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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희의 문화톡톡] 윤리와 도덕 사이의 좀비
[한유희의 문화톡톡] 윤리와 도덕 사이의 좀비
  • 한유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3.12.20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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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 현실을 담아내는 웹툰 읽기] 5
이윤창,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

 

-본 글은 웹툰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생존한 좀비가 있다. 바로 당신의 딸이다. 아니 딸이었던 좀비다. 딸과 좀비는 공존할 수 있는가? 제목부터 윤리적 성찰을 요구하는 ‘좀비딸’은 여러 관점에서 질문과 답변을 요구한다. 왜 다시 좀비인가? 좀비 서사가 끊임없이 범람했음에도 다시 또 돌아온 이유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윤창은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이라는 다소 긴 제목을 통해 웹툰의 내용을 아주 짧게 요약한다. 그러나 완벽하게 요약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안다. 이윤창 스타일의 개그를 통해 돌아온 좀비 서사는 새롭다. 단순히 B급 정서를 담고 있다고만 평가할 수 없다. 물론 정통 좀비물은 더더욱 아니다. 독자 모두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지면서도 심각한 상황에서는 말도 안 되는 개그의 상황으로 모면한다. 그러나 개그는 무거운 질문을 완전히 회피하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제시할 뿐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좀비딸>은 아빠 정환이 좀비가 된 딸 수아를 지키는 이야기이다. 동시에 좀비가 사람처럼 살수 있을까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좀비는 인간에게는 완전한 타자다. 감염되면 자신을 잃고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상태인 좀비는 부패되어 있지만 그 전에는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며 본질적인 경계의 모호함1)을 드러낸다.

이미 좀비의 서사는 두 번의 큰 변화를 맞았다. 제거해야만 하는 공포의 대상이 처음의 좀비 서사였다면 이후 좀비는 환대받아야 하는 타자로 변모하였다. 이윤창은 다른 차원의 좀비 서사를 진행한다. 이는 좀비 서사 3.0일 수도 혹은 2-1일 수도 있다. 야생동물처럼 여기면서 재사회화를 진행하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끊임없이 도덕적인 고민을 지속하게 만드는 것 또한 특이점이다. 포기할 수도 없는 존재가 좀비가 되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의 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병원에서 좀비가 된 아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엄마와, 아이여도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여 총을 쏘는 경찰관, 의사의 직업의식으로 아이를 진료하는 의사와 간호사가 나오는 에피소드와 대통령이 좀비를 사살해도 좋다는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회차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댓글에서 민폐와 공감의 입장으로 나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작가는 절대로 선언적인 도덕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과 국가, 감염과 생존 속에서 우리는 가치를 재확인한다.

<좀비딸>은 분명 심각한 내용이지만 끊임없이 웃을 수 있는 웹툰이다. 웃을 수 있지만, 그 웃음은 절대 가볍지만은 않다. 고양이가 사람보다 더 강하고, 할머니는 효자손만 있으면 좀비도 제압할 수 있다. 좀비 서사에 이런 비현실적인 요소가 더해지면서 오히려 <좀비딸>은 생동감을 얻게 된다. ‘좀비’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어쩌면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고, 좀비가 되기 전의 존재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존재로 고민하게 된다. 따라서 좀비는 인간을 위협하면서 동시에 인간적 요소를 지니고 있고, 다시 사람으로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하게 된다. 

최대한 신파적 요소를 제거하는 현상-개그-현상-개그의 병치는 일반적 좀비물과는 다른 방식을 전개한다. 물론 모든 에피소드들은 ‘딸’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에피소드 전반에서 모든 것을 다 바친 ‘희생’으로만 비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당한 선을 그어 놓았다. 개그 코드는 바로 신파적 요소를 감소시키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윤창 작품의 전반적인 개그들은 이전의 상황들을 일시 정지시킨다. 따라서 감정 또한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갈 수 없다. 좀비가 된 딸과 차를 타고 시골로 내려가면서 서서히 좀비가 되어가는 에피소드는 인간성 상실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직면해 있는 결정적 장면이다. 그러나 아빠가 좀비딸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으로 후드 티셔츠의 모자를 이용하여 물지 못하게 하는 모습이 연속되며 독자들은 하나의 감정선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가장 위태롭고 두려운 순간이 쉽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환이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다 망가져서 쓸 수 없게 된 차가 부녀의 상황 자체를 드러낸다.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한 차와 치료가 가능한지도 모르는 불치의 좀비가 된 딸 수아는 같은 처지다. 그들이 향한 곳은 또 다시 가족이다.

 

포기할 수 없는 '사람'

<좀비딸>은 결국 좀비인 수아를 포기하지 못하는 정환의 선택에 의해서 서사가 진행된다. 수아는 분명 좀비임에도 ‘사람’의 면모를 보인다. <좀비딸>에서 좀비가 재사회화의 과정에 놓여있는 것은 작가가 좀비라는 존재를 ‘감염’ 상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 안에서 좀비는 단순히 사살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님을 내비친다. 물론 좀비가 ‘사람’처럼 생각하고 상황을 판단하는 최소한의 지능을 가진 부분은 개그와 뒤섞여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수아는 점점 학교라는 사회에서 버티고 있는 부분,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울해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식욕 충동이 일어날 때 사람이 아닌 닭을 선택한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욕구를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를통해 지속적으로 좀비를 완전한 괴물이 아닌 병에 걸려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좀비가 완벽한 괴물이 아닐 때는 좀비를 단순하게 제거할 수 없다. 괴물이 아닌 감염되어 버린 환자가 되기도 하고, 소외된 자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설정은 정환이 수아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필연적 인과성을 드러낸다. 자신의 딸이 좀비가 되자마자 죽인 백 이장과의 대비되는 장면은 독자들에게 윤리적 선택을 다시 촉구한다. -물론 백 이장은 자신의 체면으로 딸을 죽이지만- 결론적으로 마을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백 이장의 “그건 딸이 아니다. 아니여야만 한다.”는 말은 반대로 딸이 좀비와 딸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 그 후 백 이장이 수아의 존재를 모른 척 하고, 딸의 무덤에서 회환에 젖는 장면을 통해 작가는 우회적으로 좀비가 ‘딸’로 남을 수 있는 긍정성을 내비친다.

사회화라는 이름 아래 정환이 수아를 학교로 보내는 과정은 어쩌면 아빠로서의 욕심일 수 있다. 아마 수아가 앞으로 겪을 많은 사건들은 개인의 자유보다 더 큰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서 끊임없이 문제가 될 것이다. 수아가 좀비의 본능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겨우 안정을 찾은 사회는 다시 혼란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정환은 그저 수아를 ‘믿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마지 장애를 지닌 자식을 돌보는 방식으로밖에 수아를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아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를 감염시킬 수 있는 폭탄이다.

 

윤리적인 동거의 가능성

도덕적으로는 분명히 불가능한 공존이다. 감염이란 결국 배제와 제거라는 단호한 방법으로 끊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염될 가능성만 있어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말살시켜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것이 공공의 도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딸’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좀비는 윤리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여전히 이전의 딸 수아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비난 속에서도 딸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정환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좀비딸> 내내 정환의 선택들은 사회의 질서와 대척되거나 허락되지 않는다. 사회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딸을 위해서(재사회화라는 명목으로) 범법, 심지어는 살인까지 하게 되는 정환의 존재는 웹툰 내내 도덕과 윤리 사이를 배회한다. 결국 정환은 이지가 있는 좀비로, 딸을 지키고 목숨을 잃게 된다. 정환의 죽음은 단순하게 '좀비가 되어가는 자'의 죽음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좀비 바이러스의 치료제가 되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면역력을 갖게된 정환의 피는 결국 정환이 그토록 바랐던 인간 수아를 '재'탄생시킨다. 도덕을 뛰어넘는 윤리적 사랑을 통해 정환은 온전한 가족을 꾸리게 된 것이다. 

정환이 떠난 후, 숨겨두었던 수많은 좀비들이 사회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들이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좀비라는 것을 알지만, 그 누구도 나의 가족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기에. 결국 진정으로 좀비가 되지 않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을 혼자 두지 않는” 것이다. 좀비와의 불편한 동거가 납득되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글 · 한유희
문화평론가. 제 15회<쿨투라> 웹툰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21년 만화평론 공모전 우수상 수상. 경희대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으로 웹툰과 팬덤을 연구하고 있다.


(1)송현희, 「좀비, 본능(食)에서 자기 인식(識)으로서의 변화」, 동서비교문학저널 48호,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2019, 128-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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