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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문화톡톡]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
[김정희의 문화톡톡]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
  • 김정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3.12.27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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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가련하여 하루살이 같은지라.

아니 놀고 무엇하리!

영웅호걸사도 북망산 티끌 되고,

역대 왕후 부귀공명 세상사 후리치고,

행장 수습하여 금강산 구경 가세!

 

금강산유산록(金剛山遊山錄)중에서.

 

인증샷에 진심인 사람들

어디를 가나 사람들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다. 사람들은 휴대폰를 말 그대로 들고 다니는 전화로서가 아니라 카메라의 용도로 더 많이 사용한다. 누구라도 쉽게 어디서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언제든 확인할 수 있으니 사람들은 일단 찍고 본다. 강의 중에 화면이나 칠판에 있는 내용을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것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강의 내용처럼 기억해야 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먹는 음식, 여행지... 눈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증샷이라는 이름으로 촬영한다. 인증샷에 진심이라서 촬영 후 즉시 확인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찍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산타할아버지 방문 인증샷 앱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인증샷을 찍다가 사망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만 인증샷에 진심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인증샷은 휴대폰의 등장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조선 후기 문인들이 금강산으로 산수 유람을 한 후 남긴 금강산 기행문과 그림들에 비하면 지금의 인증샷 열풍은

귀엽게 느껴질 정도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여행은 경비와 시간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서 조선시대 양반이라 하더라도 금강산 유람을 쉽게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당시는 한양 인왕산에도 호랑이가 등장하던 시절이었고, 험난한 산을 오르는 일도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금강산의 핫스팟을 찾아 기행문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그리게 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원통암  금강산도권     국립중앙박물관
원통암 금강산도권 국립중앙박물관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 갑자기 기이하고 장엄하니

내 마음도 우쭐거려져 어제와 다름을 느끼겠노라.

대개 사람의 마음이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알겠도다.

 

김창협 동유기(東遊記)」 『농암집23권

 

세계기록유산 왕의 일기

우리나라가 인증샷과 기록에 진심인 증거는 기록유산을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은 2023년 등재기준 세계기록유산 494건 중에서 18건이나 된다. 18이라는 숫자가 많아 보이지 않지만,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 순으로 독일 24건, 영국 22건, 폴란드 18건, 네덜란드 17건, 오스트리아 16건, 러시아·프랑스 14건, 중국이 13건 등으로 우리나라는 폴란드와 함께 3번째이다. 북한도 무예도보통지와 혼천전도 2건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유산 중에는 왕의 일기와 관련된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과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등 일기가 4건이나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사후 사초를 모아 실록을 편찬하고 정초본 외에 활자로 3부를 더 인쇄한 후 사고에 만들어 보관했다.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에 보관했던 실록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는데 전쟁이 끝나자마자 피해 복구보다도 먼저 했던 일이 실록부터 다시 인쇄하는 것이었다.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서 주로 기록과 편집을 담당하는 주서(注書)가 출납한 다양한 문서와 어전에 입시하여 기록한 것을 날짜별로 정리해 놓은 기록물이다.

조선 초부터 기록하였지만 지금은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순조 4)까지 288년 동안의 기록이 남아 있다. 총 2억 4,250만자로 단일 서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궁궐 화재 등으로 일부 소실되어, 현재 남아 있는 책 중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1722년부터 1850년까지 129년간 1,974권의 기록이고 나머지는 개수한 것이다. 1994년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2048년도에 완간 예정이다.

국왕 개인과 국정에 대한 일기 『일성록』은 1760년(영조 36)에서 1910년까지 151년간 매일의 기록으로 2,327책이나 된다. 지금 영조 8책, 정조 185책이 번역되어 있다.

 

© 김정희
© 김정희

 

91년 동안의 일기 『경산일록』

 

이것은 영의정 정공 휘 원용께서 정조 계묘년(1783)부터 고종 계유년(1873)까지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 중대한 일과 사소한 일을 기록하신 것이다. 어떤 것은 상세하고 어떤 것은 간략하지만 일상에서 눈과 귀로 몸소 경험하신 사실이다. 국가의 당시 일이 때로 사적의 밖에서 나오기도 하였으므로 살아 계실 적에 옮겨 적어 17책을 만들고 직접 쓰고 검토하여서 후세에 전하신 것이다.”
 

증손 인보가 기록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쓴 일기인 『경산일록』은 경산 정원용(1783~1873)이 정조· 순조·헌종·철종· 고종에 걸쳐 91년 동안 기록한 일기이다. 『경산일록』은 저자가 말년에 직접 정리한 초고본으로 17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기는 태어난 날부터 시작되는데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때는 아마도 1803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73년 1월 2일 담체와 오한 증상이 있어 약을 지어먹고 다음날인 1873년 1월 3일 세상을 떠났는데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일기를 썼다.

정원용뿐만 아니라 아들 정기세(1814~1884) 1831년~1883년간의 일기 『일록』, 손자 정범조, (1833~1898) 1859년~1897년 『일록』, 증손자 정인승 4대가 115년 동안 기록한 연 192년 동안의 일기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187313일 마지막 날의 일기
 

인삼과 귤즙, 산삼 3전 귤껍질 5분에 죽력 세 숟가락을 조리하여 복용하였다. 새벽부터 목구멍에 가래가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앉으면 조금 내려가고 누우면 목구멍의 가래소리가 약하게 났다. 또 마음이 어지럽고 한기와 열이 약하게 왔다 갔다 했다. 정초인지라 여러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만나보고 술을 대접하였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불도 못 때는 가난한 집 사람들은 이 같은 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제술관을 사양하는 차자를 써서 바로 녹사를 시켜 제출하도록 하였다. 매번 병이 나면 정말 걱정이 되었다.(...) 밥과 탕을 숟가락으로 뜰 때에 손이 떨리는 증세가 있어서 물어보았더니, 의원이 이런 증세는 처음 나타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소변이 계속해서 나왔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시험 삼아 조금 걸으면 좋아졌다.

삶의 마지막 날에도 집으로 찾아온 손님 접대를 하고, 추운 날 불을 때지 못하는 가난한 백성을 걱정하며, 행정업무를 처리하고, 병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인상적이다.

 

살아남을 결심

전쟁과 죽음 앞에서 이어지는 일상을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묵재일기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정희
묵재일기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정희

 

쇄미록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의 『쇄미록』은 오희문(1539~1613)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9년 3개월 동안 기록한 일기이다. 오희문은 남쪽으로 여행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졌다. 1년 만에 겨우 가족들을 만났지만 난을 피해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로 옮겨 다니다가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그동안 큰딸, 작은딸, 막내아들이 혼례를 올렸고, 막내딸은 죽었으며, 큰아들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병자일기

『병자일기』는 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시북 남이웅(1575~1648)의 부인 남평 조씨가 1636년(병자년 인조 14) 12월부터 1640년(경진년 인조 18)8월까지 4년 가까이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고 기록한 일기이다.

 

1637년 인조 15117
 

아침에 바닷가에 내려 대()를 가리고 지어간 찬밥을 일행이 몇 숟갈씩 나누어 먹었다. (...)

생대잎으로 바닥을 깔고 대잎으로 지붕을 이어 세 댁의 내행차 열네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지내고 종들은 대나무를 베어 움막을 지어 의지하고 지내나 물이 없는 무인도라. 대나무 수풀에 가서 눈을 긁어모아 녹여서 먹었다.(...)

양식을 찧어 날라다가 바닷물에다 한번 대충 씻어 밥을 해 먹었다.(...) 피란 온 사람들이 모두들 거룻배로 나가 물을 길어오나 우리 행차는 거룻배도 없고 그릇도 없으니 한 그릇의 물도 얻어먹지 못하고 밤낮으로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싶을 뿐이었다. 마음속으로 참으며 날을 보내니 살아 있을 날이 얼마나 되랴. 그래도 질긴 것이 사람 목숨이니 알지 못할 일이다. 한 번에 자식을 다 없애고 참혹하여 서러워하더니 지금은 다 잊고 다만 남한산성을 생각하는가?


1월 17일이면 현재 양력으로 2월 중순 정도가 되는데 댓잎으로 지붕을 이어 만든 숙소가 얼마나 추웠을까. 물이 없어서 바닷물에 대충 씻어 만든 밥은 배부르게 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 번에 자식을 잃고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갈 결심

전쟁 앞에서, 남편과 아들의 죽음 앞에서, 끝도 보이지 않는 과거시험 준비 앞에서

왜 이렇듯 일기를 남겼을까. 일기를 쓴다고 삶이 달라졌을까.

아마도 일기를 쓰면서 주어진 삶과 일상에 감사하고 남김없이 정성을 다해 살아갈 결심을 다짐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시대와 상황은 다를지라도 2024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우리들도  살아갈 결심을 해야겠다. 일기를 써야겠다. 

 

이렇게 일기를 씀으로써 저 하늘이 나에게 정해준 목숨을 끝까지

남김없이 살며 하나도 폐기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유만주 흠영1775

 

 

글·김정희(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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