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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켠 촛불] 18. 엄마의 연표에 찍힌 촛불
[바람이 켠 촛불] 18. 엄마의 연표에 찍힌 촛불
  • 지속가능 바람
  • 승인 2016.12.14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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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름의 연표를 만든다면 <1965년>부터 수직선이 시작될 것이다. 아빠와 결혼한 <1991년>까지, 엄마 인생의 딱 절반 되는 점까지는 <광주>가 붙고 그 아래부터는 <서울>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광주서 태어나 자란 광주 사람이고, 중학교 3학년 때 5·18을 경험한 사람이다.


외할아버지는 경찰이었다. 엄마는 광주 북구 풍향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그것도 외할아버지가 그곳 파출소장이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 봄>은 그래서 엄마에게 더욱 무참한 시절이었다. 밤이고 낮이고 시위자들이 경찰 간부 집이라고 풍향동 집 창문에 돌을 던졌다. 여섯 남매는 한동안 바깥 구경을 못 했다. 열여섯 엄마에겐, 신문지로 온 창을 막아놓은 집에서 외할머니가 사흘마다 봐 오는 장으로 살았던 한동안이 일종의 박해 기간이었다.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지만 엄마는 계속 집밖을 나가지 못했다. 광주일대에 계엄군에 의한 학살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가 운영하던 [풍향목욕탕]도 손님이 완전히 끊겨 자연 휴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수년 전부터 엄마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목욕탕 일을 돕던 사내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휴업으로 일이 없어지자 “껄렁껄렁했던 그 오빠”가 “겁도 없이” 밖에 나가 계엄군의 총을 맞고 객사한 것이다. 그것도 실종된 지 좀 돼서 다른 이웃에게 들은 소식이었다. 그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로 5월이 지나갔다. 엄마는 이런 기억을 안고 인생 절반의 <광주>를 지나와 나의 엄마가 되었다.


외할아버지를 일찍 여읜 엄마는, 아빠를 일찍 여읜 딸들에게 하지 말란 것이 정말 많은 엄마였지만 나는 그런 금지를 보통 지키지 않는 딸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더욱 활개를 치며 지진계마냥 수직선에 자잘한 점을 콕콕 찍어내려갔다.


그럼에도 <나>의 연표에 <촛불>이라는 점은 엄마의 영향인지 비교적 늦게 출현했다. <2014년 봄>, 전국 곳곳에서 매주 크고 작은 집회가 열리던 때였다. 기숙사 창의 커튼을 젖히면 캠퍼스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앉아 함께 세월호 영상을 보고, 촛불을 나눠든 사람들이 보였다. 강의동을 향하는 길목의 가로수에 묶어놓은 노란 리본들도 보였다.


지나치기를 여러 번. 큰 용기로 멈춰선 풍경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에게?’였다. 촛불을 건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의 이야기와 달리 <촛불>이라는 점은 별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기 일로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는 그 소소한 불씨가 큰 힘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 나는 엄마의 <광주>를 벗어나 가끔씩 몰래 <촛불>을 찍었다. 학생대오를 따라가며 구호에 따라 목소리를 높이고, 초겨울 전기난로 세기를 올리는 농성장 아주머니들 틈에 껴있기도 했다.


올해 겨울. 식구들이 모이는 토요일마다 목울대에 많은 말이 걸렸다 사라졌다. ‘엄마, 그거 별것 아니던데? 같이 가자.’는 엄마에게 너무 가벼운 제안이지 않나. JTBC 뉴스룸만 계속 틀어놓은 채로 몇 주가 지나갔을까, 박근혜 씨가 3차 대국민 담화를 진행한 그 주 토요일에 드디어 엄마가 입을 열었다. 232만이 모인 날이었다.


“내가 안 가서 저게 안 내려오나 보다. 오늘은 우리도 가보자.”

그리 감동적인 날은 아니었다. 얼떨떨하게 나간 광화문에서 제일 먼저 한 것은 화장실과 현금과 지도로 엄마와 투닥거리는 일이었다. 실랑이가 끝난 뒤에도 엄마는 상상했던 강경한 집회가 아닌 모습이 계속 낯설고 이상하다고 했고 딸은 요즘 시위는 대부분 이렇다며 뒤늦게 아는 체를 했다. 그래도 박 씨의 활약이 꽤나 돋보인 날이었다. 어쨌든 사이좋게 손난로 쥐고 행진했고, 하야가도 불렀고,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길바닥에 앉아 시민발언도 들었으니까. “저 사람은 누구야? 말 되게 못하네.”, “몰라. 빨리 마이크 넘겼으면 좋겠어.”, “다음주에 탄핵 될까?”, “안 되면 또 와야지, 엄마."


모녀의 공식적인 <첫 촛불>은 통인시장에서 막 튀겨낸 호떡을 하나씩 물고 싱거이 막을 내렸다. “하나 더 살까?”, “엄마, 호떡 먹으러 왔어? 그냥 하나씩 사자.” 엄마를 타박하고 호떡을 받아 드니 막차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사이좋게 시장길을 지나 집에 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광주를 지나온 엄마의 <촛불>이 호떡만큼은 가벼워도 좋겠다는 생각, 이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광장은 <2016년 겨울>의 가벼움을 오래 기억할 것이라는 생각.
 

*이 기사는 지속가능 바람 대학생 기자단이 11월 27일부터 매일 연재하는 [바람이 켠 촛불] 기획기사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저항 중인 촛불에 동참합니다. 

 

정윤하 / 바람저널리스트 (http://baram.news / baramy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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