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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좋은' 불평등은 없다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좋은' 불평등은 없다
  • 한성안 | 경제학자
  • 승인 2024.01.1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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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가 왜 불평등을 조장하는가?

보수는 무엇이며, 진보란 무엇인가?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을 가르는 기준은 사실 복잡하지만 경제학만 두고 보면, 보수는 자유를 지지하고, 진보는 평등을 경제학의 연구목적으로 삼는다. 예컨대, 경제학에서 진보의 초석을 놓은 마르크스경제학이 평등한 사회를 지향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와 약간 다르긴 하지만 비주류경제학을 대표하는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과 제도경제학도 평등사회를 지향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마르크스경제학과 달리 ‘분배’를 통해 평등을 이뤄내고자 한다. 이처럼 경제학에서 진보진영이 평등을 지향하는 건 분명하다. 평등을 지향하니, 진보경제학자들 사이에 불평등이 척결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하리라!

보수경제학자들은 불평등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들에 따르면 인간의 능력과 노력은 본래 불평등하다. 자본주의 시장은 그 자연적 불평등을 가장 정의롭게(!) 구현해 주는 경제체제다. 더욱이 그것은 불평등을 통해 성장한다. 다른 조건이 일정한 한, 자본축적은 저임금, 곧 노동에 대한 불평등 분배를 통해 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경제학자들에게 불평등은 자연스러우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찬양된다. 이와 같이 그들에게 불평등은 정의로우며 성장의 원동력이다. 보수경제학자들에게 불평등은 본질적으로 좋다! 더욱이 좋고 나쁘고를 가릴 필요조차 없다. 보수경제학자들에게 ‘모든’ 불평등은 좋다.

 

진보경제학자에게 평등은 본질적이다

그렇다면 진보경제학자들에게 불평등은 왜 척결의 대상이 되는가? 이들에게 불평등은 이미 철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불평등한 세상에 던져 지지만, 모든 인간은 신 앞이든, 법 앞이든 그 자체로 평등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평등하게 대우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권리다! 이들에게 평등은 이처럼 본질적이다. 물론 신이나 자연 등 외부 주체가 이런 본질을 부여하진 않았다. 오히려 평등은 인류의 수십만 년 역사에서 진화했다. 평등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종의 역사 가운데 90% 이상을 차지하는 수렵 채집 사회는 유지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은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의 데이비드 에르달과 앤드루 화이튼 교수에 의해 입증된 바 있다.

「인간 진화에서 평등주의와 마키아벨리즘」(1996)이라는 논문에서 이들은 네 개 대륙에 흩어져 있는 24개 수렵 채집 사회들에 관한 100여 개의 기록을 수집해, 평등에 대한 증거들을 검토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수렵 채집 사회에서 “평등주의적 행위는 가장 보편적으로 기록된 개념 가운데 하나다. ..... 이들 사회에서는 사회적 위계질서가 없으며, 상호 교환의 범위나 친족의 범위를 넘어서 자원을 공유한다. 물론 때때로 특정 개인이 자원을 더 많이 차지하려 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의 저지나 저항으로 무산된다.” 이런 사회들은 “영장류의 진화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규모의 공유, 협력, 평등주의”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진화의 역사는 우리 종의 심리구조를 형성하고, 뇌세포에 ‘프로그래밍’되었던 것이다.

진보경제학자들에게 평등은 본질적이어서 자연스럽다. 반면 불평등은 비본질적이며 부자연스럽다. 그것은 기껏해야 고대사회에서 비로소 싹트기 시작했을 뿐이다. 1만 년도 채 안 되니 불평등의 역사는 우리 종의 전체 역사 중 10%에도 못 미친다. 진보경제학자라면 본질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못한 불평등을 굳이 좋아해 가면서 옹호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불평등은 역겨운 사회적 효과를 낳는다

오히려 진보경제학자들은 불평등을 혐오한다. 왜 그럴까? 우리에겐 당연한데도, 보수경제학자들이 워낙 찬양하고 있으니 하나씩 짚어 줄 필요가 있다. 경제적인 측면만 볼 때도 불평등은 역겹다. 먼저,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하면 사회의 한편에서 절대적 빈곤이 창궐하게 된다. 절대적 빈곤은 영양결핍, 불안한 주거, 불결한 환경을 수반한다. 그것은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질병의 원인이 된다.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결코 아름다운 건 아니다. 그건 인권을 훼손한다.

경제적 불평등은 경제적 차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영역’에서 역겨운 형태로 새롭게 등장한다.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낮은 지위에 처한 사람들은 쉽게 모욕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또, 불평등한 관계는 ‘사회적 단절’을 유발한다. 불평등한 관계에서 진정한 소통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친구란 없다. 사회적 연결망이 허술해지면 공동체에 대한 ‘참여’가 줄게 된다. 이처럼 불평등이 만연한 곳에서는 모욕, 멸시, 단절, 고립이 일상화된다.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사회적 관계의 질’도 나쁘다. 사회적 관계의 질은 통상 신뢰와 협력, 친분관계의 크기로 측정된다.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서로 신뢰하며 협력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불평등의 이런 ‘사회적’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효과는 사실 경제적 효과보다 훨씬 강력하다.

사회적 효과가 그걸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오히려 그 효과는 아주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2008, 후마니타스)는 불평등이 야기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주는 책이다. 저자 윌킨슨은 먼저 경제적 불평등으로 시작해, 그것이 낳는 ‘사회적 효과’를 잘 정리해 준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사회적 효과가 심리와 생리구조에 영향을 미쳐 건강을 악화시키며, 급기야 사망률이 증가하는 경로까지도 밝혀 주는 점에 있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2008, 후마니타스)
『평등해야 건강하다』(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2008, 후마니타스)

총체적으로 볼 때, “낮은 임금이나 실업과 같은 경제적 요인들은 우리가 예상하는 바처럼 건강을 직접적으로 악화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요소들은 임금이 적고 직업이 없어서 사회적으로 조롱받고 멸시당하고 있다는 느낌, 혹은 분노를 느끼거나 무시를 당해서 수치스러운 느낌처럼 심리사회적 스트레스를 중간 경로로 해서 건강을 간접적으로 악화시킨다.”(p.80)

경제적 불평등이 야기하는 사회적 효과 가운데 몇 가지만 이 책에서 확인해 보자. 먼저, 불평등하면 ‘사회적 자본’이 감소한다. 사회적 자본의 규모는 신뢰, 협력, 정치참여 등으로 측정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퍼트남이 『혼자 볼링하기』에서 미국 50개 주의 자료를 정리한 도표에 따르면, “주민들이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정도가 낮은 지역들, 곧 퍼트남에 따르면 소득 불평등이 큰 지역들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보다 공동체 참여에 소극적이었다.”(p.207) 왜 그럴까? 소득격차가 커,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리한 지역일수록 사회적 편견이 뚜렷하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 결사체의 요직들이 자신을 위한 자리가 아니며, 그런 모임에 참여했다가는 바보가 되거나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고민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동창회에 못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불평등하면 자존감을 잃는다.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경험한다. 내가 너무 뚱뚱하고 지루하거나, 촌스럽고 우둔해 보이는 것은 아닐까 근심하면서 사회적 공간에서 살아간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소수자 집단에 속한다는 사실이 이런 근심을 더욱 증폭시키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곧잘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거나 무시당했다고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스스로 가치 없다고 느낄 때, 자존감은 사라져 버린다.”(p.207) 간단히 말해 살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불평등은 질병과 죽음을 낳는다

사회적 효과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회적 요인들은 ‘피부 아래까지 침투해서’ 육체적 건강과 수명에도 마수를 뻗치게 되는데, 그로 인해 유병률과 사망률이 치솟는다. 먼저, 불평등은 질병을 낳는다. 최빈국을 제외한 대다수 사회에서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 세균성 질병의 위세는 많이 꺾였다. 대신, 고립, 배제, 멸시, 심리적 폭력 등 사회적 거리와 권력 격차가 낳은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과 더불어 알콜 및 마약중독 등 ‘비세균성, 비전염성’ 질병이 창궐(!)하고 있다. “만성 스트레스는 수많은 질병에 취약하게 해 심혈관계나 면역 체계를 포함한 생리적 체계에 악영향을 미친다. .... 심리사회적 요인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력은 흡연, 음주, 약물남용, 스트레스성 폭식처럼 건강에 안 좋은 생활습관들이 더 자주 발견되고, 퇴행성 질환이 일찍 발생하는 선진국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 스트레스는 사람들을 전문의약품이나 (담배나 술처럼) 기분전환용 약물에 의존하게 하며, 우울증, 불안, 불행, 혐오감, 소외감, 불안정, 통제력의 상실과 같은 증상을 일으킨다.”(p.26)

이런 유형의 질병은 높은 사망률로 이어진다.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부유하며, 1인당 지출되는 의료비도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미국의 기대수명은 전 세계 국가들 가운데 25위에 불과하며, 선진국만 비교했을 때에도 미국의 기대수명은 가장 낮다. 왜 미국인들의 건강 수준이 제일 나쁜지를 말해 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바로 미국이 선진국 가운데 가장 불평등이 심하다는 점이다.”(p.124)

불평등은 또 폭력을 유발한다. “지위와 존중은 사회가 불평등할 때 더 큰 문제가 된다. 소득격차가 커질수록, 더 많은 하층민이 재산, 직장, 집, 자가용 등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자 타인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재화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또한 이들은 이것들을 못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깔보고 열등하게 취급한다고 느끼면서 타인의 행동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방어하기 위해 싸움에 뛰어들게 된다.”(p.175)

그 결과, 불평등은 살인율을 높인다. “미국 50개 주와 캐나다 10개 주를 비교한 Daly et al.(2001)에 따르면 소득불평등 수준에 따라 지역별 살인이 최소한 열 배가 차이가 나고 있다. 이 연구가 보여 주는 차이는 단순히 미국과 캐나다만의 차이가 아니다. 이 연구에서 살인율에 차이가 나는 이유 가운데 약 50%는 각 주의 불평등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p.64)

하나만 더 보자. 린치(Lynch et al. 1998)는 282개 미국 대도시의 자료를 비교해 보았다. “가장 가난한 도시들이 사망률이 높은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놀랄 만한 점은 (소득이 가장 높지만) 가장 불평등한 도시들이(895.5), (소득이 가장 낮지만) 가장 평등한 도시들(786.9)보다 사망률이 더 높다는 점이다.”(p.130) 다 잘 살아도 불평등이 심하면, 더 많이 죽는다. 죽음보다 더 불행한 게 있을까?

 

자료: 『평등해야 건강하다』(p.129)
자료: 『평등해야 건강하다』(p.129)

이 밖에도 높은 이혼율, 높은 자살률, 그리고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 등 불평등이 낳는 부정적 결과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장시간노동과 높은 산재사망률도 불평등의 산물이다. 불평등이 유발하는 사회적, 심리적, 불건강 효과를 상쇄하기 위해 더 많이 일하고, 더 위험한 일을, 더 빠르게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불평등은 나쁘다

불평등이 유발하는 것치고 나쁘지 않은 게 없다. ‘좋은’ 불평등이 들어설 여지가 어느 곳에도 없다는 말이다. 모든 불평등은 나쁘다! 불가피해 견뎌내야 할 불평등은 있을지언정 진보경제학자들에게 좋은 불평등은 없다! 그건 좋은 살인, 좋은 폭력, 좋은 갑질, 좋은 암, 좋은 침략, 그리고 한때 서구인들이 찬양했던 좋은 제국주의와 같은 말이다. 이완용의 ‘좋은’ 매국과 일제의 ‘좋은’ 한일합병, 곧 식민지근대화론도 같은 맥락이리라.

최근 좋은 불평등이란 용어가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다. 최병천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만든 신조어란다. 보수진영이 무척 좋아할 말이라 그쪽에서 환영받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민주당을 비롯해 일부 진보진영도 거기에 환호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어이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진보경제학자들에게 좋은 불평등은 없다! 옆에서 아내가 한 마디 걸친다. “그거 불평등을 조장하는 말 아냐? 평소 당신 말로 따져보면 그분은 보수네!”

 

 


글 · 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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