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호 구매하기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타자의 담론으로서 영화: <파이트 클럽>의 환상을 횡단하기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타자의 담론으로서 영화: <파이트 클럽>의 환상을 횡단하기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9.09.23 09: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떤 영화는 그간의 서사정보가 가리키던 진실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며 우리를 정신분석가의 위치로 유인한다. 지금까지 이해해온 서사무대가 잭(에드워드 노튼)의 무의식적 욕망이 빚은 환상과 구별 불가능해진 순간, 우린 인간 내면의 음습한 영역을 헤매게 된다. 가령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이해하기 위해, 마틴 스코세이지의 <셔터 아일랜드>를 해명하기 위해선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했던 ‘급전을 수반하는 발견의 순간’1)을 견뎌야 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맵 투 더 스타>와 같은 영화도 그 연장선에서 살펴볼 때, 유의미한 심층의 메시지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다.

<파이트 클럽>역시 정교한 해석 게임을 구축해 온 데이빗 핀처의 급작스러운 제안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린 ‘급전을 수반하는 발견’의 순간을 맞닥뜨린 후 잭의 욕망이 대타자에 어떻게 의존해 왔는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파이트 클럽>은 스크린을 통해 펼쳐지는 영화의 허구적 효과, 곧 나르시시즘적 동일시와 상상계적 오인 과정2)을 적극적‧전략적으로 이용한 스릴러의 전범이다. 지금부터 이 글은 논의의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신분석학과 자아심리학의 시선을 빌리고자 한다. 잭의 병리적 징후 속에 감춰진 무의식적 진실을 찾아 ‘가능한 여행’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1)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시학』, 문예출판사, 2002, pp.71-73.

2) 크리스티앙 메츠, 이수진 역, 『상상적 기표』, 문학과지성사, 2009, pp.18-19.

 

죽음 충동이 투사된 대상, 환상의 자리

정신분석학의 중요한 과제는 인간의 무의식을 탐색하면서 허구적 욕망의 대상을 옮겨 다니는 인간의 운명을 사유하는 일이다. 일찍이 라캉도 욕망의 환유적 운동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조망한 바 있다. 인간의 삶 충동은 욕망의 대상을 옮겨 다니는 과정의 반복을 낳고, 이는 다른 형태의 결여를 재체험하는 결과의 반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오가는 삶의 궤적에 포박당한 주체는 그처럼 자신의 불충분함과 불완전함을 이겨내기 위한 ‘반복’으로서의 삶에 투신하게 된다. 따라서 라캉이 내세운 ‘주체’ 개념은 외부 세계를 질서지우고 대상들을 합리적으로 사유하는 데카르트 이후의 보편적 ‘주체’ 개념과 완전히 구별된다고 할 수 있겠다.

라캉이 말한 불완전한 주체 개념은 정신분석학의 초석적 관점인 ‘자기 안의 근본적인 이질성(radical heteronomy)’으로부터 사유되어야 한다. 그로부터 인간 내부의 결여와 욕망의 윤리에 대한 비밀이 논의될 수 있다. 중요한 건, 무의식이 자아의 통제를 벗어나 있으면서 역설적으로 개인의 진실을 보증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 자신보다도 이 타자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스스로의 자기동일성을 확증하려는 바로 이 순간에도 나를 동요시키는 이 타자는 누구인가? 타자는 단순히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주체가 아니다. 타자의 존재는 타자성의 두 번째 단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타자는 또 다른 주체가 아닌 주체가 환원시킬 수 없는 이질성으로 이해될 때에야 비로소 나와 다른 주체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이 대타자의 담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별 주체들을 넘어선 어떤 차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거기서 욕망은 타자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망이 된다.3)

 

3) 라캉, 자크(Lacan, Jacques). 민승기 역. 「무의식에 있어 문자가 갖는 권위 또는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 『자크 라캉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2005, pp.88-89.

 

<파이트 클럽>의 잭은 대타자의 질서에 포박당한 불완전한 주체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대타자의 욕망은 그의 진짜 욕망에 한계를 지우고 그것을 규율한다. 현실에서 우리도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주체와의 관계 안에서 대타자의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는 현실적 요구와 진짜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내면의 요구 사이에서 살게 된다. <파이트 클럽>은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면서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의 경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가는 잭의 궤적을 좇게 한다.4) <파이트 클럽>의 긴장은 무의식의 시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파이트 클럽>의 서사는 잭의 병리적 환상에 입각해 진행된다. 그 환상이 ‘병리적’인 까닭은, 상징적 대타자를 상상적 타자로 대치한 채 잭이 불가능한 신기루 안에 갇혀 살아온 사실이 환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반전 이후 잭이 자기 환상의 실체를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순간, 이들 영화는 주체가 상징계에 정박하기 위해 견뎌온 일종의 ‘흠집’을 보여준다. 그리고 환상 안에 은닉된 잭의 진정한 열망을 확인하게 한다. 엘리자베스 라이트도 실질적인 소망이란 은폐된 채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환상이란 그로부터 소망의 지점에 이르기 위한 욕망, 때론 두려움을 동반한 그 여정을 완수하기 위해 ‘무의식이 구성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5)

 

4) 엘리자베스 라이트, 김종주·김아영 역. 『무의식의 시학』, 인간사랑, 2002, p.135.

5) 엘리자베스 라이트, 김종주·김아영 역. 『무의식의 시학』, 인간사랑, 2002, p.55.

 

만약 잭의 환상을 세계의 억압에 대한 능동적 도전 행위로 읽는다면, <파이트 클럽>의 ‘환상’은 다른 관점에서 해석될 수도 있다. 상징계가 주체의 의미 세계인 현실로부터 배제한 바로 그것, 곧 실재(réel)를 겨냥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대타자의 질서 내에서 왜소해져가던 주체가 무의식 속에서 왜 그것을 구성했는가.’ 이 질문은 불가능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잭의 진실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들의 환상 안엔 주체로 호명되는 순간 잃어버린 어떤 것이 비치는데, 이는 상징계의 언어적 질서로 표현할 수 없는 욕구의 찌꺼기를 암시한다. 그 때문에 반전 이후의 잭과 함께 서사 앞부분의 정보를 다시 짜맞추는 작업은,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근원적인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다각도로 파악해가는 일과 다름 아니다. 강력한 ‘금지’ 아래에서 그만큼 강렬하게 길항하는 죽음충동, 곧 주이상스(jouissance)의 순간들을 대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상징계에서 결여로 남겨진 잭의 실존을 확인시키며 끝나는 영화는 많다. 희열의 순간에 다시 부재를 이야기하는 실재계(the Real)의 순간을 형상화하며 종결되는 영화도 적지 않다. 그러나 상징계 속에서 죽음충동이 투사된 대상을 계속적으로 찾게 하면서, 주체의 결여와 상징적 대타자의 결여를 지속적으로 연루시키는 영화작업은 쉽지 않다. <파이트 클럽>이 놀라운 것은, 환영(幻影)으로서 영화 이미지의 본질적 가능성을 활용해 중층적으로 사회문화학적 해석을 견인해내기 때문이다.

재차 강조하면 <파이트 클럽>은 앞에서 ‘대타자의 질서 내에서 왜소해져가던 주체가 무의식 속에서 왜 그러한 환상을 구성했는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는 불가능한 욕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대상-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다르지 않다. 이는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궁금증의 힘으로 진행되는 보편적인 스릴러물보다 더 근본적이면서 한편으론 난해한 궁금증을 낳는다(이미 <세븐>에서 핀처는 스릴러의 익숙한 서사적 겨냥점을 월담한 바 있다).

미리 밝히면 <파이트 클럽>은 잭을 사로잡고 있는 신경증적 방어기제로서 ‘해리(dissociation)’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해리’가 작동하게 된 원인과 ‘해리’가 낳은 환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불거지는 폭력의 문제, 또 폭력이 향하는 대상과 폭력적 행위로 연대해가는 지하 조직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데올로기화된 소비 메커니즘의 지배에 시달리는 주체가 스스로를 장악해 온 허구적 환상과 싸우기 시작할 때, 관객은 함께 전장(戰場)에 나서길 독려 받는다. 영화 속에서 이 비밀스러운 ‘전장’이 계속적으로 확장되는 이유를 해명하는 건 필수적이다. 쾌락원칙이 작동하는 상징계의 법이 주이상스를 거세시켜도 잔존하는 어떤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잭과 더든이 속한 ‘파이트 클럽’이 도시의 뒷골목에 전염병처럼 퍼지는 풍경은 주이상스 그 자체가 목적인 '잉여 주이상스(surplus-jouissance)'의 위력을 확인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방어기제로서 해리와 ‘폭력’의 급진성

데이빗 핀처의 <파이트 클럽>은 척 팔라니욱(Chuck Palahniuk)의 소설을 원작 삼아 자신만의 대사회적 상상력을 덧보탠 결과물이다. 잭은 거대한 자동차 회사의 ‘리콜 심사관’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는 직업 때문에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자동차 사고를 조사한다. 핀처는 이 과정을 매우 지루한 활동처럼 묘사하는데, 이는 과잉소비가 주는 쾌감에 중독된 그의 내면을 암시한다. 영화 초반부, 스웨덴의 다국적 가구기업 이케아 카탈로그가 그대로 잭의 집 안 풍경으로 대치되는 쇼트가 있다. 그는 새로운 상품이 출시되면, 그것을 사지 않고서는 안정을 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장면은 과잉생산을 통해 잉여의 필요를 확산시키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과 그러한 메커니즘 안에 완전히 포박당해 있는 잭의 상태를 환기시킨다.

그의 욕망을 지배하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위력은 일회용품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그의 일상이 다시 증명해 준다. 직업적 특성상 비행하는 시간이 많은 그는, 잠깐의 기내식으로 식사를 때우는 경우가 많다. 또한 여행용 칫솔과 샴푸, 샘플용 구강청정제, 소형 비누, 일회용 설탕과 버터 등으로 생활을 영위한다. 이는 그가 기계적·소모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각적 장치다. 한편으론 프로이트가 어린 아기의 ‘포르트-다(fort-da)’ 놀이6)에서 발견한 삶의 행태를 보여주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불완전한 욕망의 대상을 반복적으로 좇으며 자기 결여를 견디는 잭의 현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6) 아이는 실이 감긴 나무 실패를 던진 후 시야에서 멀어지면 ‘포르트’(fort: 가버린)라고 외친다. 그리고는 곧이어 실패를 당긴 후 ‘다’(da: 거기에)라고 소리치며 놀았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의 소유에 관해 수동적인 위치에 있던 아이가 놀이를 통해 능동적인 지위를 획득하려 한다고 봤다. (Sigmund Freud, 윤희기 역, 「쾌락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열린책들, 2010, pp.279-282.) 즉 ‘포르트-다’ 놀이는 어머니의 부재와 현존을 능동적으로 견디기 위해 행하는 놀이다. 라캉은 이 놀이를 상징계에 들어선 주체가 어머니의 대리물을 향해 반복적 추구의 운동을 하는 것으로 해명한다. ‘포르트-다’ 놀이는 상징계적 주체의 삶을 장악한 반복충동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의미없이 소비를 지속하면서도 그런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잭의 생활, 곧 그의 과다한 소비욕은 음험한 상징계적 질서에 포박당한 자의 부질없는 생활을 상기시킨다. 

 

잭의 소비중독과 그의 불면증이 모종의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건 중요하다. 영화 초반 그는 불면증을 이기기 위해 ‘집단 상담 모임’에 나간다. 급기야 자신이 걸리지도 않은 여러 불치병 환자들의 모임을 전전하기 시작한다. 자신도 그 병에 걸린 환자처럼 위장하고는 진짜 환자들 사이에 속해 안식을 얻는 식이다. 그 중 죽음에 접근해 가고 있는 고환암 남성 환자들 모임에서 그는 가장 큰 위로를 받는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종점을 향한 그의 충동, 이른 바 '죽음충동(death drive)'은 그렇게 가시화된다.

곧이어 잭은 고환암 남성 환자들 모임에서 호르몬 때문에 여자와 같은 유방을 가진 전직 레슬러를 만나고, 그의 품에 안긴 후 수면장애를 극복하는 기적을 맛본다. 추측컨대, 그는 세계가 어머니와 분리되기 전의 상태를 그의 품에서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소비중독과 그로 인한 불면증이 도피적 퇴행을 낳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그 근본 원인으로서 그를 억누르고 있는 압도적인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파괴력, 곧 그의 생활까지 규율하고 있는 ‘아버지의 법(the Law of Father)’이 갖는 위력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수면장애에 다시 빠져든다. ‘집단 상담 모임’들에서 말라(헬레나 본햄 카터)라는 의뭉스러운 여자를 마주치면서 그의 병세가 다시 악화된 것이다. 그녀 역시 가짜 환자로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각종 집단 상담 모임들을 전전하는 중이었다. 잭은 자신과 다른 이유로 같은 행동을 하며 접근해 오는 그녀에게서 환멸을 느낀다. 그는 자신처럼 가짜 환자 행세를 하는 그녀를 보면서 감추고픈 자기 처지를 대면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고환이 없는 말라의 참석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를 여러 관점으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영화 후반부의 단편적인 정보들을 보태어 생각할 때,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 분)이 잭의 내면 안에 존재하는 이질적 타자의 형상이듯이, 말라 역시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러던 어느 날, 잭은 자신의 고층 아파트가 폭파 사고로 다 타버리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다. 이 장면은 좀 더 부연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핀처는 잭의 집에서 재가 되어버린 통조림통 등을 바라보게 하는 방식으로 그의 소유물이 단숨에 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환기시킨다. 잭은 소비를 통해 살아있음을 감각해 왔고, 소유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해 왔다. 그런 까닭에 구입한 상품이 있던 장소이자 구입할 상품을 놓을 장소가 한순간에 사라진 상황은 잭에게 엄청난 충격과 불안을 안겼을 것이다. 이때 그는 방금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잠깐 동행했던 남자에게 전화를 건다. 그 남자의 이름은 타일러 더든인데, 그는 잭에게 없는 마초적인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잭이 자기에게 주어진 경제생활과 책임관계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소극적 인물이라면, 타일러는 거칠고 반항적이며 관습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처럼 보인다. 따라서 극도의 불안과 좌절감에 빠진 잭이 자기 집을 상실한 후, 타일러를 찾는다는 건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을 위한 단초가 된다.

아래 대화는 잭이 타일러를 도시 외곽의 한 바에서 다시 만나 나눈 대화의 전문이다.

 

잭: 난 가구 살 때마다 다짐하죠. ‘이게 마지막이다. 소파에 관한 고민은 끝났다.’ 난 다 갖췄었죠. 멋진 오디오, 최고급 목욕가운... 모든 게 완벽했는데.../ 타일러: 다 날아갔군. / 잭: 사라졌죠. / 타일러: ‘듀베’가 뭔지 아슈? / 잭: 퀼트 담요. / 타일러: 맞아요. 우린 담요 종류까지 외우지만 원시인도 그런 게 필요했을까? 천만에. 우린 누구죠?/ 잭: 단순한 소비자죠./ 타일러: 맞아요 우린 소비문화의 부산물이요. 살인, 굶주림 따위 난 관심 없소. 내가 관심 있는 건 연예잡지, 케이블 TV, 고급 속옷, 비아그라, 다이어트약이요. / 잭: ‘마사 스튜어트’/ 타일러: 걘 틀렸소. ‘마사’의 스타일은 한물갔어요. 유행이니 소파니 다 잊어요. 완벽을 찾지 마시오. 그런 건 다 유치한 허영심이라구. 불 좀 나면 어때? 하긴 당신에겐 비극일 수 있겠지. / 잭: 아니, 비극까진 아니오. / 타일러: 문화생활의 도구들을 잃었잖소. / 잭: 그래요, 아니 됐소(담배를 권하는 타일러를 향해). 화재보험금이 나올 거요. 왜요(한심하다는 듯 자기를 쳐다보는 타일러를 향해)?/ 타일러: 당신이 물질의 노예가 될까 봐. 알아서 하슈.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잭이 처한 상태와 그가 타일러에게 끌린 이유를 동시에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향후 그들의 동행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유념할 것은, 이 장면에서 도착적 소비욕망에 충일한 잭이 피상담자로, 그리고 사회의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타일러가 상담자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바에서 나온 후 타일러는 잭을 위해 자기 집을 쓸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며, 그 대가로 자기를 한 대 때려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 순간 바의 출입문 밖에 서 있던 두 사람의 현실이 일순간 정지되고, 유희적인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씬들이 개입한다. 이 돌연한 씬들에서 잭은 카메라를 보고 타일러의 직업을 소개한다. 주인공의 소개에 따르면, 타일러는 남들이 자는 시간에 일하는 영사기사다. 그런데 그는 가족영화나 유명배우가 더빙한 만화영화 필름을 이어붙이면서 그 사이에 포르노 필름을 한 컷씩 끼워 넣는 장난을 즐긴다. 한편 타일러는 호텔 연회장 웨이터로도 일해 왔다. 그런데 잭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요식산업계의 테러분자”였다. 디저트에 방귀를 끼고, 야채엔 재채기를 하고, 스프에 자기 소변을 섞는 방식으로 기행7)을 거듭해 왔다.

 

7) 영화 중반엔, 타일러가 비누제조업자로 활동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병원에서 지방흡입 수술을 하면서 모은 사람의 지방을 훔쳐서 고급 화장비누를 만들어 되팔아 왔던 것이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에서 그가 차지하는 상징적 지위를 적확하게 환기시킨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씬들 바로 다음에 잭과 타일러가 서로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이유없이 서로를 때리는 일에 빠져든다. 잭은 전에 싸워 본 적도 없다고 고백했지만, 타일러는 그런 그에게 폭력을 독촉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싸워봐야 너 자신을 알게 돼.”라는 충고가 바로 그것이다. 이 대사는 일종의 상담과도 같았던 바에서의 대화 이후 주어진 궁극적인 처방에 가깝다. 실제로 타일러는 일탈적이고 전복적인 태도로 세상에 ‘싸움’을 걸어 온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타일러가 실천해 온 여러 유형의 폭력은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개인의 일상까지 완전히 장악한 소비 사회의 규율적 체계가 영화 서사를 통해 거대한 적으로 부상해 가는 것을 고려하면, 이때의 폭력은 사회를 향한 불가능한 항거의 성격도 갖는다. 깊은 밤, 잭이 확인한 타일러의 집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폐가의 몰골을 하고 있다. 빅토리아식 저택이라지만 오래전에 버려진 듯 축축하고 너무 지저분하다. 이 집의 이미지는 상품화 된 세계 아래 적체된 찌꺼기를 은유한다. 물화된 욕망을 즉물적으로 드러내는 대도시의 화려한 건물들 사이에 그러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성찰을 요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관객은 그곳에서 동거에 들어가는 타일러와 잭을 보면서 좀처럼 의심해 본 적 없는 작금의 사회와 그에 대한 믿음을 성찰하게 되고, 이미 길들여진 생활방식 안에서 ‘정상성’의 범주를 되묻게 된다.

이후 타일러와 잭은 아예 정기적으로 ‘파이트 클럽’을 열고,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폭력에 전염시킨다. 놀라운 점은, 그 과정에서 잭이 삶의 활력을 되찾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과감한 실천가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처럼 타일러에게 동화되어 가면서 잭은 환자들 간의 집단 상담 모임에도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된다. 잭의 내래이션에 근거해 말하면, 과거의 그라면 남보다 과하게 쌓이는 분노를 풀기 위해 청소를 하거나 가구를 닦았을 것이다. 또 화재 보험금을 정산한 후 새 집을 보러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잭은 그런 세계와 스스로 절연하는 데 성공한다. ‘파이트 클럽’ 활동이 과거의 일상을 뒤엎는 전복적 쾌락 이상을 선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종의 퇴행처럼 비치는 ‘파이트 클럽’ 모임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죽음 충동을 시각화하고, 제도권이 허락할 수 없는 것을 원시적으로 욕망하는 주이상스의 무대를 상기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타일러, 말라, 잭의 관계는 영화 후반부에 삼각관계처럼 묘사되는데 이들의 물고 물리는 연애 감정은 ‘결여-욕망’의 순환에 관한 도식을 보여준다. 예컨대, 주인공은 마초적 카리스마로 무장한 반항적인 남자 타일러에 동화되어 간다. 한편 말라는 미친 듯이 일하며 쫓기듯 살아가는 유약한 소심남인 주인공에게 끌린다. 타일러의 경우엔, 겉으론 시크한 표정으로 일관하지만 안으로는 외로움에 시달리는 말라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렇게 보면, 이들은 자기 안에 부재하는 일면, 곧 자신의 특정한 ‘결여’를 채울 수 있는 대상을 충실하게 욕망했다고 할 수 있다. 유념할 것은, 타일러와 말라가 잭이 필요에 의해 불러낸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이미지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점차 다른 도시로 확산되는 ‘파이트 클럽’에 점차 불안을 느껴 간다. 더 직접적으로는, ‘파이트 클럽’이 테러 조직 성격의 군대로 바뀌게 되자 두려움을 안게 된다. ‘파이트 클럽’의 조직원들 사이엔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규칙이 있다. 타일러는 그 규칙을 빌미로 내부를 단속하며 교조적 가르침을 행하곤 한다. 그는 조직원들에게 비참한 현실을 각성시키면서 그들 스스로가 “우주선에 탄 원숭이”이고 “인류를 향한 제물”이며 “죽으면 썩을 유기체”, “숨 쉬는 쓰레기들”, “퇴비더미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더군다나 세상을 향해 표출해야 할 목소리와 힘을 저지당해온 사실도 강변한다. 그가 다른 조직원들을 선동할 때 내뱉은 다음 대사를 보자.

기름이나 넣어 주고 웨이터 생활이나 하면서 먹물들의 노예로 살고 있지. 우린 필요도 없는 고급차나 비싼 옷을 사겠다고 개처럼 일해 왔어. 우린 목적을 상실한 역사의 고아야. 2차 대전도 공황도 안 겪었지만 대신 정신적 공황에 고통 받고 있어. TV를 통해 우리는 누구나 백만장자나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지. 그게 환상임을 깨달았을 때 우린 분노할 수밖에 없는 거야.

궁극적으로 타일러는 조직원들을 데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를 지탱하는 거대한 적들을 단호하게 공격해 간다. 이때의 적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독점 자본의 상징인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다. 그래서 ‘초토화 작전’으로 불리는 그들의 테러 행위는 각각 자동차, 컴퓨터, 카드 관련 회사의 빌딩들을 겨냥한다. 그 과정에서 공권력은 무시되고 제도권의 질서는 망각된다.

이 같은 거대한 폭력이 조직적으로 행사되던 중에 반전의 계기가 마련된다. 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해리 장애, 곧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를 자각하게 된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삽입된 이 자각의 순간은 그전까지의 영화 정보를 다시 살펴보도록 요구한다. 급전에 수반되는 이 충격적 발견의 순간에, 잭은 환상으로 빚은 자기 안의 다른 인격으로 타일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제야 잭은 신용카드 회사 건물을 폭파시키려는 타일러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는 자기 안으로부터 파생한 이질적 타자의 환영을 거부하려는 시도이며, 예상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자가 치유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또 다른 해석적 관점을 구축하면, 타일러와 잭의 대결을 소비 메커니즘에 중독되어 살아 온 중산층 남자와 계급적 한계에 가로막힌 노동자 계층 남자의 대결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핀처는 반전이 주어지기 전까지, 타일러의 신분과 성향을 사회 환경에 제한받는 노동자 계층으로 포지셔닝해왔다. 또 타일러를 추종하는 세력 대부분을 그와 동일한 신분으로 묘사함으로써 주인공과 타일러의 충돌이 개인 내면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도록 의도해 왔다.

그 때문에 타일러가 전염시켜 온 폭력은 불합리한 시대와 사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합리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다른 방도를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의 체제 전복 방식처럼 비친다. <파이트 클럽>이 1999년에 개봉한 사실을 감안하면, 이 영화는 세기말 자본주의의 지배력과 그 아래에서 확산되는 비인간적인 생활체계에 대한 파격적인 묵시록인 것이다. 실제로 영화 속 인물들은 주먹을 주고받으면서 기계 부속품처럼 살아온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던 ‘생의 활력’을 얻게 된다. 타일러의 조직원들이 행사하는 폭력을, 자본주의 시스템이 양산해온 폭력에 대한 유의미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잭이 타일러를 불러낸 이유는 자기 삶을 완전히 지배한 소비중독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타일러의 틈입은 기존 문명에 대한 전복 의지이면서 헤어날 수 없는 소비에의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대체하고 싶은 근원적인 열망과도 같다.

그리하여 타일러가 의식을 지배하는 순간에 행하는 폭력은, 상징계가 주체의 의미 세계인 현실로부터 배제해버린 실재를 겨냥하는 행위다. 타일러와 그의 동료들은 주먹다짐을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바, 그것은 잭을 길들여 온 현실을 향한 불가능한 항거의 성격을 갖는다. 폭력의 순간 자체가 고통과 희열이 응축된 주이상스의 순간인 셈이다. 결국 영화 속 폭력은 되돌릴 수 없는 것, 도달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싸움’이기에 그 자체로 무모하고, 더 큰 무력감을 불러올 실천일지도 모른다. 추측컨대, 핀처는 그 ‘무모함’과 ‘무력감’에서 파생하는 여운을 영화의 마지막 메시지로 활용한 듯 보인다.

영화 막판, 주인공은 타일러를 지우기 위해 자기 목에 권총을 집어넣고 당긴다. 그 순간 관객은 두 가지를 떠올려야 한다. 먼저는, 소비 메커니즘에 안주하면서 중산층의 삶을 즐기라고 강요하는 상징계의 쾌락원칙을 상기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타일러가 쾌락원칙을 넘어서기 위해 주인공의 무의식이 구성한 인격이란 점을 떠올려야 한다. 두 정보를 연결시켜 보면, 죽음이 아니면 끝나지 않을 ‘싸움’ 앞에 이르러, 주인공은 죽음충동의 윤리적 일면을 확인시킨다고 할 수 있다.

<파이트 클럽>이 마초적이고 남성중심적 서사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비중을 갖는 유일한 여성인 말라가 도구적인 지위에 머무른다는 일각의 시선은 과도하다고 판단된다. 말라는 주인공의 내적 진실을 부각시키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말라를 향해 내뱉은 영화 속 마지막 대사(“우린 이상할 때 만났어”)는 이 영화의 대사회적 상상력을 분명하게 언어화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속 ‘폭력행위’가 너무 강박적이고 마초적이며 무모하기까지 하다는 범박한 평가에 대한 핀처의 항변이라 할 수 있겠다.

 

타자의 담론으로서 영화

무의식은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자기 안의 이질성의 세계다. <파이트 클럽>은 잭의 내면을 장악한 타자의 담론, 그 자체다. 자기 환상을 뒤늦게 횡단해야 하는 잭을 두고서 우리도 상담자이자 피상담자가 될 수밖에 없다. <파이트 클럽> 뒤에서 핀처는 후기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서 탄생한 대량 상품문화에서 당신은 안녕하냐고 묻는다. 상품화의 물결에 휩쓸려버린 우리에게 다른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핀처도 그 내막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교환대상으로 여기는 소비사회 안에서 ‘중독’까진 아니더라도 ‘적응’ 이외의 방법은 없는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잭과 함께 제대로 된 거울 앞에 설 수 있다면, 우리도 타일러의 주먹과 말라의 표정 사이에서 한없이 왜소해진 한 사람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세븐>에서 완벽주의 스타일리스트이자 집요한 스토리텔러로서 가능성을 내보였던 핀처는 <파이트 클럽>으로 한 걸음 더 먼 세계를 밟았다고 믿는다. 거대한 건물들이 폭파되어 쓰러지는 <파이트 클럽>의 엔딩 씬은 정공법에 가까운 도발이다. 그 장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현실적인 아우라 안에서 타일러의 인상적인 대사를 다시 읊어보고자 한다. “싸워봐야 너 자신을 알게 돼.” 부디 당신이 당신 안에 잠든 타일러를 대면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 글은 필자가 쓴 「타자의 담론으로서 영화: <파이트 클럽>,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환상을 횡단하기」(『문학과 영상』 15권 3호, 2014)의 일부 내용을 가져와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글·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영화를 포함한 문화콘텐츠의 인문학적 기획 및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정기구독자님이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바랍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시 종이신문 과월호를 발송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