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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시대, 관계를 다시 묻다
취향의 시대, 관계를 다시 묻다
  • 김지연 l 예술 에세이스트
  • 승인 2020.04.29 18: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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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서울 모처의 카페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인다. 서로를 본명이 아닌 닉네임으로 소개한 뒤, 모여 앉아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린다. 정해진 시간이 끝나면 자리를 뜨는 사람도, 남아서 이야기를 더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취향을 중심으로 모여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모습은, 19세기 유럽의 살롱문화를 연상시킨다. (사진: <취향관> 제공)

이들은 동네 이웃을 연결해주는 앱에서, 누군가 오픈한 ‘게더링(Gathering)’에 참석 신청한 사람들이다. 약속한 시각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는 무엇도 강제되지 않는다. 애초에 참석하는 것조차 개인의 자유다. 

이번에는 저녁 무렵의 한강이다. 수십여 명이 운동복 차림으로 모였다. 각자의 방법으로 몸을 풀고 있지만, 서로 굳이 소개를 나누거나 인적사항을 묻지 않는다. 처음 온 사람도 있고 자주 나오는 사람도 있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초급자부터 상급자까지 그룹을 나눠 초급자 그룹을 선두에 세우고 달리기 시작한다. 러닝이 끝나면 처음에 왔던 것처럼 각자 돌아간다. 기념사진 정도는 남기더라도 화기애애한 뒤풀이나 친목활동은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2030세대에게 환영받는 ‘오픈런’이라는 형식의 달리기 모임이다.

나를 잃지 않고 간섭을 피하는, 서울 살롱 문화

취향과 목적을 중심으로 맺는 관계가 늘고 있다. 같은 관심사나 취미를 중심으로 모이거나, 특정한 공간의 멤버가 돼 자유롭게 관계 맺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동네 이웃 앱 ‘우트’나 여러 ‘오픈런’ 모임 외에도, 독서 모임으로 유명한 ‘트레바리’, 같은 관심 주제 아래에 모여 이야기 나누는 소셜살롱 ‘문토’, 누군가의 집을 방문해 집주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공유하는 ‘남의 집 프로젝트’, 취향과 삶을 나누는 멤버십 클럽 ‘취향관’, 창작자들의 커뮤니티 ‘안전가옥’, 일하는 여자들을 위한 멤버십 커뮤니티 ‘헤이 조이스’, 책을 읽고 강연을 듣는 멤버십 도서관 ‘소전서림’ 등 목적과 규모, 운영방식이 모두 다른 모임들이다.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은 마치 19세기 유럽의 살롱문화를 보는 듯하다.  

밀레니얼 세대는 누구보다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다. 이들은 증명사진 하나를 찍어도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 탐구하며 시작한다. 증명사진 전문 스튜디오 ‘시현하다’는, 증명사진을 의뢰하면 먼저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 3가지를 제시해달라고 한다. 포토그래퍼는 단어의 느낌과 의뢰인의 분위기에 맞추어 사진의 컨셉과 배경 색상을 정한 뒤 사진을 촬영하는데, 이렇게 찍은 증명사진은 사람의 이미지를 남다르게 드러낼 수 있어 최근에는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수요가 증가했다고 한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나를 어떻게 표현할지에 강한 관심을 가진 밀레니얼들은 나를 찾는 여정을 이렇게 일상 속으로 가져왔다. 이전 세대와 구분되는 점이다.

이들이 맺는 관계는 보다 개인적이다. 가족과 직장 등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고 자유를 구속하는 전통적인 관계에 피로를 느끼며 SNS로 맺는 가벼운 관계를 선호하게 됐다. 타의에 의해 연결을 유지해야만 하는 전체주의적 관계에서 벗어나, 나 자신으로서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나 SNS가 완벽한 해답은 아니었다. 2030세대가 대면보다 비대면 관계를 선호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전통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기 위해 세운 방어벽이었다. 수직적 관계와 일방적인 간섭, 소통의 부재 등 기존관계에서 오는 피로 때문에 이미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개인이 자의로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형성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관계가 주던 피로가 없다면 굳이 대면을 꺼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맺은 관계는 보다 가볍고 느슨한 형태다. 이 ‘느슨한 연대’는 이미 수많은 트렌드 서적에서 2020년의 대표적인 트렌드로 꼽은 바 있다. 

기존 관계에서 벗어나 동호회 등 취미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는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자율적인 성격의 모임도 뒷풀이 등 친목활동을 통해 전통적 관계로 변화하곤 했다. 진하고 끈끈한 정과 함께 관계의 수직성과 개인의 영역 침범이 강해진 것이다. 그러나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은’ 밀레니얼이 만든 새로운 관계는 다르다. 독서와 토론을 위해 모이든, 삶과 취향을 함께 나누든, 동네에서 밥친구나 술친구를 찾든, 함께 한강을 뛸 사람을 찾든, 혹은 주기적으로 모이든 1회성 모임을 하든 핵심은 하나다. 끈끈한 친목 중심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수평적인 형태로 느슨하게, 그러나 연결된 상태라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느슨한 끈을 조금 당길 수도, 더 느슨하게 풀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자기 뜻에 달려 있다. 관계를 형성하되 나를 잃고 싶지는 않고, 외로움은 싫지만 과도한 간섭은 더 피하고 싶은 현대인의 심리를 적극 반영한 관계의 형태이자, 가볍지만 가볍지 않게 서로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영화 <제인 오스틴 북클럽>(2007)은 제목처럼 오로지 제인 오스틴을 읽기 위해 모인 6명의 북클럽 멤버들의 이야기다. 2월엔 <엠마>, 3월엔 <맨스필드 파크>, 4월엔 <노생거 사원>을 읽으며 서로 의견을 나눈다. 대화를 통해 얻은 통찰로 각자 처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어디의 누구’라는 사회적 역할보다, 제인 오스틴의 책에 관해 의견을 내는 북클럽 멤버로서 개인의 존재가 부각되는 수평적 관계다. 취향을 중심으로 모였지만, 사람이 모인 곳이라 삶도 얽힌다. 그러나 서로를 얽매지는 않는다. 함께 취향을 쌓아갈수록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견고해지는 모습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찾는 새로운 관계는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새로 맺는 독립적인 취향의 관계

이런 관계는 한편으로 헤어짐이 산뜻하다는 특징도 있다. 전통적인 관계는 개인과 개인 외에도 얽힌 요소가 많기 때문에, 끊고 싶다고 해서 쉽게 끊을 수 없다. 모두가 한 번쯤은 끊지 못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피로를 호소하고, 인터넷에는 ‘싫은 사람 손절하는 꿀팁’이 떠돈다. 그래서 내가 원하면 언제든 관계 맺고, 더 이상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끊을 수 있는 SNS상의 관계는 편리하다. 하지만 버튼 하나로 관계를 끊어 버리고, 이유도 모른 채 상대에게 ‘차단’을 당하는 관계는 아무래도 외롭고 공허하다. 가볍고 느슨한 관계는 분명 SNS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오프라인으로 옮겨지며 조금 더 따뜻하고 가까워졌다. 

다만 친목으로 인해 전통적 관계로 방향을 틀 수 있는 여지는 언제나 차단한다. ‘우트’에서 동네 이웃 간의 게더링을 위해 만들어진 채팅방은 48시간이 지나면 폭파된다. 폐쇄적인 친목이 아닌, 열려 있는 커뮤니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오픈런’ 역시 마찬가지다. 러닝이 끝나고 맛집을 찾거나 술을 마시는 소규모 ‘오픈런’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회비 정산이 끝나면 단톡방을 닫는다. 이번 모임이 재미있었다고 해서 연연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다음 ‘오픈런’이 열렸을 때 다시 참가하면 된다. 사람과 사람이 대면해 교류하기에 온라인상의 관계보다 더 적극적이지만, 전통적 관계처럼 복잡하게 얽히지 않는, 가벼움과 무거움 그 중간 어디쯤의 관계다. 

한편, 지금은 여가생활에도 생산성이 필요한 시대다. 여가는 분명 ‘남는 틈’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자기계발을 종교처럼 신봉하는 시대는 어느새 여가를 ‘의미 있게 보내야 하는 시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일상 속에서 나를 찾는 여정을 지속하는 밀레니얼들에게 여가생활이란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시간이자, 외부에 나를 표현하는 도구다. 그래서 이 새로운 관계에서는 특별한 공간이나 세련된 취향에 대한 욕망이 드러나기도 한다. 

주택을 앤틱한 분위기로 개조한 ‘취향관’은 들어설 때부터 분위기가 남다르다. 마치 이국의 호텔에 들어선 듯, 컨시어지에 체크인하는 형태로 입장한다. 3개월, 6개월 단위의 멤버십에 가입하면 공간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고, 각종 모임이나 강연에 참여할 수 있다. 오가며 친해진 멤버들이 모여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도 한다. 취향이 비슷한 문화애호가들이 모이는 멤버십 살롱을 표방하는 도서관 ‘소전서림’은 1일 5만원, 연회비 66만원이라는 꽤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공간과 희귀 장서에 이끌린 사람들이 꾸준히 찾고 있다. 이렇게 특별한 공간에서 특별한 커뮤니티의 멤버가 돼 주말을 보낸다는 것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다. 

타인의 취향과 안목에 대한 동경이 드러나는 대목도 있다. ‘남의 집 프로젝트’에서는 집주인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다. 글을 쓰는 집주인의 서재를 탐방하기도 하고, 차 애호가인 집주인과 함께 다도를 배워보기도 한다. 집주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집이라는 공간에 모여 타인의 안목을 배우고, 같은 취향과 호기심을 공유한다. 

단순 취미를 넘어 커리어적 연대를 지향하는 모임도 있다. 성수동의 ‘안전가옥’은 창작자를 위한 작업실이자 커뮤니티를 표방한다. 각자의 창작활동을 지원하지만, 공통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책을 출간하기도 한다. ‘헤이 조이스’는 일하는 여성을 위한 연대다. 멤버십에 가입하면 아지트, 라이브러리, 미팅룸, 요가 스튜디오, 팟캐스트룸 등을 공유 오피스처럼 사용할 수 있고, 각종 취미 모임과 세미나를 통해 멤버들끼리 자유롭게 네트워킹할 수 있다. 커리어와 관련된 모임이지만, 이전 세대가 만든 각종 협회와는 달리 무엇도 강제되지 않는다. 느슨한 관계이지만, 개인의 발전에 더욱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다. 

취향과 삶의 방향을 중심으로 하는 가볍고 느슨한 관계의 종류가 다양해짐에 따라, 특별한 취미를 영위하고 특별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모임의 일원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도 때때로 드러난다. 덕분에, 본래의 목적보다 형식과 외관에 치중하는 모임이 구성되기도 한다. 그런 경우 회비와 참여 기준이 과도하게 높아지므로, 결국 경제적 여건에 따라 관계의 계급이 분화될 우려가 있다. 또한, 일부 독서모임은 책보다 모임을 구성하는 멤버에 대한 관심이 더 높다는 비판을 받는다. 모두 목적이 변질된 경우다. 

몇 가지 단점이나 비판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느슨한 관계 맺기’는 계속 확산 중이다. 원하는 관계 맺기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인간은 홀로 외로운 시간을 버티기는 힘든,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나 이미 맺고 있는 전통적 관계에서는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인해 회사와 학교 등 무리 지어 관계 맺던 공간들이 와해된 상태다. 이 재난 속에서 버티며, 그리고 이제 과거의 생활방식으로는 완전히 돌아갈 수 없는 나날을 맞이하며, 타의에 의한 관계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가 되어보고 진정 원하는 삶을 생각해본다. 아마도 우리는 앞으로 더욱 점과 같은 형태의 개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점과 점을 이어 원하는 관계를 엮어가는 삶은 가속화될 것이다. 

관계가 단절된 현대사회라고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관계를 원한다. 종류만 다를 뿐이다. 소속그룹 단위의 관계에서 벗어나 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찾아 나선다. 타의에 의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대신,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내가 ‘나’일 수 있는 관계를 만든다. 관계가 가벼워졌다고 한탄하는 이도 있을 테지만, 타의로 끈끈하게 얽힌 관계라고 해서 깊이 있다는 보장이 있을까.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온전한 개인으로 서로를 마주 본다. 좋아하는 것을 함께 누리고, 서로 다른 부분은 존중한다. 각자의 영역에 서서 원하는 속도와 강도로 느슨한 끈을 잡아당긴다. 자신만의 속도와 강도를 찾는 과정은 내가 누구인지 다시 발견하고 취향을 단단히 쌓으며 삶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과 같다. 어쩌면 이것은 제대로 성장한 사람들 간에 맺어야 하는 관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독립적인 개인의 관계를 새로 쓰는 방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글·김지연
예술 에세이스트. 문화와 예술에 관한 글을 쓰고 전시를 만들고 있다. 홍익대 예술학과와 경북대 로스쿨을 졸업했으며, 미술전문지 <그래비티 이펙트>의 미술비평 공모에서 입상했다. <샤갈·달리·뷔페>전과 <그대 나의 뮤즈>전을 기획했다. 저서에 『마리나의 눈』(2020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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