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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공포의 향방을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은 - 영화 <변신>(2019)의 안일함에 대해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공포의 향방을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은 - 영화 <변신>(2019)의 안일함에 대해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19.09.23 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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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한국공포영화는 손익분기점으로 ‘공포’의 성취 여부를 가늠한다. 공포영화의 흥행은 드문 것이며, 고로 수익이 난 공포영화는 제 몫을 한 것이라는 인식이 ‘공포’로의 도달과 등가에 놓이는 것이다. 물론 이 두 영역 사이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갖지 못한다. ‘공포’에 대한 기본적인 호기심과 그것이 추동하는 관객의 동원은 공포영화의 진전과는 거리가 있으며, 영화를 본 후 관객이 내린 불호의 평가는 관객수와 전혀 상관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난 10년간의 공포영화 중 그 어떤 영화도 영화가 끝난 후 회자되지 않는다는 것은 혹시라도 넘겼을지 모를 손익분기점과 공포영화의 진전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곡성>(2016)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공포영화의 영역에서 한정하여 설명하기 힘들며, <부산행>(2016)은 공포영화라기보다 재난영화이다.).

 

한국 공포영화가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공포영화에는 그 어떠한 장르영화보다 다양한 공간과 직업이 등장했고, 이질적인 설정들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공포영화가 현재 어디까지 진전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식으로 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 소재를 바꾸는 것에 집중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장르영화의 진전에 있어 장르가 현재 어디에서 멈추어있는지를 진단하는 것이 그 이후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소재와 배경을 바꾸는 것에 집중한 영화들은 결국 새로운 소재 속에서 ‘서프라이즈’로 스크린을 채우고 눈물로 마무리 짓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 <변신>(2019)는 바로 노선을 정확하게 지나면서 공포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엑소시즘이라는 이색적이면서도 이질적인 소재는 매력적인 방식으로 활용가능하다. <검은 사제들>을 통해 이를 증명한 이후 <변신>과 <사자> 등은 이를 적극 활용하였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설정’에 그칠 뿐, 공포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한다. 종교가 등장했을 때 공포의 존재는 특별한 이유가 필요치 않은 절대악이 될 수 있다. 즉 귀신과는 다르게 특별한 사연이 없는 악한 존재의 등장이 가능한 것이다. 엑소시즘이라는 소재에 있어 악은 인간을 괴롭히고 시험하는 것이기에 악의 조롱 속에서 무너지는 인간, 그리고 그 사이의 불신은 공포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종교의 설정을 전제로 했을 때 인간세계를 넘어서는 공포의 영역,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불안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변신>의 설정은 분명 이 지점을 관통한다. 또한 여타의 공포영화들이 여성 주인공, 혹은 여귀를 내세웠던 것과는 다르게 공포의 대상이 집안의 안정을 책임져야 한다고 믿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아미티빌 호러>의 설정이 주는 공포와 유사하다. 인간이 누군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외형을 인지하는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에서, 분명 가족의 모습을 한 채 또 다른 가족을 죽이려는 설정 자체는 공포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리고 아직 미처 자라지 못한 아이들이 있는 집안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부터 공포가 시작된다는 것은 중요한 설정상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변신>은 바로 이 설정을 적절한 방식으로 활용하지 못한다. 가족들이 갑작스레 변하면서 마주하게 된 공포는 너무도 빨리, 그리고 급하게 종료되어 버릴 뿐이다. 가족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면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들이 줄 수 있는 극한의 공포는 <변신>에서 너무도 직관적으로 그리고 단순하게 묘사된다. 이해할 수 없는 가족들의 모습을 목격하거나 가족들로부터 공격을 당한 이들의 이후는 <변신>에서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변신> 속 설정이 적절히 쌓였을 때 중수(배성우)의 설정은 분명 공포에 기여할 수 있다. 가족들에게 절대 서로 떨어지지 말라는 말을 남긴 중수가 외출 후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그의 행동이 과연 믿을만한 것인가에 대한 불안은 사제복을 입은 중수가 줄 수 있는 최대의 공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변신>은 중수의 설정을 그만의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눈물로 마무리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가 가족이 기대했던 이가 아니라는 점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보여주는 것에 <변신>은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신부라는 신분을 지닌 그의 말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는 가족, 그를 의심하는 것조차 불경하게 만드는 사제복이 줄 수 있는 공포는 중수의 눈물과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처연한 음향이 파묻혀 버린다. 새로워 보이지만 결국 슬픔으로의 귀결한다는 것은 공포에 대해 고심했다기보다 중수의 죄의식에 집중한 결과로, 이 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갑작스레 사망하는 둘째딸이나, 중요한 이처럼 등장했지만 결국 시각적으로 공포영화라면 보여주어야 할 것 같은 장면만을 위해 설정된 옆집 남자의 존재 등은 <변신>이 추구하는 공포가 애초에의 설정을 전혀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공포는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감정이자 반응이고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불안의 노출이다. 공포영화에서의 성취는 바로 이것을 어떻게 움직였는가,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어떤 공포영화에서 발현되었던 어떤 공포를 지시하는 것인가에 있다. 손익분기점을 믿었을 때 남는 것은 또 다른 소재를 찾아 기존의 이야기를 하는 안일함일 것이며, 물론 이는 공포영화의 성취와는 상관없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변신>(2019)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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