 자신들은 책을 읽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을 방법을 함께 숙고해 찾아보자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스스로가 자신들을 폭압으로 대우하는 (공)권력을 쟁취할 방식을 찾으려 했다. 결국 마르크스의 통찰에서 연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대표를 총선에 내보내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다.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대표를 정치권에 진출시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 노동자 대표들이 모여 만든 정당이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 있는 사회민주당이다.

 

사회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

 

‘자유’, ‘평등’, 그리고 ‘연대’를 3대 핵심 가치로 표방하는 사민당이 유럽 전역에 이렇게 등장했다. 특히, 스웨덴은 지난 세기 중엽을 전후로 사민당이 장기 집권하게 되면서 현재 복지제도의 대부분을 도입하게 되었다. 유럽의 사민당이 주도해 만든 복지국가와 이 복지국가의 토대가 된 정치 이념이 바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다. 구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과 북한 방식의 독재적이고 반동적인 사회주의 나라가 아니다. 유럽 사민주의는 ‘자유’를 첫 번째 가치로 중시한다. 유럽 사민주의의 특징은 한 사회 구성원이 가진 자유의 폭이 그 사람의 경제적 지위 즉, 그 사람이 가진 돈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통찰이다. 20세기를 전후로 대부분 노동자도 투표로 정치해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처한 경제적 지위로 인해 교육 수준도 낮았고, 정치에 참여할 여유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정치란 시민들이 낸 세금을 어떻게 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즉, 공동체의 살림에 참여하는 거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사는 처지였기에 정치에 참여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이 낸 세금으로 월급 받는 경찰(civil servants; 공복)이 급기야는 주인인 노동자 자신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겪게 된다. 경제적 여유가 없다 보니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정할 정치에 참여할 기회도 충분히 누릴 수 없었던 거다. 우리 사회에서도 헌법이 보장한 학문, 주거, 예술의 자유는 사실상 ‘이름뿐인’ 자유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으면, 내가 살고 싶은 지역에, 내 자녀를 키우고 싶은 지역에 거주할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이뿐인가? 문학이나 예술에 재능이 있거나, 창조적인 일에서 의미를 얻는 사람도 돈이 없으면 예술의 자유 또한 누릴 수 없다. 학문의 자유는 어떤가? 대학을 졸업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청년이 우리 사회에 상당히 많다. 이들에게 대학원이나 박사 과정을 할 여유가 있을까? 그러니 한 사람이 가진 돈의 크기가 그 사람이 누릴 자유의 폭을 결정한다는 사민주의 통찰은 정확하다.

 

세금을 많이 내지만 불만은

 

사민당이 있는 유럽과 북유럽의 국가들은 세율이 평균적으로 높다. 세율이 임금 노동자 소득의 50%에 가깝다. 법인세도 마찬가지로 높았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휩쓴 최근 한 세대 동안 법인세율이 많이 낮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일반시민이 내는 세율이 미국이나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다. 신자유주의 광풍이 불기 전인 지난 세기 중엽 즉, 복지 제도 대부분이 도입될 당시 스웨덴의 법인 세율은 60%를 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높은 세율을 기업과 시민 모두에게 부과했을까? 공동체를 구성한 시민의 기본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다. 우리는 누구나 단지 생존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산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살고, 또 이런 삶을 살 수 있을 때 인생에 의미를 느끼게 된다. 자기 꿈을 누구나 이룰 수 있기 위해선 시민이 갖는 최소한의 필요가 충족되어야 한다. 이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바로 사민주의의 두 번째 가치인 평등에 바탕을 둔다. 사회에 태어난 누구든 자기 꿈을 실현할 수 있기 위해선 아플 때 돈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하고, 또 돈 걱정 없이 교육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의료와 교육을 모두에게 제공하기 위해선 국가가 세금으로 이 두 가지 서비스를 저렴하게 공동구매 하면 된다. 그래서 이 공동구매를 위해 세율이 높은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높은 세율에도 납세 저항이 거의 없다. 평등이란 가치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있기 때문이다. 평등은 사민주의가 가장 중시하는 자유와 서로 상충하는 가치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민주의의 자유는 소수 강자의 자유가 아니라 다수인 약자의 자유를 가리킨다. 다수 약자가 최소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으려면 평등이란 가치에 다수가 동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를 실현할 ‘경제적 자유’를 소수만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해 살아가는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 평등이란 가치에서 비롯한다. 사회 민주주의의 이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공동체 내에서 실현하기 위해선 사회 구성원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민주의가 중시하는 세 번째 가치가 연대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전 세계의 노동자여, 연대하라!” 그러니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실험을 하다가 독재로 끝난 구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과 북한식의 사회주의 실험이 아니다. 바로 유럽의 사민주의가 마르크스가 예견한 사회주의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지적 권위를 가진 유명인들이 판단한 것처럼,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인식은 적절치 않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시민이 이 비를 맞지 않도록 큰 지붕과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너무나 중대한 오해를 한 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사회주의 국가와 가장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

 

정치학자들이 말한다.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가 둘 있다. 하나는 체 게바라의 나라 쿠바고, 나머지 한 나라는 스웨덴이다. 더 놀랍고 흥미로운 건 스웨덴이다. 왜냐하면 같은 정치학자들이 가장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도 스웨덴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통념과 다르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서로 대립하는 이념이 아니다. 전체 경제에서 정부가 맡을 분야와 민간이 맡을 산업을 적절히 구분하기만 하면 된다. 시민의 삶에 필수적인 부분을 규정하고, 그 정해진 분야를 공공부문으로 지정하면 된다. 예를 들어 의료, 교육(보육), 주거, 연금 등을 시민의 삶을 위한 필수 영역이라고 합의하면 이쪽은 공공분야로 남기고 나머지 산업이나 경제 영역을 민간 분야로 두면 된다. 사회를 구성해 사는 시민의 삶에 필수적인 서비스는 공공 영역으로 남기고 그 나머지 경제 영역은 민간이 경쟁해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산업 분야로 지정하면 된다. 그러면 한 사회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판돈이 각자 10만 원이고, 열 사람이 모여서 게임을 한다. 이 중에 게임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한 명이 나머지 아홉 명이 가진 판돈 90만 원을 다 획득했다. 이 승자는 이제 마음속으로 선택해야 한다. 딴 돈 90만 원 중의 36만 원만 자신이 가지고 나머지 54만 원은(세율 60%) 게임에 참가해 돈을 잃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고루 나눠주고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54만 원을 자신이 갖고 나머지 게임 참가자에게 34만 원(세율 40%)을 집에 가는 여비조로 줄지를 선택해야 한다. 전자를 택하면 승자는 패자보다 대략 7배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고, 후자를 택하면 승자는 패자보다 대략 17배를 갖게 된다. 이제 내가 게임(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유형의 경제 활동)의 참가자라면 전자와 후자 중 어떤 게임을 선호할 것인가? 전자를 선택한다면 나머지 패자 아홉 명(사회)에게 최소한의 자유를 주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 나머지 9명이 다시 게임(경제활동이나 생업)을 시작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말이다. 즉, 공동체인 사회를 중시하는 것이다. 후자를 선택하면 승자인 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것이고, 그러니 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자유주의자일 수 있다. 여러분은 과연 이 두 게임 중 어떤 게임을 선호하나? 게임 후 승자가 독식하고 난 이후의 사회 분위기를 원하나? 아니면 다수 패자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갖게 하길 원하나?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공론해 정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도 7~80년대를 시작으로 산업화과정을 경험했고, 90년대 중후반 외환위기 이래로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를 아프게 경험했다. 이제 자본주의의 장단점을 제대로 느꼈고 제대로 평가할 시기가 되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모습과 우리가 하고 싶은 경제 게임은 어떤 종류여야 할지 숙의해 판단해야 한다. 이 사회를 구성한 시민이 과연 어떤 종류의 게임을 하기 원하는지 공론해 결정해야 한다. 이대로 늘 살아왔듯이 자본주의는 영원하다며, 필요악이라며 체념하며 살지, 아니며 충분히 자본주의 하면서 대안적인 사회도 가능한지를 인식해 변화해야 할지를 말이다. 이제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가 어떤 곳이어야 할지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가 아니고, 우리가 살기로 정한 사회 말이다.

 

 

글·엄윤진 
독일 본 대학 대학원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정치 철학서 『거짓 자유』와 실존주의 서적 『좋아서 하는 사람, 좋아 보여서 하는 사람』을 쓴 인문교양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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