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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5주년 맞는 <르디플로> 한국어판에 바란다
창간 15주년 맞는 <르디플로> 한국어판에 바란다
  • 목수정 l 재불 작가
  • 승인 2023.09.2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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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파리 전체가 개기일식을 앞두고 술렁이던 때가 있었다. 일생에 다시 보기 힘든 우주쇼가 펼쳐진다며 언론은 떠들썩하게 나팔을 불었다. 나 역시 그 분위기에 휩쓸려 특수 안경을 사놓고, 개기일식이라는 스펙타클을 관람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날이 다가오자, 아침부터 하늘에는 구름이 두텁게 껴, 그 무엇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일기예보는 곧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고 여전히 장담하고 있었다. 

예정된 그 시간이 다가왔고 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의 시커먼 구름 장막은 움직일 줄 몰랐다. 함께 하늘을 바라보던 이웃은 낙심한 표정으로 “개기일식 구경은 물 건너갔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핸드폰의 일기예보를 보여주면서, 일기예보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며 끝까지 희망을 가질 것을 설파했다. 하늘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명백히 내 눈으로 보면서도, 나는 인터넷을 타고 전해지는 언론의 말을 더 믿고 있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인간은, 적어도 나는 내 눈보다 언론의 말을 더 신뢰한다는 사실을. 내 눈이 하얀 것을 보고 돌아섰음에도 언론이, 그것도 모든 언론이 검은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면, 나의 착각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판이라는 사실을.

그 개기일식에서 일생일대의 우주쇼를 볼 수는 없었지만, 미디어의 노예가 돼있는 나 자신을 자각하는 계기를 얻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나를 비롯한 21세기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감각과 직관, 경험, 거기에서 나오는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21세기까지 진화해 오면서 인류는 무궁무진한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성취를 이뤘지만, 인간 개개인이 가진 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 퇴화해, 각각의 인간은 이전보다 축소된 자아와 능력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도 자각하게 됐다. 하늘과 땅, 동물, 식물과 직접 교류하며 각자의 경험과 지혜를 축적해가던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그들의 모든 활동들을 분업 혹은 아웃소싱하여 돈을 주고 교환하는 패턴으로 살게 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돈을 벌지언정 모든 능력에서 멀어져 가는 특별한 방향으로 진화 혹은 퇴화를 거듭해 온 것이다.

디지털 세상으로 급속히 전환해온 세계에서 가장 크게 본질의 변환을 가져온 영역은 미디어다. 세상사를 널리 전할 뿐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세상사 이면에서 벌어지는 진실을 조명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었던 시대는 디지털의 세기로 진입하며 순식간에 파산했다. 이 새로운 세기는 초월적인 부가 극소수 일부에 집중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부를 거머쥔 자들은 그것을 더 크게 확장하는 방향으로만 진화했고,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스피커가 돼줄 언론들을 쇼핑하듯 주워 담거나, 광고비로 그들을 다스렸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언론인들에게도 생존을 넘어서는 과제는 없다. 그것은 모든 다른 거대명분을 물리치게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였기에 그들은 거리낌 없이 과거의 옷을 벗고 클릭 장사꾼, 권력과 자본의 하수인이라는 새 옷을 걸치게 됐다.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그렇게 오랜 직업윤리를 몸에서 털어낸 미디어계에서 독립 언론의 표상으로 살아남은 희귀동물이었다. 기업 광고 하나 없고, 그 흔한 보도 사진도, 자극적 헤드카피도 없는 이 고고한 비판적 지성의 요람, 전설의 언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파리 13구의 한 한적한 거리에 아담한 마당을 가운데 두고 디귿자 모양으로 둘러서 있는 3층 벽돌 건물이었다. 33개국에서 매월 200만 부를 발행하고 있는 신문의 본산이라기엔 소박했지만,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집의 독립성을 가진 자부심 강한 언론임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그들은 건물 일부를 신문사로 쓰고 나머지 공간은 임대를 하고 있는 소위 ‘건물주’였다. 그들의 집은 너무 크지도 초라하지도 않았고, 적당히 격이 있으면서 검소했다. 넉넉한 빛이 창으로 들어오는 사무실 공간은 구성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기 충분한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나를 건물로 안내해준 기자는 ‘교정 직원들이 일하는 곳’이라며 넓은 방을 보여줬다. 점심시간이라 대부분 자리를 비운 상태였지만, 교정 직원들을 위해 저만한 자리를 할애하는 이 진득하고 성실한 언론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장면이었다. 이들의 건물은, 90년대 출범한 협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친구들>이 소유한 절반의 자본과 함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초기(1954)의 대범한 생각을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지키게 해준 물적 토대다. 공식적으로는 같은 요람에서 태어났으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르몽드>의 언론인들을 전면 저격하는 글이 거리낌 없이 실릴 수 있게 하는 바탕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그것이 미치고 있는 전 세계적 영향, 자유 무역의 생태적, 사회적, 문화적 결과에 대한 비판적 고찰, 지정학적 변화가 가져오고 있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망들을 러시아를 비롯한 33개국의 협력자들과 함께 고찰해 가는, 66개의 눈을 달고 있는 것 같은 이 독보적 언론의 존재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다. 

비슷한 시기, 르몽드 본사에도 간 적이 있다. 보건 독재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간, 편파 보도를 일삼는 거대 언론사들의 횡포를 비난하기 위해 악명높은 주류언론들을 방문 시위하는 시위대가 조직된 적이 있다. 과거 르몽드가 갖던 정론지의 태도 따위 던진 지 오래건만, 여전히 그 사회적 아우라를 유산처럼 달고 사는 르몽드는 시위대가 첫 목적지로 삼은 대표적으로 맛이 간 언론이었고, 나는 그 시위대의 한 사람이었다. 르몽드 그룹이 소유한 6개(르몽드, 텔레라마, 라비, 꾸리에 인터내셔날, 롭스, 허핑턴 포스트) 언론의 1,600명 직원들이 함께 일하는 2만 3,000㎡의 포스트모던한 건물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들만의 견고한 논리 속에서 갇혀버린, 황금 팔찌를 찬 현대 언론 노예의 운명을 찬란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르몽드의 자회사로 출발했고, 지금도 여전히 르몽드 그룹이 절반의 지분을 소유한 자매지다. 그러나 그들은 2020년 세느강변 좌안에 들어선 르몽드 그룹의 이 새 건물에서 다른 동업자들과 함께 빵을 먹지 않고, 한적한 거리, 아담한 건물에 머물러 있다. 이 선택은, 여전히 세상을 바꾸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들에게 독자적 시각으로 신문을 만들어 전하는 그들의 현재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69세라는 초로의 나이에 이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로부터 이제 15세라는 청소년기에 이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은 출발했다. 이 소년에겐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해 더 멀리 항해할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한국어판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색깔을 온전히 간직하는 동시에, 디지털화라는 영역에서 지구촌 최첨단 국가이자 분단국가라는 독특한 정체성 속에 붙잡혀 있는 한국이라는 오묘한 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명해야 하는 사명을 함께 지닌다. 지금까지 한국어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그 역할을 잘 수행해 왔음은, 기업 광고 없는 종이 매체로서 이만큼 성장해온 오늘의 현실이 입증해주는 바다.

20년째 삶을 함께하고 있는 옆지기로 인해 파리의 우리 집 욕실에는 일 년 내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놓여있다. <데크루아상스(Décroissance)>라는 매체와 함께 우리가 구독하는 단 2종의 종이신문이다. 덕분에 나는 프랑스어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기사를 먼저 접하고, 종종 한국어판에서 같은 기사를 만난다. 모국어로 접하는 글은 건너뛰었던 기사를 다시 세세히 만나는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종종 원본에 깃들여 있던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반감된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작가와 번역가라는 두 가지 직업을 오가는 나는, 글을 쓸 때면 원고를 전적으로 주재하는 신의 자아를 장착하지만, 번역을 할 때는 저자의 심장과 뇌를 해부하는 외과의사의 자세가 된다. 외국어로 표현된 작가의 진심을 모국어를 통해 전달하는 일은 반역을 천형으로 삼는 고약한 직업이다. 외과의사가 인간의 신체에 메스를 들어 훼손을 가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것과 같다. 번역자가 지니는 반역의 천형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뇌를 들여다보며 숙고하는 시간을 거치고 난 후에는 기꺼이 메스를 집어들 정당성을 갖게 되며, 그렇게 완성된 번역은 원본의 생명력을 훼손하는 법이 없다. 

즉, 번역이란 작업이 온전히 가치 있는 지적 노동이 될 수 있으려면 그들이 기꺼이 시간을 투자할 노동 조건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오늘날 구축하고 있는 명성은, 그 구성원들 각각의 강건한 기자 정신만으로 완성된 것은 아닌 것처럼. 인공지능이 가장 먼저 대체할 직업은 번역가라고들 하지만, 인공지능은 기계라는 중립 지대의 본질을 잊고 너무도 신속히 인간을 배반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중이기도 하다. AI는 결국 그것을 소유한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설계된, 위험한 물건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여, 번역가라는 직업에 부여된 미션은 여전히 신성하며, 번역가의 뇌 속에 AI 칩이 부착되지 않는 한, 상당히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드라마를 볼 때 종종 엄청난 오역을 범하는 자막을 발견하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오역을 해버린 번역자보다, 오역을 정정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번역자의 척박한 노동 조건을 탓하게 된다. 지적 노동자들의 노동가치는 그들이 영혼을 팔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언제나 저평가돼 왔다. 그 피해는 오역된 드라마를 보며 오해와 혼란을 겪을 시청자에게 전가되며, 거기서 얻어지는 사소한 이득은 자본가의 주머니로 들어갈 뿐이다. 

유년기를 지나, 15세 청소년기에 접어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한국 사회가 간직하고 키워가야 할 중요한 매체로 확고히 성장하기 위해, 나는 번역자들이 충분히 필자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씨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제공해주실 것을 주문하고 싶다.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섬에 갇혀, 국내 미디어가 주입하는 대로 사고하기를 거부하고, 세상을 폭넓게 바라보며, 여전히 그 세상을 함께 바꾸기를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이 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글·목수정
파리에 거주하며, 칼럼 기고와 책 저술, 번역을 하고 있다. 2023년 최근 저작으로 『파리에서 만난 말들』 , 역서로는 『마법은 없었다』 (알렉상드라 앙리옹-코드 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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