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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묶은 백남준, 목에 매단 박이소
손에 묶은 백남준, 목에 매단 박이소
  • 방혜진 | 예술평론가
  • 승인 2009.06.04 13:39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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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이 등 뒤로 끌고 간 바이올린은 서구 악기를 희롱하고 전유하는 퍼포먼스였다. 서구의 도구는 텔레비전으로 확장되어 그는 테크놀로지 전반을 재창조하기에 이른다. 반면, 박이소는 목에 매달린 밥솥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과 근심을 끈질기게 묻고 또 물었다. 그것은 그에게 천형이자 밥줄이었고 목숨처럼 절대적인 것이자 버려야 할 무엇이었다.

구도와 포즈가 흡사한 두 장의 사진. 하나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백남준 선생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바이올린을 끈에 묶어 끌고 가는 그의 뒷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작가 박이소의 모습으로, 밥솥을 줄에 연결해 목에 매단 채 걸어가고 있는 역시 뒷모습이다. <땅에 끌리는 바이올린>(1975)이라는 제목이 붙은 백남준의 사진과 1984년 박이소가 벌인 퍼포먼스의 기록사진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는 한국 현대미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의 서로 다른 역할을 암시하며 예견한다. 이 두 장의 사진에 대한 더 자세한 얘기에 앞서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

 

홀수해의 6월이 되면 미술인들의 관심은 베니스로 향한다. 바로 올해로 53회를 맞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는 까닭이다. 이 미술 축제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양가적일 것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권위 있는 미술 축제의 장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은 지극히 서구 중심적인 미술 역사를 재확인시켜주며, 진정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기보다는 이미 명성을 확립한 거장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권력 구도의 현장이기도 하다. 더구나, 지극히 사적인 창조성이 보장되어야 할 예술이 무슨 국가 대항전이라도 되는 양 나라별로 ‘국가관’을 꾸리게끔 만든 체제는 특정 미술 사조를 강화시키고 상업주의와 결탁하게 만든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반대가 그렇다고 이 미술 축제의 의의와 매력을 뿌리째 부정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나아가, 더 협소하게는, 우리에게도 ‘한국관’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어떤 안도감을 없애진 못한다.

권력구도에서 벗어나 당대성 획득

올해 한국관 작가는 양혜규이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잘 알려진 그녀의 작업은 흔히 전통적 도상이라든가 포스트 식민주의적 요소를 작품의 모티브로 삼지 않는다. 아무런 설명 없이 그녀의 작품을 대면했을 때 관객들은 그것이 한국 여성작가의 작품이라는 단서를 얻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작품을 ‘정체성’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양혜규 같은 젊은 작가들의 존재는 이제 우리 미술이 서구의 이국적 취향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으로 승부하지 않고도 충분히 정체성을 논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돌이켜보면, 한국 미술의 역사가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대성을 획득하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예컨대 백남준 선생이 국제적 인맥과 미술계 파워를 활용해 한국관 건립을 이뤄낸 1995년 당시만 해도, 실상 우리나라에서 세계 컨템퍼러리 미술을 호흡하고 더불어 사유하는 풍토란 낯설었다.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 사이 적지 않은 작가와 관객들이 동시대적 안목과 문제의식으로 미술을 바라보게 된 데에는, 앞서 두 사진 속 인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백남준의 업적은 작품 안팎에 걸쳐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하고 중하지만, 여기서는 비교적 대중에게 잘 알려진 백남준 대신, 일반인들에게 덜 알려진, 그러나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실질적으로 재편해놓은 박이소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마침, 지난 2004년 만 4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친 그를 기리는 추모 5주기 행사가 얼마 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참이다.

위의 박이소 사진은 그가 작가로서 첫걸음을 내디딘 퍼포먼스의 기록사진이다. 1984년 미국 유학 시절, 추수감사절 자선행사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저녁식사에 참석한 박이소는 사흘간 단식한 후 검은 밥솥을 만들어 긴 줄로 자신의 목에 매달고서 브루클린 다리를 건넜다. 이 자학적이고 수도자적인 퍼포먼스는 이후 전개될 박이소의 삶과 작품을 압축적으로 예시하는데, 한마디로 그의 행보는 정체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해 그 정체성을 지우고 새로 쓰는 작업이었다. 그에게 정체성이라는 문제는 일신상의 명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부정하고 비워내는 과정을 통해 근본에 다다르려는 구도자적 여정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가 미국에서 처음 작가로 나설 당시 ‘박철호’라는 본명을 버리고 ‘박모’(박아무개의 뜻)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마이너가 되어 주류문화 비판

 그의 독특한 위상은 그가 비단 한 예술가로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문화운동가이자 비평가로서 또한 교육자이자 정신적 지도자로서 걸출한 업적을 남긴 것으로 설명된다. 먼저 그는 1980년대 중·후반 브루클린의 창고를 빌려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라는 비영리 대안공간을 운영한다. 이 공간을 통해 그는 스튜디오와 갤러리에 종속된 작가에서 벗어나, 지역 공동체와 교류하고 사회 속에서 함께 고민하는 대화의 장을 일궈냈다. 백인 중심의 서구사회에서 스스로 ‘마이너’가 됨으로써 주류 문화를 비판한 그의 행적은 한창 다문화주의가 휩쓸던 뉴욕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그러나 어쩌면 이제 스타 작가로서 안정된 활동이 보장될 무렵에, 불현듯 그는 귀국을 결정한다. 아울러 그는 이름을 박모에서 다시 박이소로 바꾸며 새로이 자신을 비워내기 시작한다.

물론 그가 ‘박철호’ 대신 ‘박모’로, 다시금 ‘박이소’로, 이름을 바꿔나간 것은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브인 언어유희와도 관련된다. 그는 늘 기의와 기표, 지시대상과 기호 간의 간극에 주목하고 이를 탐구했다. 실제로 그의 등장으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맞은 국내 미술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새로운 풍경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미술이 언어와 개념의 문제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박이소와 더불어 더 이상 미술은 그저 눈을 만족시키고 마음으로 ‘느끼는’ 대상이 아니게 된다. 그는 국내 최초로 개념미술을 도입했으며, 서구인들의 입맛에 맞는 동양적 도상들을 거둬들이는 가운데 서구 중심의 문화를 비판했다. 예컨대 베니스 비엔날레와 관련해서는, 세계 열강 중심의 미술계 권력과 국가관 간의 정체성 경쟁의 허망함을 고발한 <베니스 비엔날레>(1994)를 내놓았으며, 이후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작가로 선정됐을 때는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10선>(2003)을 통해 거대자본이 창의력과 동일시되는 현대미술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자신을 비워내고 구도자의 길로 

그러나 서구의 이론을 국내에 도입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식민지 지식인’으로 전락할 위험에 대한 자각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것은 박이소에게 곧 ‘번역’의 문제로 표출되었다. 사실 그는 이미 미국 체류 시절부터 해외의 포스트모던 미술을 소개하는 글을 쓰거나 이론 서적을 번역 출판함으로써 미술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쳐왔던 바다. 무엇보다 그에게 ‘외국의 문명’을 ‘번역’하는 문제는 곧 ‘정직성’과 연결되었다. 그것은 비판 없이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을 타인의 것으로 직시하는 윤리적 태도였다.

그리하여 빌리 조엘의 노래 <Honesty>를 문자 그대로 ‘정직성’이라고 옮겨 부르는 박이소의 정직한 목소리가 누런 종이 박스에서 울려퍼지는 <정직성>(1998) 앞에서, 우리는 전율한다. 그가 우리에게 어떤 구도자의 모습, 혹은 그의 추모전을 기획했던 이의 표현처럼 파르헤지아스트, 곧 진실의 용기를 수행하는 자로서 다가온다면, 이는 그가 진실과 삶을 묵묵히 결합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처음의 사진. 백남준이 등 뒤로 끌고 간 바이올린은 음악가에서 출발한 그가 첼로와 피아노 같은 서구 악기를 희롱하고 전유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명성을 확립했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구의 도구는 텔레비전으로 확장되어 결국 그는 테크놀로지 전반을 재창조하기에 이른다.

반면, 박이소는 우리의 목에 매달린 우리의 정체성과 근심을 끈질기게 묻고 또 물었다. 그것은 그에게 천형이자 밥줄이었고 목숨처럼 절대적인 것이자 버려야 할 무엇이었다. 그 끈질긴 질문과 비움이 오늘날 미술을 결코 과거에 안주할 수 없는 것으로, 적어도 안주함에 부끄러워하도록 벼리고 다독인다.

글ㆍ방혜진
서울대학교 미학과 대학원을 나와 대학에서 영상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시각예술 전반에 걸친 글쓰기를 하고 있다. <한국의 디자인 02 :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 <로베르토 로셀리니> 등의 공동 저자이며 옮긴 책으로는 <장 르느와르>(공역)와 <영화 장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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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09-07-08 20:59:43
여기 실린 백남준과 박이소 사진은 미술전공 안한 저도 옛날부터 봤던 건데요.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은 다 아는 사진 아닌가요? 더구나 백남준 아트센터에서는 이 두 사진에 대해 어떤 해석도 한 적 없잖습니까. 잡지기사에 실린 글에 이렇게 광분하는거 뭐가 캥기는 거 아닌지

방혜진 2009-07-08 15:49:57
문지윤님은 그 사진을 백남준 개관전때 봤는지 몰라도 미술을 좀 아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출처조차 기억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만약 그 사진의 저작권이 문제된다면 그건 르몽드측에 항의하십시오. 또한 20매짜리 기사에서 축약적 표현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정 그렇다면 큐레이터였던 이영철님에게 제가 공식적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문지윤 2009-07-08 07:51:49
우연히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두 인물의 사진을 어디서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2008년 10월 백남준 개관전 1층에 있었던 전시에서 처음으로 그 두사진이 전시되었습니다.
또한 사진에 대한 크레딧을 밝히지도 않으셨습니다.
또한 다른이로부터 빌려온 개념이라고 모호하게 밣힌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논문을 비롯한 공식적인 글에 대해서 "다른이에 의하면"이라는 크레딧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방혜진 2009-07-02 23:37:42
두 사람을 비교한 전시회가 있어 그 개념을 따른 것이 아니며, 따라서 cm9333님이 말씀하시는 ‘박이소와 백남준을 병치하여 앙상블라주(가 아니라 “앗상블라주”겠지요)를 창조하는 큐레이토리얼 작업’에 대해 밝힐 ‘크레딧’은 없으며, 만약 있다면 그것은 제 자신이 될 것입니다.

방혜진 2009-07-02 23:36:55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못한 일반 독자에게 백남준이라는 거장과의 비교를 통해 박이소를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백남준과 박이소라는 두 인물의 비교는, 우연히도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두 인물의 사진을 통해 제 자신이 생각해낸 아이디어입니다. 사진의 비교도 제 아이디어이며, 그들이 손과 목에 매단 것이 각각 바이올린과 밥솥이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도 온전히 제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