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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문화톡톡] 2023년 올해의 벡델리안, 그들은 누구인가(2)
[김민정의 문화톡톡] 2023년 올해의 벡델리안, 그들은 누구인가(2)
  • 김민정(문화평론가)
  • 승인 2023.10.04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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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경 여행기[ 공식포스터
[박하경 여행기] 공식포스터

 

2023 올해의 벡델리안

 

올해의 벡델리안 감독(연출) 부문은 <박하경 여행기>의 이종필 감독이다.

최근 콘텐츠를 소비하고 향유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우리가 원하는 시간과 공간에 언제 어디서든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다. 나아가 이제는 콘텐츠의 분량까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몇 년 사이 드라마를 1.5배속이나 2배속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변화는 콘텐츠를 창작하는 작가와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파격적인, 가히 혁명적인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서 콘텐츠를 감상할지라도 그동안 콘텐츠 자체에 변화를 준 적은 없었다. 드디어 소비자가 생산자의 지위에 올라서 창작자와 대등한 자격을 차지한 것이다.

자극적이고 빠른 템포의 콘텐츠가 넘쳐나는 가운데 <박하경 여행기>는 너무나도 다른 결을 가진, 그래서 유독 튀는 드라마다. 온라인 리뷰에서 힐링 드라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데 힐링 드라마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드라마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게 아닐까 싶다. 힐링하면 왠지 폭신폭신하고 몽글몽글한 느낌일 것 같은데, <박하경 여행기>의 힐링은 그런 결이 전혀 아니다.

극중 박하경은 템플스테이를 하러 산에 올라가는데, 그 산길 옆에 돌탑이 있는 걸 발견한다.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작은 돌을 하나씩 쌓아서 만든 돌탑. 그걸 보고 박하경은 속으로 한마디 툭 내뱉는다. 돌탑 쌓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해본 사람은 안다. 피라미드 모양의 돌탑은 절대 호락호락 우리가 정상을 차지하게 두지 않는다. 조금만 방심하면 순식간에 돌탑은 무너져 버린다. ‘발로 차고 싶다.’ 위태로운 돌탑을 향한 박하경의 속말은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 힐링에 집착해왔다는 것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열심 없는 힐링. 힐링 없는 힐링 드라마.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여성 원톱 드라마‘ 그 너머에는 장르적 문법을 거스르는, 그 낯섦으로 우리의 지평을 확장하는 도발성이 자리한다. 이종필 감독은 이전에 없었던 ’힐링‘, 형체 없는 ’힐링‘을 영상적으로 구현해내는 데 성공한다. <박하경 여행기>는 ’힐링‘을 힐링하는 경이로운 드라마다.

 

[슈룹] 공식포스터
[슈룹] 공식포스터

 

올해의 벡델리안 작가 부문은 <슈룹>의 박바라 작가다.

<슈룹>은 당대 지금의 현실을 되비추는 알레고리로서 조선시대 궁중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다. 왕자들의 신박한 사교육 비법을 앞세워 조선시대 'SKY 캐슬'로 불리며 극적 몰입감을 높이는 한편,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신분과 처지에 따라 계급이 달라지는 왕자들, 즉 계급의 세분화를 통해 그동안 드라마에서 재현되었던 갑과 을로 구성된 이분법적 K-세계관을 낯설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극 중 왕의 어머니 ‘대비’는 후궁 출신으로 서자인 아들을 왕위에 앉힌 입지적인 엄마이자 증전을 폐위시키고 대비의 자리에 오른 성공한 후궁이다. 위계서열이 확고한 K-세계관에서 신분 상승을 이루어낸 독보적인 인물이다. 모든 후궁들의 롤모델 겸 모든 을이 꿈꾸는 성공 신화. 드라마 주인공인 우리의 중전 ‘김혜수’도 집안 좋은 다른 후보를 제치고 중전이 된 ‘성공한 을’이다. 결국, 드라마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만 존재하는 셈이다. 갑이 된 을과 갑이 되고 싶은 을.

'성공한 을'로 그려지는 중전마마과 대비마마의 대립구도를 통해 이상적인 '갑'의 조건을 탐색하며 <슈룹>은 폭력적인 사적 복수가 팽배한 K-드라마 세계관에서 유의미한 성찰의 지점을 만들어낸다. 이상적인 ‘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익숙한 설정의 궁중암투도 K-세계관의 승은을 입으면 <슈룹>처럼 PC한 웰메이드 글로벌 콘텐츠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낸다.

시리즈 분량에 비해 등장인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제각각 성격을 부여하여 매력적인 캐릭터로 창조해낸 점 또한 드라마 속 성소수자 에피소드가 단순히 사극의 시의성을 높이기 위한 서사전략이 아니라 작가의 '벡델스러운' 세계인식에 기반한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2024 벡델데이를 기대하며

 

<박하경 여행기>의 이나영, <슈륩>의 김혜수, <퀸메이커>의 김희애, 문소리를 포함해 벡델초이스 10에 오른 다수의 드라마 주연들이 40·50대 여성 배우다. 40·50대 여성 배우‘들’의 약진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 것일까.

40·50대 여성 배우들은 그들의 인생 자체가 한 편의 여성 서사다. 배우 김희애는 1992년 <아들과 딸>에서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로 늘 아들 ‘귀남이’에게 밀려 무시와 홀대를 받는 딸 ‘후남이’를 연기한다. 하지만 2022년 <퀸메이커>에서 대기업 전략기획실 출신의 성공한 이미지 컨설턴트로 나와 인권변호사 오경숙을 서울 시장으로 만들며 기성 사회의 부조리에 반기를 드는 ‘퀸메이커’로 거듭난다.

‘여성’ 배우로서 김희애의 삶은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에 투영되어 대중에게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스크린 안과 밖의 통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통합이 성취되는 것. 그래서 벡델데이가 더 이상 벡델데이로 머물지 않고 여성과 남성의 통합 아래 세상의 모든 작고 사소한 것들의 가치를 발굴하는 작업으로 문화적 돌파와 사회적 확장이 일어나는 것. ‘TURN ON THE FUTURE’ 벡델데이의 슬로건대로 미래를 밝히는 작은 빛을 지켜내는 작업이 바로 벡델초이스를 선정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기념하는 일이다.

2024년 우리가 마주하게 될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그 세계의 주인공 크레딧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포함되어 있단 것만은 확실하다. TURN ON THE FUTURE! ‘오늘’은 우리가 살아갈 내일의 ‘마중물’이다.

 

 

글·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과 문화, 창작과 비평을 넘나들며 다양한 글을 쓰고 있다.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과 르몽드문화평론가상, 그리고 2022년 중앙대 교육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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