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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얘기노래마당 <아치의 노래, 정태춘>
[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얘기노래마당 <아치의 노래, 정태춘>
  • 이승민(영화평론가)
  • 승인 2022.05.11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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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기억을 수반한다. 음악을 듣다보면 그 음악을 듣던 그 시절 나와 나를 둘러싼 상황과 감정이 소환된다. 생일날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정 날이나 장례식이나 결혼식같은 인간 대소사 희로애락의 순간에 늘 노래가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노래가 날을 기념하고 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개인의 기억과 감정을 연동시키기 때문이다.

노래명과 가수명을 전면에 내세운 <아치의 노래-정태춘>은 한 시대를 풍미한 민중 포크 가수 정태춘과 그의 음악을 다룬다. 정태춘을 다루는 여러 결이 있겠지만 영화는 다소 강직하게 그의 음악에 초점을 맞춘다. 보다 정확히는 영화는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방식인 전국 순회공연 ‘얘기노래마당’과 닮아있다. <시인의 마을>에서 시작해 그의 대표작 28곡을 담은 영화는 ‘노래’를 중심으로 하면서 그 속에서 정태춘의 ‘얘기’를 풀어낸다. 여기에 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 순회공연이 더해진다. 따라서 영화는 정태춘 박은옥의 “얘기노래마당”을 축으로, 영화 안과 밖,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정태춘 노래가 품은 시간의 나이테를 풀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정태춘이라는 인물을 파고드는 인물 영화가 아니라 정태춘이 부른 노래를 주인공으로 하는 음악 영화이다. 마치 공연장에 온 것처럼 정태춘의 노래를 듣고, 노래를 둘러싼 사연을 만나고, 그 노래와 함께했던 그 시절 너와 나를 만난다. 그리고 그 노래가 현재 서 있는 자리를 보여준다.

 

영화는 노래를 주인공으로 한만큼, 정태춘 음악 여정을 따라간다. <양단 몇마름>에 얽힌 평택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연, <촛불>과 함께 MBC 신인가수상을 받은 후 2집과 3집에서 겪은 어려움, 그 사이 변화한 대중음악 환경들, <떠나가는 배>와 함께 마침내 작가주의적 언더그라운드 포크가수로 자리매김하고, 시대의 변혁에 동참해 민중가수로 거듭나기까지 그리고 <아, 대한민국>과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비합법적 음반으로 사전검열 철폐를 성취해낸 일련의 여정을 당시 노래와 함께 담는다. 시대를 관통하고 시대와 함께한 정태춘 노래의 여정은 역시나 들끓는 시대를 주인공으로 삼거나 정태춘이라는 인물을 영웅시하지 않는 차분함을 가진다. 오히려 시기별 자료 영상의 흔적을 통해 정태춘이란 인물과 세상과의 관계를 상상하게 한다.

초기 정태춘은 대중 가수로 등장한 만큼 대중 미디어에 노출이 많이 되었지만, 그가 언더그라운드 포크 가수이자 민중 가수로 나아가는 여정에서는 점차 영상이 사라지고 사진으로 대체된다. 미디어 환경이 점차 나아지는 것을 감안하면, 민중가수로서 그의 전성기 활동이 거의 보여지지 않는 점은 그 자체가 현실을 반영한 다큐멘터리적 지점이다. 민중으로 들어갈수록 미디어 노출이 줄어든다는 점과 더불어 집회 현장 자체에서도 민중가요가 주인공이 아니라 지원 공연이었다는 점이다. 정태춘이 회고하듯 “더 직설적 더 사실적 더 강력한 단어로 거침없는 분노를 담아” 운동의 동력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영화는 이같은 시대 환경을 반영하는 동시에 반격하는 방식으로 시대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노래를 주인공으로 하되, 시대 속 부재한 그의 영상을 부재로 남겨둔다. 재연이나 인터뷰로 애써 채워넣기 보다 그 곳에 음악을 넣어 시대의 기억을 불러온다. 기록이 없는 활발한 활동들을 음악으로 비어내면서 채워가는 방식은 묘하게 당대 시절 리듬을 연상케한다.

 

영화는 정태춘 자체를 조망하거나 영웅시하지 않지만, 순간적으로 툭하고 인간 정태춘을 만나게 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사전 검열 제도를 폐지한 정태춘의 음악사적 업적을 다루는 장면이다. 영화는 당시의 상황을 저명한 음악 평론가의 목소리를 빌어 그 사건의 의미와 업적을 논한다.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박은옥 가수의 인터뷰가 나온다. 동료 가수이자 배우자인 박은옥은 정태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입장에서 한마디 한다. “정태춘씨가 제일 외로워 보이고 안되어 보이던 시간이 바로 그때” 였다고. 순간적으로 그를 공적 인물로만 담지 않고 인간 정태춘을 만나게 한다. 또 다른 한 장면을 더하자면, 정태춘이 대중가수에서 민중가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거창한 대의나 설명 없이 정태춘은 담백하게 말한다. “움직이면서(만나면서) 나도 변화되고, 변화된 것들이 작품으로 나오게 되었다.” 영화는 이 같은 순간들을 몇차례 만나게 한다.

<아치의 노래-정태춘>은 70년에서부터 현재까지 40년의 정태춘 음악사를 담지만, 음악과 함께 시대의 기억과 개인의 기억을 소환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노래가 나오면 이 노래를 듣던 그 시절의 나와 나를 둘러싼 상황이 풍경처럼 떠오른다. 기억은 시간은 사라지지만 계절과 질감은 남는다고 했던가. 그러나 영화는 과거 향수에 그치지 않고 정태춘의 노래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비판적 시대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누군가에겐 공감과 위로를 가진 치유의 음악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한바탕 정태춘을 다룬 얘기노래마당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듣다 보면, <꿈꾸는 여행자-박은옥> 이런 제목의 영화도 보고싶다는 바램이 생긴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 중이다.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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