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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브람스와 함께 강남역에서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Frei aber Einsam)”
[안치용의 프롬나드] 브람스와 함께 강남역에서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Frei aber Einsam)”
  • 안치용 기자
  • 승인 2017.02.25 2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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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브람스와 함께 강남역에서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Frei aber Einsam)”

 

봄이 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전히 겨울이라고 단정하기는 경솔한 짓이지 싶다. 갑작스레 나선 밤 마실이 걱정과 달리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봄이 오기는 오려는가 보다. 걸음 사이로 봄의 기운을 호흡할 수 있다.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속하는 강남역 일대를 금요일 밤에 걷는다. 공기 중에는 봄 말고 알코올 기운이 떠돈다.

사람의 물결에 휩쓸려 걷다 보면 의도치 않게 낯선 이들의 대화를 듣는다. 술에 많이 취해서 아무런 맥락 없이 핸드폰에다 지껄이는 소리. 들리기는 잘 들리는데 전혀 독해가 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언어로 이해할까 하는 걱정은 내가 할 걱정이 아니다. 대화가 꼭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전화일망정 금요일 밤에 술에 취해 마음껏 소리 지를 상대가 있다면 좋은 일이다. 말이든 소리든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면 좋은 일이다.

스콜을 데리고 나왔으면 좋았겠다. 개 중에서도 특별히 산책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밤에 혼자 길을 나서면 내 뒤통수를 따갑게 노려본다. 늘 그렇듯 잠시 고민했지만, 이런 인파 속에 이런 몰골로 개까지 끌고 다니면 너무 눈에 띄겠다 싶어 단독 산보를 결심한다. 금요일 밤에 강남역에서 개와 함께 하는 산책은 분명 무리인 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에 조금 걸린다. 개는 나와의 산책을 사랑하지만, 나는 개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반대일까.

인간이든 개이든 무엇인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은 그 자체로 분명 좋은 일이지만, 좋은 일의 진행 속에서는 좋은 일을 모른다는 게 좋은 일의 단점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꼭 그렇지는 않다고 반론하겠지만, 우리 삶에 지혜의 자리는 늘 비어 있고 평소에 우리는 비어있음에 그다지 결핍을 느끼지 못한다.

나쁜 일은 그 자체로 분명 나쁜 일이며, 나쁜 일의 진행 속에서도 나쁜 일임을 잘 안다. 좋은 일이 지나면 대체로 나쁜 일이 오지만, 나쁜 일이 지난다고 좋은 일이 오지는 않는다. 나쁜 일의 장점은 깨어있게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Frei aber Einsam)”. 브람스가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에 붙인 이 악상기호와 흡사하다.

개와 함께 하지 않는 산책은 말하자면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할까? 산책은 언제나 좋은 일일 뿐이다. 개와 함께 하든, 사람과 함께 하든. 혹은 금요일 밤에 강남역을 걷든, 북한산 둘레 길을 월요일 오후에 걷든. 가끔 고독해야 자유롭다. 그러나 고독하다고 늘 자유롭지는 않다. 좋은 일을 중심으로 사고할 때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계기(繼起)하지만, 나쁜 일을 중심으로 사고할 때는 인생이란 예측 불가능한, 그저 변덕일 따름이다. 스콜은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겨울 다음엔 봄이 계기한다.

 

 

글ㆍ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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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 기자
안치용 기자 carmine.draco@gmail.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