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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쌍한 청년의 삶이 쉽게 해결된다는 것은 - <성혜의 나라>의 단조로움에 대하여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쌍한 청년의 삶이 쉽게 해결된다는 것은 - <성혜의 나라>의 단조로움에 대하여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0.02.17 09: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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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결말부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청년의 어려움과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는 그리 낯설지 않다. 아니 이젠 낡아버린 문법에 가깝다는 말이 맞다. 결국 영화는 자신의 경험과 관점을 스크린에 세기는 일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다수의 독립영화 감독들의 나이를 생각할 때 청년들의 고충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일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보다 못 사는 첫 세대가 될 것이라는 진단과 마주한 현재의 청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 그래서 그 영화들에 등장하는 이들의 고뇌가 우울을 전제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물론 독립영화에서 이 고뇌가 직관적인 우울로 발화된다고만은 할 수는 없지만 그리 쉽게 제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통해서야 색채를 찾을 수 있었던 <마이 제너레이션>(2004)의 우울은 약 10년 뒤 족구나(<족구왕>(2014)) 현피(<잉투기>(2013))라는 나름의 경유 방식을 만들며 새로운 감정과 전과 다른 문제의식·지향점을 보여주면서도, <10분>(2014)이나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2014)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도 했으니까.

극한의 우울에 가 닿았던 세대의식 속에서 유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약 10년의 세월이 차곡히 쌓아간, 그러니까 노동이라는 이름의 외투를 씌운 돈이란 것이 얼마나 무수한 층차를 나누어내며 또 그것이 얼마나 청년의 자존감을 깎아 먹는 구조인지를 깨달아간 이들의 해탈이거나 발악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후 <수성못>(2018)이나 <소공녀>(2018)에서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혹은 내 삶을 꾸리기 위한 나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이기에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 청년의 이야기들은 조용하지만 뚝심있게, 그리고 과연 그것이 청년의 삶이 가 닿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까지를 포함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2018년 첫 선을 보인, 그리고 2020년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성혜의 나라>(2020)는 바로 그 뒤에 놓인다.

 

<성혜의 나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우울한 청년의 표지를 여기저기 배치한다. 성혜(송지인)는 29세의 취업준비생이다. 과거 성희롱을 폭로하고 퇴사한 후 유사한 직종에 취업이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꾸려 나간다. 신문 배달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깨알같이 쪼개가며 마련한 반지하 자취방은 갑작스레 보증금을 올려달라 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지만 그다지 절박해 보이지 않는 남자친구는 갑갑하다. 취업을 위해 학원에서 준비 중이지만 자잘한 알바들로 집중은 잘되지 않고, 이 와중에 아버지의 간병비가 조금씩 조금씩 그의 통장을 깎아간다. 듣기만 해도 답답한 이 설정들은 <성혜의 나라>가 바라보는 청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하지만 결국 외부적인 현실 때문에 성취해내지 못하는, 그리고 반지하에 갇혀 하루하루 무너지는 삶. 그러니까 (여성이라면 더더욱) 불쌍한 젊은이들, 그래서 조금씩 수면제를 사 모으며 끝을 생각하는 불행하고 불쌍한 청년들.

사실 ‘불쌍하다’는 감정 속에서 누군가의 삶을 직관하거나, 그에게서 행복이 있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누군가 즐겁고 만족스럽게 살아간다 해도, 그를 불쌍하다 바라보는 이에게는 그의 모든 것이 불행을 잊기 위해 행복을 가장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이는 기성세대가 청년을 바라보는 바로 그 시선과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기성세대가 청년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략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나약하다고 질책하는 것, 다른 하나는 불쌍하다며 가엽게 바라보는 것. 전자는 청년들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내몰고, 후자는 청년들의 문제를 해결한다며 원인 찾기에 집중한다. 두 가지 어디에도 청년들이 입을 뗄 기회는 마련되지 않는다. 청년들이 인식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라고 인식하기는 하는지, 왜 그것이 아닌 이것을 문제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기성세대가 집중하는 갈래 어디에도 끼어들 수 없다. <성혜의 나라>가 나열하고 있는 이 설정들은 흑백화면 속에서 담담히 지나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매우 진부하며 쉽게 이야기해대던 몇 포 세대의 초상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성혜의 나라>는 정확히 기성세대의 후자의 관점에서 청년을 바라본다.

 

이미 오랫동안 이야기된 온 N포, 지옥고, 흙수저, 흙밥의 중심에 놓인 성혜는 독립영화가 오랫동안 고심하며 쌓아온 이야기를 등진 채 퇴행의 길을 걷는다. <성혜의 나라>에서 성혜가 먹는 음식은 편의점 삼각김밥이 전부이며, 남자친구와 오랜만에 먹는 고기는 헤어지기 전 만찬에 그치는 것으로 느끼는 안타까움은 청년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성혜는 마지막 장면을 제외한 그 어느 곳에서도 웃지 않으며, 활기를 찾으려는 생각조차 없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는 짐에 불과하며, 숨 막히는 생활의 연속이다. 바로 이 안타까움과 불쌍함을 ‘해결’하기 위해 영화는 그것의 해결책을 찾고, ‘파격적’이라는 이름으로 그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해결해주겠다고 나서는 그 대책은 잔인할 만큼 단조롭다.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청년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파격’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허탈함은 그 단조로움으로 인해 복잡해진다.

성혜는 갑작스런 부모님의 사망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게 된다. 5억이라는 돈을 앞에 둔 성혜는 더 이상 일을 찾으려 고생하지 않고 보상금을 거치한 후 20년 매달 140여 만원을 지급 받기로 결정한다. 성혜는 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내가 이상한 건가?”라고. 영화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 성혜의 웃는 얼굴과 밝은 음악은 바로 이 선택 후 이어지는 것이다. 일을 위해서 탔던 자전거가 아닌 산책을 위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나아가는 성혜는 바로 이 보상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 셈이다. 즉, <성혜의 나라>가 끊임없이 앞세우는 파격은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은 날들을 편하게 살겠다는 이 선택을 지시한다. 돈이 주어진다면 가능한 이 선택은 청년의 문제가 돈으로 모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성세대의 생각을 정확히 관통한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택이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기성세대의 입장을 대변하는 하는 것이다. 이는 일을 하지 않는 삶에서 안정을 찾고, 그러한 삶을 기대한다는 것은 열심히 살아나가야 하는 청년의 몫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성혜가 그러한 선택을 하기까지 어떠한 경로를 겪어내야 할지에 대해 <성혜의 나라>는 관심이 없다. 지난하고 불행한 청년의 삶이 오랫동안 전시되었던 것과 다르게 보상금이 주어진 이후, 성혜에게는 그리 깊은 고민의 시간이 마련되지 않는다는 것은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돈으로 그가 겪었던 모든 일들, 즉 자신이 성취하려던 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들이나 과거 성희롱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여태의 업체에서 거절당했던 일, 혹은 부모님의 목숨값으로 편안해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잔인함 등은 아무것도 해결될 리 없지만 이에 대해 성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매우 개인적인 이로 놓이는 것이다. 이미 자신의 삶을 위해 포기할 것과 선택할 것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가졌던 <소공녀>의 미소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미소가 그와는 반대로 살았던 이들이 어떤 굴레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던 것을 떠올린다면 이는 분명한 퇴행이다.

 

물론 청년들에게 돈이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단지 내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들인 공력만큼, 노력만큼의 정당한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 구조 자체에 있다. 그리고 전언했듯 이미 이전의 독립영화 속 청년들은 노동이 무수한 층차 사이에 존재하며 그것이 얼마나 청년의 자존감을 깎아먹는 ‘구조’인지를 이야기한 바 있다. 갑의 갑의 갑과 을의 을의 을로 이어지는 것까지 이미 파악된 이후인 것이다.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식의 명제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역을 성립시킨다. 이미 돈이 없음에도, 보장된 미래가 아님에도 뛰어들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독립영화의 계열 안에서 <성혜의 나라>는 한 발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는가. 또한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도 공감의 정치를 이끌어냈던 청년들의 무수한 현재적 문제의식을 개인의 안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돈이 없어 불쌍하고, 돈을 벌기 위해 불쌍해지는 이야기로 청년들을 담아낼 수 있는가. 청년들의 분노가 불쌍함과 쉽게 연결되지 않길, 그래서 위기를 연민으로 뭉개지 않길 늘 바라고 바라지만 많은 영화들은 늘 쉬운 방식을 앞세운다. 청년 담론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성혜의 나라>(2020)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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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20-02-17 10:36:33
영화를 잘 못 보신거 같네요. 전주국제영화제 대상 수상은 심사위원들 눈이 이상해서였을까요? 평론의 관점이라는게 다른 지점을 보는 것이 옳기는 한데 그럼에도 빠뜨려선 안되는 것이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일 겁니다. 님의 글은 감독의 관점과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님의 글처럼 전형적인 사고에 갇힌 글 같습니다.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컨택했던 김영진 평론가님의 분석이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글이라고 할수 있겠죠. GV에서 감독은 이 영화는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보내는 경고라고 했습니다. 영화 속 성혜는 하층계급의 노동자(기계)를 상징하고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노동 거부, 즉 파업의 의미라고 하더군요. 그것이 자본을 지배하고 있는 기성세대에게 던지는 유일한 저항권이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