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점의 리듬감
점의 리듬감
  • 선정문 ‘점' 이달의 에세이 당선
  • 승인 2017.03.02 16: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더 이상 올곧게 펴지지 않는 허리를 지닌 운명을 횡단보도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기 식대로 시간을 재고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횡단보도에 그려진 하얀 블록 하나를 건너기까지 3초, 자신의 시선이 그 다음 블록에까지 옮겨가는 데 5초... 그녀는 자신을 지나치며 뛰어가는 사람들의 구두 소리와 어린 학생들의 가쁜 숨소리를 선명하게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여러 번 울린 신경질적인 자동차의 경적 소리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녀의 굽은 등은 그녀가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뗄 때마다 미세하게 들썩인다. 그 미약한 굽은 들썩임처럼, 버스 창가에 앉은 나는 나이든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버스 안에는 승객들이 많이 들어 차 있지만 고요하다.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창가에 앉은 승객들도 어쩌면 나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사람들을 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모두의 시선이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집중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적막한 버스 안의 승객 중 하나가 된 듯하다. 길게 늘어진 횡단보도 끝에는 초록색 점이 규칙적으로 번쩍거리고 있다. 그녀의 느린 걸음걸이를 조롱하는 악질적인 방관자처럼, 그녀가 발걸음을 뗄 때마다 약간 더 빠른 템포로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을 뜬다. 나는 잘 보이지 않는 신호등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한참 늦게 횡단보도에 들어서서 전력질주를 한 어린 소년은 그녀를 휙 지나쳐 곧 인도에 다다른다. 소년의 등에서 후줄근하게 흘러내린 책가방은 남색이다. 그녀는 거대한 피아노 한복판의 1/3지점에서 잠시 멈춘다. 그녀는 더 이상 횡단하지 않고 잠시 서있다. 그녀는 허리를 펴서 앞을 보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녀는 온몸의 무게를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에 싣는 듯 보인다. 고약한 신호등은 그녀를 배려하지 않고 그것 보라는 듯 신이 나서 잔망스러운 눈을 더 반짝거린다. 대기선에 가까이 선 차량들은 대개 세 가지 색이다. 흰색, 검은 색 아니면 은색. 차들의 색은 파도처럼 흘러다니는 횡단보도를 연상케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시간은 신비로운 순간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파도는 굳세고 꿀렁거리며 움직일 것이다. 폭발하듯 횡단보도를 점령할 것이다. 다른 파도를 덮치고 또 자신을 덮쳐오는 다른 파도를 기다릴 것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사뿐사뿐 건드렸던 조화로운 피아노의 선율은 끝이 나지 않는 포르티시모로 강렬하게 연주될 것이다. 그녀는 다시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 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걸음은 총 세 단계로 구성된다. 우선 명아주 지팡이를 적당한 거리에 던져 살짝 힘을 싣는다. 그 다음으로 폴리에스테르로 만든 검은색 숄에 감춰진 얇은 팔의 근육을 쓰고, 빠르게 옮길 수 없는 오른발을 들어 하얀 블록 사이의 검은 부분을 밟는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발 역시 아까와 같은 과정을 반복해서 지팡이가 앞서 짚었던 부분 앞으로 상체와 하체 모두를 안전하게 위치시킨다. 로데오거리에서 쇼핑을 하고 빠져나온 사람들의 시선이 빛을 피하는 동물들처럼 빠르게 그녀에게로 집중된다. 그녀에게 앞은 곧 바닥이기 때문에, 시선은 소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리듬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대기선에 있는 차들 중 몇이 살짝 어깨를 앞으로 내세운다. 초록색 점이 곧 바뀔 것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멀다면 멀, 가깝다면 가까울 거리에 있는 차들의 움직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 대의 차들 앞에서 동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지팡이로 같은 속도와 같은 지긋한 힘으로, 자신만의 점을 찍을 뿐이다. 그녀의 지팡이에서 물감이 샌다면 모든 도로에는 짧은 간격으로 초록색 점선이 이어져 있을 것이다. 횡단보도 신호등의 색깔이 바뀐다. 그녀는 아직 반도 채 가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그녀를 기다리기 싫어 재빨리 액셀레이터를 밟는다. 그녀의 모습이 차창으로 사라진다. 우려했던 대로 차에서 운전자가 나와 그녀를 협박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흰색, 검은색, 은색의 파도들은 그저 그녀를 피해갈 뿐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앞을 보며, 보폭이 짧고 느린 발을 지닌 모세가 된 듯하다. 버스가 출발하고 순식간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시선 역시 순식간에 거두어졌을 것이다. 나는 운전석 옆의 천장에 설치된 전자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차창을 바라본다. 저마다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인도 위에 점을 찍고 있다. 똑, 똑. 나는 그녀의 보폭이 만드는 리듬을 상기시키며 손가락으로 앞쪽 의자 등받이를 두드린다.  


글·선정문
동국대학교 국문과 재학 중, 그저 길을 걷다가 어떤 사람이든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그 사람을 둘러싼 어떤 진실을 엿보거나, 내 진실과 맞닿는 때가 있다. 그런 시선을 계속 가지고 글을 쓰고 싶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