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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화의 문화톡톡] 춤의 대중적 공감을 위한 시론
[김기화의 문화톡톡] 춤의 대중적 공감을 위한 시론
  • 김기화(문화평론가)
  • 승인 2023.12.14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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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계의 자성적 성찰, 예술 권력의 재편성·전문화

1. 춤의 향유(享有) 패러다임

한국 무용계의 향유 패러다임은 매우 특별하다. 연행자가 향유자, 즉 관객의 주류를 형성한다. 몸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 특성상 춤에서 발생하는 몸의 아이콘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탓인지 대중의 호응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들이 새로운 접근 방식을 동원하여 공연을 연행하며 조금씩 변화를 보이고 있으나 아직도 대중의 관극(觀劇) 도모는 먼 이야기이다.

춤의 향유층을 대별(大別)하면 춤을 배우는 주부층, 예술 중·고등학교 학생, 무용 전공자, 현장 예술가이다. 춤은 매우 중독성이 강하지만 춤에 관한 역량을 갖추자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몸과 미의식의 간극(間隙)을 좁히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몸에 대한 감각을 발견하여 조절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한 번 그 내밀한 몸의 감각을 이해하고 그 아우라, 혹은 기운의 흐름을 이해하게 되면 정말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 따라서 무용 향유층은 좁으나 열광적인 특성을 보인다. 조금은 궤변처럼 들릴 수 있지만 춤은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공감이 쉽지 않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몸에 관한 집중과 세밀한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게 되면 춤은 마치 수행자가 얻게 되는 평정심의 경지까지도 구해지게 된다. 

 

유정숙 안무 '그 너머의 봄'은 전통 산조의 구조를 해체하여 속도의 역발상을 적용하여 약동하는 여성을 정조를 표현하였다.(사진제공 유정숙)
유정숙 안무 '그 너머의 봄'은 전통 산조의 구조를 해체하여 속도의 역발상을 적용하여 약동하는 여성을 정조를 표현하였다.(사진제공 유정숙)

2. 아름다움에 대한 춤의 인식

몰입된 몸과 의식의 일체감을 통해 무용의 기능, 혹은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공연으로서 춤은 관객과 무엇을 소통하고자 하는가? 혹은, 어떠한 공감대를 관객과 공유하고자 하는가? 바로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관객은 묵언의 태도로 관극(觀劇)의 어려움을 토로할 것이다. 멋이 있고, 흥이 나고, 신명 나는 춤을 통해 관객들도 동일시(同一視)의 과정으로 최소한의 승화(昇華)를 경험하고는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잘 모르겠다는 경우가 많이 있다. 웅장하거나 장엄하고 세련됨을 동경하면서도, 춤이 여전히 어렵다는 경우가 많다. 4차 산업 혁명을 운운하며 미래산업이라는 가능성으로 춤의 발전을 예견하기도 하지만, 춤의 예술적 담론을 구성하기에는 해결할 일이 너무 많다.

이러한 어려움에 이른 원인은 춤이 예술 장르로 구축될 때 미의식의 생성 기반이 양식성에 중심을 두고 편중된 탓이다. 그리고 그 편중된 미의식을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직도 미온적이다. 현대에 인식하는 예술로서의 춤은 근대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근대 초 전통 예인인 기녀나 광대들의 연행이나, 당시 엘리트층으로 대접받던 신무용가들의 작품은 서구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 무대라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양식적 사유에 큰 비중을 두었다. 따라서 창작이나 연행의 중심은 뛰어난 기교적 표현이 많았다. 미학적으로 춤추는 몸에 관한 인식은 주로 숙련도나 리듬, 통일성, 혹은 음악과의 조화 등 외재적 미의식에 대한 가치가 높이 평가되었다. 조선말, 혹은 일제강점기인 당시로서는 처한 상황으로 인해 예술가들이 목소리를 높이거나 표현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춤은 인체를 탐미하는 미의식이 정조(情調)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한 감각에 따라 일어나는 막연한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둘러서 표현하다 보니 미적 경험을 확장 시키는 자세는 견지(堅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격변하는 어려운 정세로 인해 전쟁의 고통을 잊고 고단한 삶에서 춤은 몰입과 흥을 체험하거나 향유 하는 등 새로운 삶의 국면을 발견하는 동력이 되었으나 새로운 미적 세계로의 몰입을 통해 다른 차원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행위로 연결되지 않았다. 예술 창작의 의지는 작품에 대한 자아와의 거리 두기를 통해 냉정한 미적 태도로 인식하고 접근할 때 반영된다. 새로운 미적 의지가 투영될 때 서정적인 미적 태도와 더불어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인식하는 세계와 인간을 연결 짓는 인문학적 공감대를 갖게 될 것이다.

 

‘가야의 여신들’은 이애현을 예술감독으로 고령지역 예술가와 군민이 함께 제작한 작품이다. 대가야 정체성을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 융합된 댄스컬로 창작하여 대중의 이목을 집중한 바 있다. (사진제공 이애현)
‘가야의 여신들’은 이애현을 예술감독으로 고령지역 예술가와 군민이 함께 제작한 작품이다. 대가야 정체성을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 융합된 댄스컬로 창작하여 대중의 이목을 집중한 바 있다. (사진제공 이애현)

3. 예술 권력의 재편성, 전문화

춤이 양식적 탐미주의로 좌초될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면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무용계의 성찰과 노력이 요구된다. 관객에게 읽힐 수 있도록 춤의 어법도 개발해야 하고, 관객들이 관심 있는 소재나 주제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에 못지않게 현장 예술가들이 확장된 미적 태도로 관객과 소통하거나 공감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분위기에 맞는 생태환경이 새롭게 조성되어야 한다. 생태환경이 새롭게 조성되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나 하나의 큰 틀로 이야기하자면 전문화를 강화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술 권력이 재편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 권력의 집중은 좁은 무용계를 양산하기에 무용의 대중적 공감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계가 필요하다.

무용계는 예술 현장보다는 대학의 교육 현장을 중심으로 생태환경이 조성되어왔다. 따라서 열악한 공연 현장의 관객 도모는 하나의 거대한 틀을 거머쥔 대학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독립예술가들이 활동하기에는 힘에 부친다. 대학입시를 중심으로 많은 것이 조성되어 있고, 사회적 활동에서도 대학에 재직한 구성원들이 평가자가 되거나, 수혜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 무용계에서 사회적 위치를 확보하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러한 무용계의 관행이 독자적으로 구성된 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에서 예술을 바라보거나 학술을 평가하는 관점이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상황도 한몫할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무용단의 단원으로 기량을 인정받던 사람이 대학에 임용되면, 그때부터는 예술 창작과 학술의 현장에서 상당한 위치를 맡아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미 형성된 무용계 권력의 패러다임에 들어가서 활동하여 많은 무용가에게 상대적 상실감을 주고 있다.

 

강선미의 ‘세밑’은 다년간 프로젝트 공연으로 대중적 공감을 위해 작품을 수정하며 공연하고 있다. 연말 공연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강선미의 ‘세밑’은 다년간 프로젝트 공연으로 대중적 공감을 위해 작품을 수정하며 공연하고 있다. 연말 공연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무용계에 구축된 법인체 조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대학을 중심으로 구성된 권력은 조직을 이끌어가는 동력으로 작동되어 긍정과 부정적 시각을 모두 만들어내고 있다. 조직 내 사업을 수행할 때 법인체의 수장인 대학교수와 그 제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업무에 참여하여 효율성을 거두어 성공한다. 그러나 구성원 대부분은 주변부에 머물거나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느리게 가더라도 논의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사람의 역량을 끌어내는 것이 더 큰 성공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관행처럼 구축된 조직체계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 무용에 대한 가치 인식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필요한 더 큰 범주로서의 위상을 고민하고 정립해야 한다. 대학을 중심으로 편성된 에너지가 다양한 역량을 가진 전문가의 조직으로 변화될 때 무용이 대중과 밀접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전문적인 각자의 역량을 인정하고 발휘할 수 있는 무용계의 성찰이 간절히 요구되는 시기임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4차 산업이 새로운 범주로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용계도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야 하고, 그들이 가진 역량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무용 생태계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

내부적인 권력, 외부적인 권력이 연계되어 소수가 풍요롭지만, 구성원의 대다수가 힘든 상황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춤 잘 추고, 춤 잘 만들고, 춤을 잘 가르치고, 춤에 관해 명확한 이론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설 자리가 많을 때 무용계는 자신을 넘어 대중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늘 진심인 많은 무용가가 행복한 생태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글·김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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