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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믿음과 증언에 대하여
[이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믿음과 증언에 대하여
  • 이호(영화평론가)
  • 승인 2018.12.17 1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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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 크리스텐슨, '신의 기적'(2017)

아이들이 전하는 생존자들의 담론

테러리스트가 한 학교를 지배했다. 어떤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이유가 무엇인지는 도통 알 수 없다. 단지 아이들의 몸값을 요구하면서 폭탄이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인질로 잡힌 선생님과 학생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은 위험의 순간,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할 줄 아는 믿음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소 시니컬하게 요약해 보자면 (기도하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전형적인 인과응보식의 이야기이며, 암묵적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흑백논리가 깔려 있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의심과 미심쩍은 눈초리가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는 여러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아이들이 테러리스트의 손에 붙들려 다 몰살당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일까? 상황이 그러할진대 감사를 외치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여기서 증언은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 어떤 생존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성공담론이 증언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 실패를 딛고 일어난 이의 이야기는 유의미하게 들으면서도 실패와 좌절, 추락의 과정에 있거나 그런 과정 중에 놓인 자들의 이야기는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여기서 기독교 오류의 첫 번째 특징을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이들이 전하는 증언(기독교계에서 흔히 일컫는 이른바 간증)은 어떤 장 안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더욱이 이 영화에서의 증언자들은 누군가로부터의 공격, 해를 받은 사람들이다.

배제된 한 사람, 테러리스트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완전히 배제(배척)된 위치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바로 피의자의 자리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테러리스트가 왜 어떤 연유로 범행을 저지르는지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학교의 학생들을 폭탄으로 위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잘못을 면할 수 없지만, 영화의 어떤 장면도 테러리스트의 생각과 마음 상태에 대해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것이 증언의 두 번째 위험성이다. 이 서사에서 테러리스트의 역할은 오로지 악역뿐이다. 그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않을뿐더러 이해할 마음도 없다. 결과적으로 그는 선량한 아이들을 해치려 했던 악한일 뿐이다.

악한을 끝까지 악한으로 몰고 가기. 이것이 이 영화의 두 번째 위험성이다. 피해자의 생존 담론 속에는 피의자가 항상 존재하며 그의 자리는 영원히 바닥으로 추락한다. 죽은 피의자는 말이 없다. 그가 죽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경적 관점과 완전히 위배된 입장이 되고 만다. 피해자인 그들이 어떻게 테러리스트의 마음까지 고려할 수 있는가? 왜 그러해야 하지? 이런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입장까지도 생각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다. 증언자들의 대부분이 동생(이자 철천지원수)에게 재산을 뺏기고, 시간을 뺏기고, 아버지의 사랑마저 빼앗긴 형의 위치에 가 있는데, 어떻게 그런 동생을 다시 사랑할 수가 있겠냐는 말이다. 아버지와 형의 입장, 그 양 극단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해 볼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해석해 보는 게 정당할까? 이런 고민을 가져보는 것이 기독교의 올바른 윤리가 아닐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 그것이 증언자(피해자-생존자)의 곤혹스러운 입장이 아닐 수 없겠다.

아버지-관객을 향한 조용한 폭력

그렇다면 증언자(피해자-생존자)의 입장이 아닌, 아주 객관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를 봐야 할 것이다. 증언자의 입장, 기도로 테러를 막으려 고군분투했던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과는 다르게 경찰관 아버지는 눈에 띄게 다른 인물이다. 그는 그야말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신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신에게 함부로 기도하지 않을뿐더러 예배 또한 쉽게 드리지 않는다. 아들이 천사를 봤다고 했을 때조차, 테러로 인한 충격이 나이 어린 아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질문하며 의심하는 자였다. 따라서 많은 관객의 입장이 경찰관 아버지에게로 쏠려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가? 아버지는 바뀌었다.

증언은 믿음의 방식을 구체화한다. 그것이 믿음을 가지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믿음은 그런 식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신앙을 갖는다는 것, 믿음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일이자 어떤 도약의 지점이다. 그러나 경찰관 아버지는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아이들의 입을 통해 천사-도움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많은 상황이 폭탄을 제대로 터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기이한 이야기에 대해 번뇌와 갈등, 고민을 하던 찰나, 아주 갑자기 신을 믿기 시작한다. 어떻게? ? 그가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에 대해 그 누구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지만, ‘갑자기!’ 그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일종의 폭력이자 하나의 위협이다. 이해할 수 없는 신의 기적을 구구절절 보여주며 이런 기적을 보았으니 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가 이 영화의 메시지 뒤에 숨어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란 말의 형식을 띄면서도 동시에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믿음에는 신의 개입이 필요하다. 따라서 신의 기적을 말(언어)하거나 보여주는(이미지) 순간, 말하는 이의 암묵적인 의도가 개입한다. <신의 기적>이 그러한데,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구멍, 그 암묵적 빈 공간을 잘 파헤쳐 보는 일이 바로 우리의 일이 아닐까 싶다. 증언이란 어떤 측면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이 본 것을 전달하는 순간, 그것이 다 죽어버리는 것처럼 신앙의 영역에서 증언 또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고 기억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대로 사는 삶은 우리에게 유효할 수 있지 않을까. 신의 기적이 목소리 높여 말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신의 기적이 아니라, 기도하는 삶 그 자체다. 결국 증언이란 누군가에게 하나님에게 받은 복을 뽐내고 자랑하고 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노라는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글: 이 호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한국문인 인장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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