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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문화톡톡] K-수능, 미래를 꿈꾸게 할 수 있는가 1
[김정희의 문화톡톡] K-수능, 미래를 꿈꾸게 할 수 있는가 1
  • 김정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3.07.31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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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흐렸다.

기대하고 기대해도 합격은 어렵고, 끊고 끊어도 단념이 안 된다.

과거 합격자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결국 나 같은 자의 일이 아니다.

떠들어대는 소리에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역시 헛되이 열을 낸 것이었다.

1783년 4월 17일 유만주

 

대학을 알면 미래가 보입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KCUE)의 문구이다.

현재 우리나라 「고등교육법」 제34조의 5에 의하면 각 대학이 매 입학연도의 1년 10개월 전까지 대학입학전형시행계획을 수립·공표하도록 되어 있다. 2024학년도 대입전형시행계획은 2022년 4월 27일 발표되었고, 2024학년도 수능은 2023년 11월 16일에 치러질 예정이다.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인원을 살펴보면 1994학년도에 716,326명이었고, 2023학년도는 447,669명이었다. 30년 사이에 약 27만명이 줄어든 가장 큰 이유는 학령인구의 감소 때문이다. 수능 응시인원의 숫자들은 굳이 다른 근거를 대지 않더라도 학령인구 중 대부분이 수능시험을 본다는 것과 더불어 한국 교육의 목표가 대학 입학이 되는 충분한 이유를 보여 준다. 대학교육협의회에서 ‘대학을 알면 미래가 보인다’고 당당히 주장할 만하다.

24학년도 대입전형시행계획은 수능 1년 6개월 20일 전에 발표되었는데, 이는 수능 준비를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시작해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대입에 있어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수능 준비를 1년 6개월 만에 하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게 아니라면 고등교육법 제 34조 항목이 의도했던 바가 대입전형계획을 매해마다 발표하라는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런 일은 매해 반복되고 있고, 정작 수험생이 아닌 학부모들이 입시설명회를 찾아다니며 입시공부 즉, 입시전형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하는 현실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학을 알면 미래가 보이는가? 미래는 꿈을 담보로 한다. 이루어지지 않은,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를 꿈을. 대학에 입학해야만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조선시대의 수능이라 할 수 있는 과거시험은 어땠을까? 과거에 합격해야 관리로 나갈 수 있었던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는 어떤 꿈이 있었을까? 과거급제 말고 자신만의 꿈을 꿀 수 있었을까?
 

유만주의 꿈, 욕망
흠영

유만주라는 사람이 있었다.

유만주는 1755년 2월 4일(영조31)는 조선시대 명문가인 기계 유씨 집안에서 태어나 서른 네 살 되던 해인 1788년 1월 29일(정조12)에 죽었다. 그는 스무 살이 되던 1775년 1월 1일부터 죽기 한 달 전인 1787년 12월 14일까지 일기를 썼다. 자신의 일기 제목을 <흠영>이라고 지었고, 13년간 쓴 일기는 24책 분량이나 된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유만주는 26세 당시 집에 있는 책이 200종 정도이고, 1765년부터 10년간 읽은 책이 1천 종에 불과하다고 일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죽을 때까지 5천여 종의 책을 읽었다.

유만주는 ‘사람에게는 다섯가지 욕망이 있는데, 맘에 드는 남녀를 만나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과거를 합격해 벼슬아치가 되는 것, 재물을 많이 얻는 것, 맘에 맞는 취미 생활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에게는 이보다 더 큰 욕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38가지 인물형으로 나누어 통달한 선비, 현명한 재상, 유학에 정통한 어진 선비, 절의를 지킨 사람, 명신(名臣), 암혈(巖穴)에 은둔한 사람, 정직한 신하, 행적이 맑은 사람, 특정한 당파에 소속된 사람, 훌륭한 역사가, 청렴한 벼슬아치, 나라에 공훈을 세운 사람, 문장가, 용감한 무인(武人), 유능한 신하, 왕족 중의 빼어난 사람, 부마 중 이름난 사람, 효성스러운 사람, 굳세게 정절을 지킨 사람, 행실이 고상한 사람, 기이한 재능을 지닌 사람, 기예(技藝)를 지닌 사람, 호걸과 협객등, ... 이렇게 일가(一家)를 이룬 역사서를 전하는 것이었다.

(1778년 8월13일 유만주)

유만주는 역사가가 되는 것이 가장 큰 욕망이었고, 꿈이었다. 역사서 중에서도 본기(本紀), 표(表), 지(志)같은 것을 갖춘 국사(國史)가 아닌 전(傳)만 쓸 예정이었던 그는 어쩌면 유만주전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일기 <흠영>만을 남겼다. 흠영(欽英)은 꽃송이처럼 빼어난 사람을 흠모한다는 뜻으로 유만주가 직접 지은 호이다. 너무나 책을 좋아했고,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던 유만주는 평생 글공부에 매진하여 과거시험이 있을 때마다 응시했으나 한 번도 합격을 하지 못하였다. 유만주는 과거시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창덕궁 영화당
창덕궁 영화당  © 김정희

 

유만주의 과거시험

 

1776년 9월27일 입동, 절기 시각은 인정 초각(오전 4시15분)이다.

이병정이 성균관의 시험을 주관했다. 과제는 ‘패공이 함양궁에 머물러 있는 걸 보고 부잣집 영감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새벽에 들어갔다가 한낮에 나왔다.

담은지의 누대에 들렀다가 저물녘에 돌아왔다. 들으니 성균관의 초시에서 ‘광’자를 쓴 사람은 모두 탈락시켰다고 한다.

1779년 9월10일 아침에 흐리고 비가 올 것 같더니 오후 늦게 개었다.

파루 때 일어나 촛불을 켜고 밥을 먹고 시험장으로 갔다. 해가 뜬 후 문이 열렸다. 들어가려는 자들이 몰려들어 밀치고 버티고 하는 통에 한참 뒤에야 비로소 시험장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강회에서 조운선을 출발시키는 날에 동남 백성들의 힘이 고갈된다는

말을 하였다’는 주제로 시를 짓는 문제가 나왔다.

시험장으로 들어가다가 어떤 거자(과거 시험의 응시생)가 다쳐서 죽었다고 한다.

(파루는 새벽 4시경 쇠북(종)을 33번 쳐서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던 제도이다.)

1782년 3월10일

새벽에 주상께서 대성전에 이르러 작헌례를 행하셨다. 묘각(오전 6시경)에 시제(試題)가 나왔다. 정오까지 답안을 제출하라고 했다. 미각(오후 2시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의 시학과에서는 조항진, 정만시, 윤서동, 이돈이 뽑혔다

1785년 11월3일

새벽에 일어나 큰 종이 한 폭을 가지고 동쪽으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대제학 오재순이 시험관이었고 임금께서 출제하신 문제가 나왔다.

벼루가 얼지는 않았다. 정오 지나고 나서 자필로 써 제출하고 나왔다.

1787년 3월 29일

더웠다. 아침에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았지만 역시 늘상 그랬던 것처럼 가물었다.

아침에 시험을 보러 동궐에 들어가 무리에 섞여 있었다. 성균관을 나와서도 어디서든 줄지은 행렬 속을 걷고 있다. 이런데도 시커멓고 질펀한 고해(苦海)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

(동궐은 창덕궁이다. 창덕궁의 영화당과 그 근처의 마당은 과거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남산 근처에 살았던 유만주는 시험이 있을 때면 매번 새벽에 일어나 시험장소인 성균관이나 창덕궁으로 갔다. 시험장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몰려있는 장면과 ‘어디서든 줄지은 행렬’을 묘사한 일기를 읽다 보면 수능 날 뉴스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겹쳐진다. 어두컴컴한 새벽부터 시험이 치러지는 학교 앞 응원하는 사람들과 수능 날 전 국민이 출근 시간을 늦추는 일 이라던지 시험장소를 착각한 수험생을 경찰차가 데려다주는 일등 어쩌면 매년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지 놀라울 정도다. 물론 1779년 과거응시생이 시험장에 들어가려다 다쳐서 죽는 일과 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유만주에게 과거시험은 어떤 의미였을까?

 

1795년 (정조19) 수원 행차중 윤2월 11일 낙남헌에서 문무과 시험 합격자 발표와 시상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날 실시한 시험은 왕의 행차를 기념한 수원별시(水原別試)로 수원, 광주, 과천, 시흥 지역거주자만 응시할 수 있었다. 이때 문과 합격자는 5명, 무과 합격자는 56명이었다. 낙남헌 건물 안에는 정조의 자리인 붉은 용교의가 일월오봉도 병풍 앞에 놓여 있고, 앞뜰에는 합격증서인 홍패(홍패)와 어사화(어사화), 어사주(어사주)가 놓여 있다. 뜰 중앙에는 어사화를 받은 합격자들이 오른편에는 문과, 왼편에는 무과로 나뉘어 있다.
1795년 (정조19) 수원 행차중 윤2월 11일 낙남헌에서 문무과 시험 합격자 발표와 시상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날 실시한 시험은 왕의 행차를 기념한 수원별시(水原別試)로 수원, 광주, 과천, 시흥 지역거주자만 응시할 수 있었다. 이때 문과 합격자는 5명, 무과 합격자는 56명이었다. 낙남헌 건물 안에는 정조의 자리인 붉은 용교의가 일월오봉도 병풍 앞에 놓여 있고, 앞뜰에는 합격증서인 홍패(홍패)와 어사화(어사화), 어사주(어사주)가 놓여 있다. 뜰 중앙에는 어사화를 받은 합격자들이 오른편에는 문과, 왼편에는 무과로 나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1782년 7월29일 몹시 더웠다. 오후에 가끔 흐렸다.

아마도 과거시험 보는 재주에 있어서는 잘못하도록 타고난 것 같다. 그러니까 허술하고 게으른 것이다. 겨울잠을 자는 벌레처럼 보지도 듣지도 않고 누굴 만나지도 않고 아무 일 도 않고 있다. 없는 듯 적요(寂寥)하며 죽은 듯 꼼짝하지 않는다. 머리 위로 해가 지나가고 발 아래로 바람이 지나간다. 과연 전혀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가? 그렇진 않다.

인격적 성장이 더딤은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성취가 늦다고 걱정하는 것은 세속의 인생이 면할 수 없는 바인지

 

1784년 9월24일 바람이 찼다. 새초롬하고 맑은 날씨였다.

대성전과 비천당은 재능도 없고 지혜도 없으며 망상에 빠진 썩어빠진 선비가 희구할 만한 곳이 아니다.

(대성전과 비천당은 모두 성균관의 부속 건물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모신 사당이고, 비천당과 그 앞마당은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보던 장소였다.)


과거시험을 보러 갔으나 매번 합격하지 못했던 유만주는 자신을 ‘과거시험 보는 재주에 있어서는 잘못하도록 타고난 것’ 같다며 ‘허술하고 게으르며 재능도 없고 지혜도 없으며 망상에 빠진 썩어빠진 선비’라고 자책을 넘어 자학을 하고 있다.

매년 시험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수험생들이 오히려 상대적으로 높은 성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유만주의 자책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3년마다 치르게 되어 있었다. 자(子), 오(午), 묘(卯), 유(酉)자가 들어가는 해에 치르는 것으로 식년시(式年試)라고 한다. 이밖에 특별한 일이 있을때에 치르는 별시(別試)가 있었다. 1779년 9월10일 유만주의 일기에서 보듯이 과거 시험장에서 사람이 죽는 일이 가끔 있었다.

임금이 과거를 보던 유생 두 사람이 시험장에서 밟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히 오늘은 음악을 정지하고 그 아들이나 동생을 등용하라고 명했다. 영조실록 49년 (1773) 10월 22일

과거 시험지는 시권(試券)이라 하는데 시험장에 가기 전 먼저 시험지를 준비하고 시험지에 본인과 사대조(四代組)의 인적 사항을 적었는데, 시험장에서 작성된 답안과 이후 채점된 결과까지가 모두 담겨있었다. 과거 합격 후에는 방방의(放榜儀)라는 축하 행사를 하였는데, 방방의는 합격자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합격증서(홍패)를 수여했기 때문에 방방(放榜)또는 창방(唱榜)이라 했다. 합격자는 국왕으로부터 술과 과일 등을 비롯해 시가행진에서 선보일 어사화와 일산(日傘)도 하사받았다.

인정전에 나아가 생원 시험의 방(榜)을 발표하였다. 유학 민원(閔瑗)등 1백명이 푸른 도포에 유생의 관(儒冠)을 쓰고 이름을 부르는 차례대로 궁궐 뜰에 나아가 네 번 절을 했다. 술과 과일을 내려주니, 학생들이 모두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나 꿇어앉아 술잔을 받았다. 다시 구부려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네 번 절했다. 시신(侍臣)과 삼관(홍문관, 예문관, 교서관)이 모두 절차대로 예를 행하고 생원들은 사흘 동안 유가(游街)를 하였다.

세종실록 2년 (1420) 윤1월 18일

백명이나 되는 유생들이 관을 쓰고 어사화를 꽂고 말을 타고 사흘 동안이나 거리 행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과거 급제를 한 사람들이 당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과거급제가 얼마나 절실한 일이었는지 이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익히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글 · 김정희(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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