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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경의 문화톡톡] “우리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단지 세계가 지금 주목했을 뿐” - 전 세계를 사로잡은 k-드라마의 힘
[구선경의 문화톡톡] “우리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단지 세계가 지금 주목했을 뿐” - 전 세계를 사로잡은 k-드라마의 힘
  • 구선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3.06.1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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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은 <더글로리> 시즌2와 함께 시작했다. 작년 여름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때문에 행복했었고 그 전 해에는 <오징어 게임>과 <지옥>에 연달아 매료됐었다. <스위트홈>, <이태원 클라쓰>, <사랑의 불시착>... 최근 몇 년간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든 드라마의 제목들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들에 울고 웃은 건 우리만이 아니다. 이제는 전 세계인이 함께다. 2000년대 초반, <겨울연가>가 한류 붐을 일으킨 이후 점차 발전해 온 우리 드라마는 OTT 플랫폼의 등장에 힘입어 가히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였고 ‘k-드라마’ ‘k-스토리’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

드라마 관계자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한국 드라마의 오랜 열혈시청자로서 이 모든 일은 때로 꿈같다. 일본 드라마의 꼼꼼한 고증에 감탄하거나 미국 드라마의 스케일과 장르성을 부러워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헐리우드라는 이름에, 칸이라는 권위에 주눅 들 일 없다는 것은 얼마나 대견하고 홀가분한 일인지! 다만 한류의 초반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아직도 가끔 신기하고 기분 좋게 어리둥절하다.

 

[오징어 게임] 공식포스터
[오징어 게임] 공식포스터

우리 드라마가 이렇게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뭘까.

첫 번째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보편성을 가진 소재를 쉬운 방식으로 풀어간다는 점이다. 빈부격차와 양극화, 그로 인한 사회 불안정 등의 문제는 세계 어느 나라나 겪고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 드라마는 모두가 공감할 이러한 문제들을 소재로 삼되 에둘러가지 않고 쉬운 서사로 선명하게 다루고 있다. 눈앞에 올려다보이는 ‘돈’을 바라보면서 죽음의 대결을 펼치는 <오징어 게임>, 배고픔에 시달리는 백성과 이를 외면하는 양반층의 모습을 그린 <킹덤>, 부모의 돈과 권력을 믿고 겁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가해자들의 모습을 그린 <더글로리>... 인간의 선함이나 도덕성 따위가 하품 나는 덕목이 되어버린,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잘 그려낸 작품들이다. 특히나 이것을 갑과 을, 선과 악의 선명한 대립으로 보여줌으로써 대중들이 좀 더 쉽게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그렇다면 서구 사회도 이미 겪어온 이 문제를 우리가 유독 잘 다룬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서는, "드라마 속 빈부격차는 우리가 생생하게 겪고 있는 고통이고 상처인데, 먼저 겪은 선진국은 이미 무뎌졌고 개도국은 비판의 여력이 없다"라고 한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홍석경 교수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다시 말해 이 문제를 다루기에, 서구 사회는 이미 문제가 고착화되어 흥미가 없거나 관심이 없고, 개도국은 아직 스토리화 해낼 만큼 관점과 입장의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고, GDP 순위 10위(2021년 기준)인 국가가 되기까지 ‘빨리빨리’ 변화 발전해 온 우리에게는 그 발전의 빛만큼 그림자가 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비의 파장 속에 많은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졌다. 비극도 자산이 되는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다이내믹한 역사와 사회야말로 이야기의 보고인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공식 포스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공식 포스터

우리 드라마의 두 번째 매력은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미처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가족주의와 정,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끈끈한 연대- 즉 따뜻한 정서에 있다. 우리에게 가족주의는 뭐랄까 일종의 기본값이다.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로 여겨지기도 하고 특히 드라마에서는 감정을 극대화하는 손쉬운 신파적 요소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가족은, 아직까지는, 고단한 세상에서 기대고 위로받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이에 더해 번역으로는 전달도 어려울 정(情)이라는 정서가 함께 작동해서 우리 드라마에는 언제나 애정과 오지랖을 넘나드는 관심, 끈끈한 연대, 공동체의 온기가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공기처럼 익숙한 이 모든 것이 서구의 시청자들에게는 낯설고 신기하고 그런데 다정하게 느껴진 듯하다. 마치 우리가 서양의 개인주의를 쿨하게 생각하고 그들의 독립적인 관계와 삶의 방식을 멋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묘한 것은, 그런데 우리의 이 ‘따뜻함’이 유의미한 덕목으로 작용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과 경제가 발전하면 모두가 더 풍요롭고 행복할 줄 알았지만, 나보다 더 풍요로운 남들 때문에 쉽게 행복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고, 전쟁의 위협이 여전히 존재하며 이제는 AI에 이어 챗GPT까지, 우리가 이뤄낸 과학 발전의 결과물들을 미처 누리기도 전에 어쩐지 쫓기는 건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드는 요즘이다. 지구와 인간의 미래에 대한 상상이 밝게만 떠올려지지 않는 지금, 이 문제의 해결은 인간의 연대, 인간성에의 호소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그 부분에 어쩌면 우리의 정서가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가 반갑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제42회 청룡영화상에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과 함께 대중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윤여정 배우/제공=KBS2
제42회 청룡영화상에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과 함께
대중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윤여정 배우/제공=KBS2

마지막으로 여기에 하나 더, 우리 드라마가 호평받은 이유는 무엇보다 이것들을 담아낸 만듦새가 좋았다는 것이다. 아름답고 멋있는 배우들, 완성도 높은 대본, 빼어난 연출력, 그리고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스태프의 노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가 어우러진 결과다. 다른 나라의 드라마들도 그렇지 않으냐고? 물론 그렇다. 중요한 건 우리가 우리의 색깔로 그 완벽한 만듦새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기회가 왔어도 보여줄 거리가 없었고 증명할 근거가 없었을 것이다. 지난해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윤여정 배우는 한국 대중 예술이 이렇게 갑자기 주목받는 이유를 아느냐는 영국 기자의 질문에 “우리는 언제나 좋은 드라마, 영화가 있었다. 단지 지금 세계가 우리를 주목할 뿐”이라고 답했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노배우의 이 현명한 답변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k-드라마 또는 k-스토리가, 나아가서 k라는 이름이 붙은 많은 문화예술 상품이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하나의 장르가 되기를, 우리 모두 바랄 것이다. 앞에 잘된 것들을 흉내 낸다고 또 잘되지 않을 것이고, 전 세계 순위 몇 위와 같은 수치가 작품 기획의 지향점이 될 수도 없다. 여태까지 해 온 것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진지한 열정이 계속되기를, 그래서 이야기의 본질에 충실함으로써 시청자를 사로잡는, 웰메이드의 증표 k가 되기를 바란다.

 

고 이힘찬 프로듀서 1주기 추모식.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
고 이힘찬 프로듀서 1주기 추모식.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

이를 위해 우리에게 현실적인 부분의 과제들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고 예전보다 제작 환경이 개선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는 아직도 고강도 노동이 계속되고 있고 22년 초에는 제작사 프로듀서가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로 사망하는 등 각종 문제와 분쟁이 여전하다. 이후 재발 방지 대책으로 드라마 제작 현장의 가이드라인이 마련되는 등 긍정적인 변화도 보이긴 하지만 아직은 과정 중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누구나 존중받고 안전할 수 있는 제작 환경이 시스템으로 구축되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이를 준수하는 것이 개개인의 역량이나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니라 기본 상식과 원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인간을 말하는 드라마가 인간다움을 놓치지 않기를, k-드라마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콘텐츠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이 글은 한국전력매거진 '빛으로 여는 세상' 5+6월호에 실린 필자의 글 <전세계를 사로잡은 k-스토리의 힘>을 수정, 보완한 기사임을 밝힙니다. 

 

 

글·구선경
드라마작가. 작가협회 교육원과 대학에서 드라마와 스토리텔링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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