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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경의 문화톡톡] 다시 돌아온, 단막극을 소개합니다 – 오프닝 2023
[구선경의 문화톡톡] 다시 돌아온, 단막극을 소개합니다 – 오프닝 2023
  • 구선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3.10.23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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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단막극의 계절이 돌아왔다. 7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는 tvN에서 오펜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작품 중 8편이 ‘오프닝 2023’이라는 타이틀로 영상화되어 방영되었고, 10월 14일부터는 KBS에서 ‘드라마스페셜 2023’이 토요일 밤마다 방영 중이다. tvN은 특히 오프닝 홈페이지를 통해 방영 작품을 포함한 모든 공모 당선작의 대본을 공개하고 있다. 드라마에 관심이 있거나 드라마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완성도 높은 단막극 대본을 찾아볼 좋은 기회인 셈이다. 오늘은 우선 ‘오프닝 2023’의 문을 열었던 작품 두 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썸머 러브머신 블루스>

나이수(고수 분)는 명문 한국대를 졸업하고 수년간 사법고시를 준비했으나 결국 낙방한 후, 어렵게 취업한 회사까지 망하는 바람에 지금은 인터넷으로 성인용품을 팔고 있는 사회 부적응자 히키코모리 사장이다.

여드림(아린 분)은 아버지는 사업 부도로 빚쟁이들에게 쫓겨 집을 나갔고 엄마마저 병으로 돌아가신 후 혼자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재수생이다. 다른 과목은 다 1등급인데 수학 성적이 안 나와 진학이 어려운데, 집안 사정마저 이 모양이니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다. 절망적인 마음에 생을 마감하고자 오피스텔 옥상에 올라갔다가 뜻밖에 이수를 만나게 된다.

어딘가 좀 이상한 듯하지만 한국대 출신이라는 말에 이수에게 수학 과외를 부탁하고, 이수는 공부가 끝나면 같이 춤을 추자는 요상한 조건을 건 채 둘은 공부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의 장점은 눈길을 끄는 설정이다. 이야기에는 언제나 훅이 필요하다. 명문대를 나와 성인용품을 파는 남자라구? 일단 궁금하다. 성인용품이라는 단어가 주는 호기심, 명문대와 성인용품의 언밸런스, 그렇게 구겨진 삶의 아이러니. 남주인공은 이미 캐릭터 설정에 페이소스가 담겨있다.

또 하나 눈길을 끌었던 건 여주인공 여드림의 캐릭터다. 상황은 절망적일 정도로 어렵지만 드림은 가라앉아 처져있거나 징징대며 침잠하지 않는다. 말투는 쿨하고 행동은 빠르다. 결정도 신속하고 매사를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보는 사람이 덜 힘들고, 이야기에 접근이 쉬워진다. 그러면서도 이런 캐릭터가 절망하는 순간 그 무게감은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설정과 캐릭터 운용 덕분에 드라마는 시종일관 경쾌하고 쉽다. 공부를 하면 성적이 오르고(고3에 성적이, 그것도 수학 성적이, 모의고사 점수가 이렇게 오르다니!), 조건 만남을 한다는 오해를 받지만 금방 문제가 해결되고, 드림은 콜센터 알바 따위는 해본 적 없지만 심지어 성인용품몰의 진상 고객도 시원시원하게 대처한다. 이러한 드라마의 진행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일견 아쉬움이기도 한 부분이다. 특히 조건 만남이나 미성년자의 성인용품몰 전화 알바 에피소드 등은 이렇게 웃으며 넘어가도 되나 멈칫하게 만든다. 드라마의 에피소드가 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사건을 다루는 태도에서 조금은 조심스러웠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기도 했다.

 

이 작품은 특히 주연급 스타인 고수와 오마이걸의 아린이 출연하여 뜻밖의 신선한 조합이라는 반응과 함께 기대를 모았었다. 이후 다른 오프닝 시리즈에서도 이순재, 이연희, 엄지원, 유이 등 주연급 배우들이 연달아 주인공을 맡아주었고 또 <2시 15분>이라는 작품에서는 최근 가장 주목 받는 아역배우 두 명, 박소이와 기소유가 출연하기도 했다. 모두 단막극 지원에 힘을 실어준 모습들이다. 다음은 바로 그 이순재 배우가 출연한 <산책>이다.

 

<산책>

순재(이순재 분)는 평범한 할아버지다. 아내의 말에 그다지 귀 기울이지 않고, 안사람을 쥐어박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으며 아내가 개를 애지중지하는 것도 마뜩잖고 아들에게도 딱히 좋은 소리 해본 적 없는, 그냥 우리 주변에 흔히 보이는 그런 할아버지다. 특별히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는 7080 노인이다.

그런 순재에게 늘 곁에 있을 것만 같던 아내 문희(선우용여 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설상가상 아들 민식(최대철 분)은 그 좋은 직장에서 밀려나 사업을 도모하러 자카르타로 떠나야 한다며 같이 가시자고 한다. 아버지 집을 팔아서 함께 사업 자금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도와달라고만 하고 아버지를 버리고 가는 건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와중에 아내가 애지중지 키우던 순둥이라는 이름의 강아지의 수발은 순재의 차지가 되고 말았는데 이놈은 또 알고 보니 건강 상태가 시원치 않아 꽤나 정성스러운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제부터 순재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깊은 황혼은 과연 어떤 엔딩으로 향할 것인가. 어릴 때, 젊을 때와 달리 40, 50이 넘고 심지어 70, 80이 되면 이제 이 생에 별다른 큰 이벤트는 기대하기 어렵다. 큰돈을 벌거나 평생 못 누려본 영예를 누리거나 짜릿한 열정까지도, 이제 올 나이가 아니다. 앞으로 올 새로운 변수라면, 대개 나빠지는 쪽의 일들이다. 건강이 나빠지는 거야 기본값이라 해야 할 것이고 자식의 사업이 망해서 내가 가진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마저 내줘야 하거나, 치매에 걸려 정말 보이고 싶지 않은 꼴을 보이거나, 믿었던 내 자식들이 믿지 못할 바닥을 드러내며 외면하는 일 따위의 일들이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순재는? 다행히 순재의 삶은 파행을 맞지 않는다. 그래서 순재는 특별한 할아버지다. 아내의 영혼이 주변을 맴돌며 잔소리를 할 때 한 귀를 열고 들을 줄 알고, 쳐다보지도 않던 강아지지만 그놈이 알짱거릴 때 거둬주면서 애정을 주고받고, 그 녀석을 위해 귀찮기 짝이 없는 산책 방법을 배워 함께 발맞춰 길을 걷고 그래서 어느 순간에 내가 위로를 받기도 한다. 새롭게 알게 된 바둑 친구들과 짜장면 내기를 할 만큼, 새로운 친교를 맺을 마음의 여유와 생의 의욕은 남아있는 할아버지다.

그래서 마침내 문희가 떠날 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 “고맙다”와 “미안하다”를 순둥이가 떠나는 순간 순둥이를 통해 문희에게 전한다. 비로소 아내에게 진심을 전하는 순간이다.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진심을 전하면 실은 내가 가장 위로를 받는다. 도덕성이 높은 사람이 행복지수가 높다고 하는데, 진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영상에서는 많이 덜어냈지만, 오프닝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대본 원본에는 수의사 유담(이연희 분)의 이야기가 비중 있는 서브플롯으로 흘러간다. 산악 바이크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 심각한 뇌 손상으로 장기간 의식 불명으로 누워있는 남동생 동원 때문에 유담은 늘 무겁고 아픈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로 인해 수의사로서는 개들의 안락사를 실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유담의 이야기는 이 드라마가 삶과 죽음, 그리고 남겨진 사람의 위로와 치유에 관한 이야기로 좀 더 깊이감을 갖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영상에서 볼 수 없었던 유담과 동생의 씬들이 무겁지만 의미 있게 다가왔다.

흰색 강아지의 출연은 치트 키다. 귀를 쫑긋거리며 순재 할아버지를 쫓아다니는, 순재 만큼이나 나이 든 할아버지 개(그러니까 정확히는 강아지가 아닌)는 일단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자칫 무겁거나 답답할 수 있는 노인과 죽음이라는 소재에, 젊은 시청층도 좋아할 만한 동물 소재를 적절히 잘 버무린 영리함이 돋보인다.

평범하고도 평범하지 않은 할아버지의 삶이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하지만 따뜻하게 펼쳐지는, 드라마가 위로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새기게 해주는 작품이다.

 

사진 출처 - <오프닝 2023> 공식 홈페이지

 

글·구선경
드라마작가. 작가협회 교육원과 대학에서 드라마와 스토리텔링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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