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8월호 구매하기
[서성희의 시네마크리티크] 한국전쟁 영화와 여성 '은마는 오지 않는다'
[서성희의 시네마크리티크] 한국전쟁 영화와 여성 '은마는 오지 않는다'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0.06.26 1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0년 6월 25일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날 볼만한 한국 전쟁 영화 한 편을 꼽으라고 하면, 1991년 장길수 감독이 만든 <은마는 오지 않는다>가 먼저 떠오른다. 대개 전쟁 영화 하면 전투 장면 위주의 스펙터클 넘치는 영화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영화는 한국전쟁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그린 영화이다.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카메라가 향한 곳은 전쟁터가 아닌 민간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전쟁 속, 시골 마을에 사는 한 여성의 인생역정을 통해 한 많은 우리 민족과 역사의 슬픔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안정효의 전쟁 문학 『은마』

영화는 1983년에 『하얀전쟁』으로 등단한 안정효 작가가 1987년 미국에서 발표한 영문소설 『Silver Stallion, 은마』를 원작으로 한다. 이 소설은 세계 문학계에 한국소설의 존재를 알린 작품으로 이후, 안작가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미늘』 등에서 현대인의 삶 속에 숨은 어둠의 그림자를 탁월하게 묘사한 소설들을 연이어 내놓았다. 그 소설들 속에는 삶의 가치와 인간의 심성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작가 자신이 겪었던 유년 시절과 피난살이를 담아 완성한 작품으로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쓴 ‘전쟁 문학’이자, 민족사적 비극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사에 오래 기억될 작품이다.

이 원작을 영화로 만든 장길수 감독은 <밤의 열기 속으로>(1985), <레테의 연가>(1987),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1),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 등을 연출했다. 주로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들을 영화로 만드는 작업에 앞장서 ‘뉴 코리아 시네마’의 기수로 분류되는 감독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영화가 세계 영화시장의 변방에 속했지만, 해외시장 진출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은 있었다. 세계 속에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여온 영화중에 최초라는 키워드를 붙여 이 영화를 소개한다면, 이 영화는 제15회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과 각본상을 수상해 한국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전쟁통에 짓눌린 여성

영화는 한국전쟁이 한창인 인천 상륙작전 직후 강원도 춘천 근처의 작은 마을 금산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언례(이혜숙)’는 아들 만식이와 어린 딸을 데리고 과부로 살아가지만, 동네 주민들과 어울리며 부족함 없이 지낸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유엔군 병사들이 언례를 겁탈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언례는 마을 주민들에게 멸시와 따돌림을 당하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힘겨운 삶을 살게 된다.

 

먼저 정신을 차린 만식이 엄마에게 괜찮냐고 묻는 장면

언례는 성폭력을 당한 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두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엄마로서 예전처럼 살아보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지금처럼 옆집 사람이 누군지 모르고도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닌, 마을이 오랫동안 지켜온 관습과 전통을 바탕으로 일과 삶을 분리할 수 없는 자급자족 농경사회에서 전체 마을 주민이 언례에게 가하는 정신적인 폭력은 육체적 폭력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분명 비극의 시작은 미군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언례를 몰락시킨 건 미군이 아니라 언례를 한평생 품고 살았던 마을의 전통과 사상 때문이었다.

당연히 ‘언례’라는 여인은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큰 피해와 아픔을 겪은 인물인데, 왜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척과 멸시를 당하는 인물이 되었을까. 이건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악습이기도 하다. 고려나 조선에서 침략자들에게 일부 여성을 공물로 바침으로써 나머지 여성의 ‘순결’을 보호하려던 전통이 있었다. 병자호란 직후 공물로 바쳐져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을 ‘환향녀’라 불렀다.

청나라 군인들에게 정조를 잃은 여자들은 바로 귀향하지 못하고 청의 사신들이 묵어가던 홍제원이 있던 서대문 밖에 머물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환향녀들로 하여금 냇물에 몸을 씻게 하고 그들의 정절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친지들은 환향녀들을 받아들이기를 기피하고 천시했다. 정절을 지켜야 하는 관습대로라면 그녀들은 불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쟁으로 엄청난 아픔을 겪은 여인을 같은 민족이 오히려 더 외면하고 멸시했다. 과연 이 여성들은 어떤 삶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원래 남의 집일을 해주며 근근이 남매를 키우며 살아가던 언례에게 마을 전체의 외면은 아이들과 자신의 생계와 직결되었다. 어린 남매와 살길이 막막해진 언례는 마을 부근에 들어선 미군기지 부근에 생긴 클럽에 들어가 생계를 연명한다. 그럴수록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은 더욱더 깊어지고, 아들 만식은 엄마로 인해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갈등을 겪는다.

 

한국사회 전통 마을의 붕괴

이 영화는 전쟁을 겪는 여성과 아이들의 황폐해진 삶을 세밀하게 잘 그려낸 측면에서도 뛰어나지만, 한국 전쟁 중, 미국 문화가 유입되면서 급속하게 무너지는 한국 전통적인 마을의 붕괴 과정도 눈여겨 볼만하다.

기존 유교 가치관을 평생 지키며 살아온 마을 훈장(전무송)이 급변하는 시대와 마을로 들어오는 외세의 침입에 느꼈을 박탈감은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자기 집에서 키우다시피 한 언례의 처지가 딱하지만, 자신이 평생 지켜온 가치관을 단 한 순간에 버려야 하는 상황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훈장이 처음 언례집으로 찾아왔을 때, 공손히 대하던 언례도 훈장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기 체면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과 관습의 맹점을 보게 된다. 결국 언례는 자신과 어린 자식들을 마을에서 강제로 쫓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소리를 높여 훈장을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언례가 그동안 죄인처럼 지내다, 속 시원하게 자신의 뜻과 심정을 토해내는 이 장면은 전통과 관습으로 봉해놓았던 것들이 더는 버티지 못할 때 분출되어 변화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절대 잊지 말자, 은마는 오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이자,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은마’는 장군봉 설화에 등장한다. 옛날 북쪽에서 오랑캐가 쳐들어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마구 죽일 때 장군봉에서 장수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 장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은빛 말을 타고 전쟁터로 나가 사흘 만에 오랑캐를 무찌르고 나라와 백성들을 구한 후 은빛 말을 타고 떠났다. 이 땅에 언제가 또다시 난리가 터지면 장군은 은마를 타고 온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의 환란 속, 마을 사람들을 구원해 줄 누군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쟁은 모두의 비극이지만, 어쩌면 가장 피해를 많이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소재는 불편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전제로 하고 있기도 하고, 전쟁의 비참함은 늘 불편한 감정에 휩싸이게 해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할 필요는 있다. 아무리 전쟁이 나도 절대 ‘은마는 오지 않는다.’ 반전영화가 필요한 이유이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으로 영화영상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시 종이신문 과월호를 발송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