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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멀티버스와 와해의 매혹, 그리고 자결의 스펙터클:〈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멀티버스와 와해의 매혹, 그리고 자결의 스펙터클:〈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2.02.2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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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감상하고 읽기를 권합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외적 확장성, 선택인가 기획인가.

무엇이 피터 파커(톰 홀랜드, 이하 ‘피터’)의 무리한 부탁을 수용하게 했는가.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이하 ‘스티븐’)는 피터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마땅한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 관용은 ‘기억을 삭제하는 주술’에 대한 것이 아니다. 스티븐은 기억을 삭제할 수 있는 주술적 능력이 수 있고, 이는 잘못된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대안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문제는 능력을 발휘하는 중에 피터의 부탁에 따라 주술의 명세를 변경하는 것이다. 극 중 스티븐이 수행하는 주술은 비가역적이기 때문에 일단 수행되면 되돌릴 수 없다. 주술에 앞서 차분하게 명세를 정리하고 주문을 실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올바른 방법이다. 스티븐의 잘못은 피터에게 미리 명세를 정리하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스티븐은 피터로부터 부탁을 받은 상황이기 때문에 잘못은 사태에 전략적으로 접근하지 못한 피터에게 있다고 보는 편이 옳다.

피터에게 자신을 변호할 요소가 있다면, 피터는 어리다는 것이다. 그는 어리기 때문에 일정 부분의 어리숙함이 허락되는 존재다. 다만 피터로 인해 ‘일정 부분’을 초과하는 다수의 사람이 피해를 보았다. 이에 대해 피터는 본인이 문제 상황에 전략적으로 접근할 만큼, 혹은 지혜롭거나 성숙한 모습을 갖출 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고 항변할 수 있다. 잘못에 대한 책임은 다시 어른인 스티븐에게 넘어간다. 피터에게 주술의 특성을 충분히 인지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스티븐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피터가 무리한 부탁을 할 때 이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예지능력도 충분히 사용하지 않았다는 잘못이 생긴다. 스티븐은 자신에 대한 반성이 부족했고, 동시에 피터에 대한 배려도 부족했다. 따라서 스티븐에게 잘못이 있다면, 이는 스티븐 자신의 역량을 벗어나는 관용을 피터에게 베푸는 실수 정도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만약 스티븐이 피터에게 주술 중 주술의 명세를 변경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푼 이유가 스티븐의 실수라면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 부족한 것은 스티븐의 고유한 단점 중 하나인가? 만약 반성할 능력이 부족한 게 스티븐의 고유한 특징이라면 인피니트 사가의 닥터 스트레인지 캐릭터는 일관성에 문제가 생긴다. 특히 <어벤저스: 엔드 게임>에서 ‘에이션트 원’(틸타 스윈튼)과의 관계를 조정해야 하는데, 설명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노 웨이 홈>에 한하여) 설정과 우연적 측면에 크게 기대야 한다는 단점이 생긴다. 피터의 무리한 부탁을 수용한 것은 시리즈 콘텐츠로서 상당한 위험을 부담하는 행위였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은 정확히 여기서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꺼낸다.

멀티버스의 등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멀티버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상황을 되돌아보면 <노 웨이 홈>이 서사적으로 설득해야 할 부분은 피터가 스티븐을 닦달하는 이유, 그리고 스티븐이 즉흥적으로 피터에게 관용을 베푼 이유다. <노 웨이 홈>은 설명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설정을 제시하며 설득을 유보한다. <노 웨이 홈>이 택한 유보는 멀티버스가 이야기상 필요했기 때문이 아닌, 멀티버스를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서사를 통해 최소한의 등장 배경을 마련한 모습처럼 보이게 만든다. <노 웨이 홈>은 이야기의 내적 완결성을 따라가기보다는 외적 확장성을 선택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피터의 부탁을 수용하게 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꿔 물을 수 있다. <노 웨이 홈>의 멀티버스는 기획인가, 선택인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멀티버스가 소환되기까지, 혹은 선택에서 출발해 기획으로 도착한 스펙터클의 매혹

멀티버스를 꺼낸 이유가 기획 때문이라면, <노 웨이 홈>의 멀티버스에는 쓸모에 대한 강력한 변론의 여지가 생긴다. 지금까지 실사영화에서는 한 번도 스파이더맨‘들’이 한 영화에 함께 등장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프랜차이즈 스파이더맨을 종합하는 <노 웨이 홈>의 외적 확장성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변론인 셈이다. 더불어 상업적 성공을 충분히 기대해볼 만한 아이디어였다. 캐릭터 IP 자체가 충분한 시간 동안 긍정적인 시장반응을 쌓아왔고, 거기에 판권 분쟁 해결 등 여러 가지 요인들도 호재로 작용해 <노 웨이 홈>을 하나의 문화적 이벤트로 만들 수 있었다. 실제로 스파이더맨은 코로나 대봉쇄 이후 최초의 10억 달러 흥행작이 되었다. 현재까지 흥행은 진행 중이며, 약 17억 달러로 역대 흥행 6위에 올라섰다.

멀티버스를 꺼낸 연유가 기획이었다는 논점은 ‘서사냐, 세계관이냐’를 따지는 흥미롭고 깔끔한 논제를 제시하나, 여기에는 한 가지 난감한 대전제가 깔린다. 기획이 서사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획이 서사의 전체적 조망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조망이 전체 서사와 같다는 주장은 마치 프로세서 없이 파워서플라이만 있는 컴퓨터도 컴퓨터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파워서플라이는 컴퓨터의 핵심 부품이지만, 그것이 곧 컴퓨터일 수는 없다. 나아가 파워서플라이가 아무리 좋더라도 프로세서가 좋지 않다면, 파워서플라이가 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멀티버스를 꺼낸 이유가 기획적 장점 때문만이라면, 서사의 일부가 전체 서사를 압도하는 기획적 초과상태가 무엇인지 해명해야만 한다.

반대로 스티븐이 피터의 무리한 부탁을 수용한 것이 선택이었을 경우, 굳이 멀티버스를 등장시킨 선택에 대해 수용자를 이해시킬 수 있을 만한 해명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 송형국 평론가는 멀티버스의 쓸모는 영웅과 빌런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송형국 평론가는 미국의 대중문화 평론가 톰 폴라드(1)를 인용하며 빌런들과 히어로의 관계는 9.11테러(2001) 이후 미국 사회의 트라우마를 꾸준히 건드려왔다고 지적(2)한다. <노 웨이 홈>의 히어로와 빌런들은 2001년 이후 미국 사회의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셈이고, 멀티버스는 트라우마에 대한 응징이 아닌 구원을 위한 무대가 되고 있다고 피력한 셈이다.

송형국 평론가는 톰 폴라드의 주장에서 <노 웨이 홈>의 멀티버스가 기억을 매개로 치료와 치유의 선순환을 이루며 ‘구원의 메시지’를 보편적으로 확대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멀티버스라는 순환 우주적 배경이 영웅에게 ‘한발 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모습’을 부여하여, 영웅에게 참회와 반성이라는 태도를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즉, 멀티버스는 수용자가 작품에서 유의미한 메시지를 획득할 수 있는 배경적 장치로 존재 가치를 발휘한다고 관철한 셈이다. 이러한 송형국 평론가의 주장은 영웅이라는 캐릭터를 해석하는데 매력적인 관점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멀티버스를 등장시킨 것에 대한 해명의 포인트는 되기 어려워 보인다.

멀티버스가 수용자에게 참회와 반성이라는 태도를 호소하기 위해 등장했다면, 이는 영웅이 과오를 깨닫고 반성하는 모습은 멀티버스라는 순환 우주가 제공하는 서사적 특징이어야 한다. 따라서 멀티버스의 영웅은 항상 자신의 잘못을 한발 늦게 깨달아야 한다. 이는 개선과 보완을 전제하는 일반적인 참회와 반성의 모습일 수 없다. 영웅의 다짐이 참회와 반성의 모습을 가진다 한들, 영웅은 멀티버스라는 제약으로 인해 참회와 반성을 수행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해진다. 나아가 만약 멀티버스의 영웅이 ‘한발 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모습’으로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그 모습은 송형국 평론가가 지적한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영웅-빌런의 관계 내에서는 구원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절망과 좌절에 가까워 보인다.

더불어 ‘한발 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모습’의 바탕이 되는 9.11테러, 그리고 부시 정부부터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이 과연 전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만약 테러와 전쟁이 메시지 차원의 보편성을 제공했다면, 그것은 사태에 동원된 자들이 피해-가해의 관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가해에 속한 관점과 입장 내에서는 여전히 분열된 상태다. 관계를 공유했기 때문에 서로의 맥락과 사정을 이해했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것이 피해와 가해를 같은 사건으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미 피해-가해를 공유한 상태에서 구원과 가장 어울려 보이는 용서를 타계하는 것에는 더욱 복잡하고 난해한 전제가 필요해 보인다. 따라서 캐릭터가 피해-가해 관계를 공유했다는 사실은 보편으로 나아가기에 부족한 전제로 보인다.

하지만 관계를 거두고 그 자리에 재난(Disaster)이라는 요소를 대입해 생각해보면 꽤 많은 요소를 보편의 영역으로 입장시킬 수 있다. 물론 재난이 피해-가해의 관계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관계의 인과를 숙명론 혹은 결정론적 영역에 묶는 것에 가깝다. 9.11테러 혹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발생한 관계는 애초에 불가해하다고 보는 관점이며, 동시에 피해-가해 관계는 우연의 영역에 있다고 호소하는 것에 가깝다. 이는 사태에 가담한 자 중 그 누구도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는 환상에 가깝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했던 전체 서사를 압도하는 기획적 초과상태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해명의 가닥이 있다. 테러와 전쟁이라는 사태가 제공한 스펙터클을 통과할 때, (동원된 자들을 포함하는) 목격자에게 그 사태는 재난의 일종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과 같이 피해와 가해의 인과가 명확한 사태 속에서 스펙터클을 객체(Object) 삼아 피해-가해 경험을 대상화(Objectify)하는 것은 환상을 실재로부터 유리시키는 전략적 인식이다. 스펙터클을 대상 삼는다는 것은, 스펙터클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과 같으므로 전략보다는 기획의 영역에 속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 기획을 콘텐츠 혹은 이야기 제작을 위해 결정하려면 반드시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우위 중 어떤 것이 콘텐츠에 유익한지 비교하는 선택의 과정이 필요하다. 스펙터클을 객체(Object) 삼아 피해-가해 경험을 대상화(Objectify)하는 것은 피해-가해의 관계가 지닌 인과를 조작하는 결정이고, 나아가 맥락을 재설정하는 사태다. 그렇다면 콘텐츠는 이를 왜 필요로 하는가?

‘객체 지향 존재론’(Object Oriented Ontology)으로 유명한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은 실재를 구성하는 사방객체(Quadruple Object)의 작용을 설명하며 객체 간 연관이 깨지는 순간을 분석한다. 흥미롭게도 하먼은 실재 객체(Real Object)와 감각 속성(Sensual Qualities) 간의 연관이 깨지는 순간 ‘속성을 초과하는 암시’(allude)가 일어난다고 지적(3)한다. 하먼은 이를 객체에 매료(captivate)되는 순간이라고 해석하며, 이러한 경험이 곧 매력(allure)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관철한다. 다시 말해, 객체가 생생한 감각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는 모종의 신비를 느낀다는 것이다.

테러와 전쟁을 재난의 스펙터클로 소화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신비화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은 셈이다. 동시에 상품으로 존재하는 콘텐츠는 맥락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도 그 콘텐츠에 홀릴(lure)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거부하는 무언가를 우회적으로라도 자각시킬 가능성의 맹아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전체 서사를 압도하는 기획적 초과상태는 이야기 그 자체보다 우월할 수 있다. 다만, 위험성을 부정할 수는 없기에 이 스펙터클은 매력보다 한 단계 심화한 매혹(Fatal)에 가까워 보인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멀티버스, 자결(Self-Termination)의 스펙터클을 위한 무대

세계관은 수용자의 기억과 경험보다 빠르게 확장해야 한다. 동시에 프랜차이즈는 세계관이 정한 범주 내에서 수용자와 끊임없는 공모를 유지해야 한다. 즉, 세계관의 확장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관이 지녀야 할 방향에 대한 요구는 경험방식이 수동적일수록 이러한 요구는 강해진다. 2시간 내외의 시간 동안 수용자를 붙잡아야 하는 영화는 세계관 경험에 있어 수동적인 방식을 벗어나기 어려운 매체 중 하나다. 그만큼 세계관의 확장 방향은 수용자와 공모를 유지하는 방식인 동시에 프랜차이즈 영화의 중요한 숙제이자 프랜차이즈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서사의 핵심 요소다.

매혹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하고 정석적인 답안이다. 매혹을 위해서 스펙터클을 소환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동시에 이것을 담아낼 수 있는 효과적인 그릇도 필요하다.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에 있어서 세계관의 확장 방향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삼부작(이하 ‘트릴로지’)은 캐릭터와 정체성을 접합하는 대신 캐릭터와 공간을 접합하는 방식으로 매혹의 그릇을 마련했었다. 샘 레이미는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 이하 ‘파커’)에게서 죄책감과 사명감으로 점칠된 파커의 내면과 심리에 천착하기보다 그가 뉴욕, 그리고 뉴요커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묘사하는데 더 공을 들였다.

당연하지만, 트릴로지에서 파커가 관계를 맺고 있는 뉴욕은 9.11테러로 인한 피해가 드리운 뉴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트릴로지의 뉴욕을 실재에서 연장된 장소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트릴로지의 뉴욕은 형상(eidos)은 같으나 관념(idea)은 다른 이의(homonym)적인 장소다. 같은 공간이나 다른 장소를 형상하는 환등적 세계인 셈이다. 이 경우, 송형국 평론가가 인용한 고전적 인식은 유효하다. 트릴로지의 뉴욕이 9.11테러 이전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특히 트릴로지를 관통하며 여전히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에 유효한 영향력을 행사는 “큰 힘에는 큰 책임 따른다”라는 전언은 필립 로스(Philip Roth)가 제시했던 목가에 대한 판타지(4)가 작동하는 방식으로부터도 멀지 않다.

샘 레이미가 장소에 대한 향수와 관계를 거쳐 구축한 스펙터클은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이하 ‘어메이징 시리즈’)에서도 유효하게 작동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크 웹은 학교라는 공간을 바탕으로 스펙터클을 구축한다. 어메이징 시리즈에서도 관계는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 트릴로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메이징 시리즈는 트릴로지와는 달리 장소보다 캐릭터 간의 관계에 더 집중한다. 트릴로지에서 메리 제인(커스틴 던스트)과 해리 오스본(제임스 프랑코)이 뉴욕에 살았다는 정보는 대단히 중요한 정보였다. 하지만 어메이징 시리즈에서는 피터 파커(앤드류 가필드)와 그웬 스테이시(엠마 스톤)이 학생인 것과 빌런인 커트 코너스(리스 이판)이 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어메이징 시리즈의 학교는 트릴로지의 뉴욕과 같이 인물들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것 이상의 기능은 수행하지 못한다. 이는 뉴욕이 실재하는 도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메이징 시리즈가 내세운 학교는 임시적인 가상 공간으로, 트릴로지의 뉴욕처럼 실재 객체와 감각 속성 간의 연관이 깨질만한 계기를 마련하여 매력을 소환할 수 있는 상황이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릴로지의 뉴욕은 테러라는 강력한 폭력을 기점으로 실재 객체와 감각 속성의 연관이 와해(Disruption)한 공간이며, 뉴욕에 새겨진 폭력의 날인(Mark)은 공간을 장소로 만들 수 있는 매혹을 제공하는 장소다. 이미 실제 공간에서 계기가 마련된 셈인 것이다. 물론, 매혹에 내재하는 위험을 관계 설정들을 통해 제어한 것은 샘 레이미의 연출적 능력의 공이 크다.

마블 유니버스의 스파이더맨(마블 스파이더맨) 또한 어메이징 시리즈처럼 매력의 계기가 선제적으로 제공된 상황은 아니었다. 어메이징 시리즈에서 학교라는 공간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인물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방식도 어메이징 시리즈와 대단히 유사하다. 하지만 마블 스파이더맨이 어메이징 시리즈, 나아가 트릴로지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서사가 유니버스 안에 속한다는 점이다. 마블 스파이더맨에서 스파이더맨의 서사보다 중요한 것은 마블 유니버스의 세계관이 가지는 방향과 궤적이다. 피터가 마블 유니버스의 방향과 궤적을 벗어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피터가 유니버스의 궤적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블 스파이더맨은 여기서 과감하게 피터를 유니버스의 궤적에서 삭제하는 결단을 내린다. 여기서 마블은 멀티버스를 등장시키는데, 이는 멀티버스를 계기로 캐릭터가 쌓아온 궤적 자체를 와해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흥미로운 점은 멀티버스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해 종결 주체(Subject Termination)에서 자결(Self Termination)의 자리로 이동한다는 점이다. 만약 스티븐이 미래를 볼 수 있는 상태에서 피터의 무리한 부탁을 수용했다면, 그 무엇을 제시하든 결과적으로 피터와 스티븐이 속한 유니버스의 현 상태에서는 종결 자체가 곧 완수이자 성과(Accomplishment)이기 때문으로 추리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피터는 스티븐을 통해 유니버스의 궤적에서 삭제되는 대신 유니버스의 방향을 제시하는 특권적 자리에 놓인다.

종결 자체가 곧 완수라는 점은 다분히 결정론적인 세계다. 이는 스티븐이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타노스를 이길 경우의 수가 ‘1400만번 중 1’이라고 언급한 것과 같다. 다만 스티븐이 ‘너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무언가 대안(5)을 찾았고, 이를 피터에게 제안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피터는 여기서 자결을 택한다. 피터가 왜 자결을 택했는지 설명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데, 이는 피터가 자결을 선택한 것이 상황에 따른 선택보다는 심경에 의한 선택에 가깝기 때문이다. 피터는 스티븐과 같이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스티븐이 선택지를 주었을 때 피터는 기억이 남은 세계에 머무는 것이 가능했다.

간단하게 피터가 자립을 선택했다고 믿을 수도 있겠으나, 이 믿음을 수용하기 힘든 이유는 피터가 기억이 남지 않은 세계로 넘어간다면, 피터의 존재를 증언할 이들이 모두 사라진다. 이 점 때문에 피터의 선택을 여러모로 자결로 읽힌다.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종결과 자결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피터는 스티븐으로부터 종결을 유보 받은 뒤 트릴로지, 그리고 어메이징 시리즈의 ‘어른’ 스파이더맨과 함께 빌런을 구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를 바로잡을 기회라는 점이 아니다.

피터는 종결과 자결 사이에서 마법에 가까운 설정들(트릴로지와 어메이징 시리즈의 스파이더맨들이 모인 이유가 ‘스파이더센스’ 때문이었음을 기억해보라)과 그로 인한 마법적인 경험을 통과한다. 종결과 자결 사이에는 불가해하며 불가사의한 사건들이 개입되어 있으며, 피터가 불가해와 불가사의를 해결하고 소화하는 방식이 자결인 셈이다. 바꿔 말하면 어른이 된 스파이더맨들을 만나고, (마찬가지로 마법에 가까운) 약물을 통해 빌런들을 구제한 것은 이내 곧 닥칠 종결을 맞이할 피터에게 스티븐이 허락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유보이자 피터가 종결을 수용할 수 있도록 제공된 스펙터클의 매혹으로 보인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두머(Doomer), 와해의 스펙터클 앞에 선 매혹적 자결 혹은 유폐

종결이 곧 완수인 상황을 맞이한 순간부터 피터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불가해와 불가사의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된다. 이는 결국 피터가 기억이 남아있는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음 의미한다. 피터의 자결은 한편으로는 자발적인 유폐다. 피터 또한 자발적 유폐가 세계에 홀로 남겨지는 것임을 알고 있다. 피터 앞에 주어진 선택지는 세계와 함께 (일단) 망가지거나, 세계를 떠나 유폐되는 것이다. 피터는 자발적 유폐를 선택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도, 어른이 된 스파이더맨들도 피터의 유폐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셈이다. 세계는 정상을 되찾았지만, 피터는 혼자다. <노 웨이 홈>이 피터에게 선서한 결말은 다분히 영웅적이지만, 저변에는 ‘두머’(Doomer)가 내재하고 있는 정서 혹은 정념이 아른거린다.

'두머 보약'의 2009년 첫 형태. (출처: 위키피디아)
'두머 보약'의 첫모습(2009).
(출처: 위키피디아)

두머 혹은 필 가이(Feels Guy)는 4chan(6)에서 세바스티안 그로데츠키(Sebastian Grodecki)가 발굴한 밈이다. 그의 계정을 따서 ‘두머 보약’(Doomer Wojak)이라고도 부른다. 두머는 맷 퓨리(Matt Furie)의 ‘페페 더 프로그’(Pepe the Frog)와 함께 서구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래된 가장 유명한 밈 중 하나로, 9.11 테러와 대침체같이 사회문제와 경제 불황을 관통하며 실패를 체득한 20~30대 무리를 지칭한다. 간혹 세대론으로 분류되곤 하지만, 아직 두머에 대한 디지털 인류학 연구가 유의미할 정도로 누적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두머의 가장 큰 특징은 주류문화가 아닌 서브컬쳐에 유폐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자의적인 유폐보다 주류문화 진입 자체에 실패한 타의적인 유폐(7)에 가깝다.

두머는 주류 진입에 실패한 이들의 판타지와 같다. 이들이 내재한 감성은 와해된 세계로부터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는 피해의식이 아니라, 자신들은 (그 과정이 어떠했든) 세계의 와해로부터 닫혀있다는 은둔과 대단히 유사한 베타성에 근거하고 있다. 두머에게 은둔은 일종의 사건이다. 두머의 은둔은 세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인지했으나, 세계로부터 주어진 통과의례나 관습적 의무 혹은 발생한 문제를 본인이 주어진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자력으로 판단할 때 무언가를 시행하여 산출된 결과에 가깝다. 히키코모리가 자신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태 때문에 심적 타격을 입고 발생한 회피성 행위라면, 두머는 타의를 자의로 해석하는 일종의 스펙터클과 유사한 사태인 셈이다. 두머에게 있어 은둔이 주는 매혹은 타의적이라는 실재 객체를 자의라는 감각 속성으로 해석하여 자발적으로 속성을 초과하는 암시를 부여하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피터가 자결을 택한 과정은 두머가 타의를 자의로 해석하여 스스로 세계에 암시를 부여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빌런을 치료하고 세계를 구한다고 피터가 자신 앞에 주어진 종결을 이해할 수 없으며, 스티븐과 달리 그것을 수용할 능력도 없다. 피터는 그 순간 ‘나만이 없는 거리’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두머의 은둔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억 속에 자신만 알고 있는 표식을 남기는 일과 다르지 않다. 피터의 선택은 자신이 행한 공의를 자신만 소유할 수 있는 지극히 사적인 기억으로 편입시킨다. 이는 오래된 미래로 잔존하고 있는 재난의 스펙터클에 대한 간절한 기도임과 동시에 재난 자체의 소멸을 기다리는 것으로 윤리를 회복하려는 양면적인 시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노 웨이 홈>은 이 양면성 앞에서 순진할 정도로 단호하게 선의를 긍정한다. 이렇듯 자발적 암시와 스펙터클의 매혹이 내재한 와해의 어두운 신화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자발적 암시는 자신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것을 수용하는 방식 중 하나이며, 여기서 매혹을 발굴하는 것은 ‘유대 속에서 모두 혼자인 우리’(8)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암시는 피카소가 말했듯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을 사용”하는 행위다. 이는 영화가 환상에서 환등을 추출한 이유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블이 상업영화의 복잡하고 지난한 책임의 관계망 속에서 찾은 멀티버스의 쓸모이기도 할 것이다.

 

 

글·이현재
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 평론 신인상. 경희대 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으로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2018) 등의 연구를 보조・수행했다. 지금은 경희대 K-컬처·스토리콘텐츠 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에서 영화 평론을 쓴다.


(1) Tom Pollard(Leslie Thomas Pollard, 1947-2020). 『Hollywood 9/11: Superheroes, Supervillains, and Super Disasters』. Routledge. 2015.
(2) 송형국,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마블 영화는 어떻게 미국의 현실을 반영해왔나」. 씨네21, 2022.1.19.
(3) 이와 관련한 논의는 『Guerrilla Metaphysics: Phenomenology and the Carpentry of Things』(Graham Harman, Open Court Publishing Company, 2005)를 참고.
(4) 이는 목가적인 판타지가 아니라 목가에 대한 판타지다. 『미국의 목가』(1997) 참고.
(5) 아마 여기에 대한 답변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시퀄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5)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시퀄의 원제는 <Doctor Strange In the Multiverse of Madness>로, 존 카펜터의 걸작 <In the Mouth of Madness>(한국에서는 <매드니스>로 번역되었다)와 같이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At the Mountains of Madness)를 오마주한 제목으로 독해할 수도 있다. 독해가 오독이 아니라면, 창조자가 피조물에 의해 절멸당하는 원작의 플롯을 생각해볼 때 의미심장한 오마주로 보인다.
(6) 서구권 인터넷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사이트 중 하나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의 사이트와 비교하면 디씨인사이드와 비슷하다.
(7) 이와 비슷한 사례 혹은 과정은 폴란드 영화 <헤어터(Hejter)>(Jan Komasa, 2020)를 참고하라.
(8) We’re all alone in this together. ‘In this together’는 연대 혹은 유대로 번역할 수 없으며, ‘유대’는 끼워 넣은 오역에 가깝다. 마땅한 번역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각주에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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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영화평론가)
이현재(영화평론가) blueparanchung@gmail.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