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연과 상상 그리고 동선 <우연과 상상>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연과 상상 그리고 동선 <우연과 상상>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2.07.11 1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대하던 <우연과 상상>을 보았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느꼈던 실망감은 바로 잊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었다. 각각 다르지만 유사점을 공유하는 세편의 에피소드들을 연출하고 조율하여, 하나의 목적점이면서 영화를 감상하고 난 뒤에 발산하는 감흥과 생각들의 시발점으로 흐르는, 과잉과 산만함이 아닌, 단순하고 안정적인 드라이브의 탁월한 영화였다.

 

먼저 제목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왜 상상과 우연이 아니라 우연과 상상일까? 그것은 아마 이야기에 있어서 우연이 상상에 선행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은 영화의 두 번째 에피소드 <문을 열어둔 채로>에서 교수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가 끊임없이 열어두려고 하는 문과 같이 잠재적인 가능성이자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도록 추진력을 제공하는 동력원이다. 그리고 상상은 그러한 가능성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첫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의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가 츠구미(현리)와 카페에 대화를 나누다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에게 고백을 하는 상상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제목에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메이코가 구체화한 상상을 선택하여 시각화하는 마지막 단계로서 움직임-운동이 있다. 그녀는 과거의 사랑과 현재의 우정 모두는 무너뜨릴 상상과 현실 사이에서 멀어짐이라는 선택을 한다. 메이코가 카페 이전에 카즈아키의 사무실에서 달려 나왔던 움직임처럼, 그녀는 과거로부터, 그 파괴적인 상상으로부터 벗어난다. 메이코가 빠른 속도로 걸어가는 운동감과 그것을 포착하며 움직이는 카메라는 그녀의 슬픔과 해방감이라는 이중적 감정을 명확히 담아낸다. 그러므로 영화의 제목은 우연과 상상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운동을 극적으로 의미화하여 연출하는, 동선이라 표현해야 정확한 것일지도 모른다.

동선이 제목에서 숨겨져 있다는 이러한 상상은 블로킹(blocking)이라는 영화(연극)의 테크닉이 수행하는 바와 명확히 일치하기에 적절하게 느껴진다. 우연과 상상은 비가시적이지만 영화에서 이야기를 통해 구체화 되었을 때에 가시적이다. 반대로 동선은 인물의 움직임으로 가시적이지만 영화 내에서 수행하는 극적 의미화는 비가시적이다. (인물 한 명의 독백과 같은 단독 움직임도 동선이지만) 보통 둘 이상 인물의 대화에서 인물 관계의 변화 과정을 데쿠파주하여 보여주는 영화의 쇼트 분절을 보조하거나 이끌며 마치 조각(block)처럼 나뉘는 연기 비트(acting beat)를 기준으로 움직이는 인물의 동선을 제한(block)하거나 그리는 것을 블로킹이라고 하고 이것은 매우 직관적이고 자연스럽게 세팅되어있어서 영화를 볼 때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카즈아키의 사무실 씬에서 카즈아키와 메이코의 동선을 보자. 헤어진 전 연인과의 갑작스러운 만남에 거리를 두고 마주했던 두 인물은 대화를 통해 서서히 가까워졌다가 다시 거리를 두는 것을 반복하다 결국 멀어지고 만다. 이는 두 인물 사이의 거리가 먼 투 쇼트에서 각각의 원 쇼트로 나누는 소통 불가의 상황을 의미화하면서 서로의 거리가 완전히 가까워진 투 쇼트로 변화하다 다시 원쇼트로 나눠지는 것을 반복하는 관계 변화를 묘사하는 데쿠파주를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한다. 서로의 폐부를 찌르는 말들만큼이나 잔인하지만 아름다운 움직임다. 또는 세가와의 교수실에서 나오(모리 카츠키)가 세가와의 소설을 읽으며 문을 닫자 세가와가 문을 열면서 교수석이 아닌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며 세가와와 나오사의 거리가 좁혀지는 움직임은, 세가와가 나오에게 느끼는 감정적 거리감이 좁혀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연출하여 각각의 인물을 나누어 비추는 원 쇼트의 구성에서 투 쇼트 위주의 구성으로 변화하게 하여 에로틱한 긴장감을 만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어두는 세가와의 캐릭터를 동시에 보여주며 우스꽝스러운 이중적 상황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물론 많은 극영화들이 대화 장면에서 이러한 블로킹을 수행하고 있고 그러한 동선 연출이 특정 영화의 특별한 테크닉이라 강조할만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우연과 상상>에서 동선 연출은 영화의 세 에피소드가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의 우연과 상상을 잇는 특권적 테크닉으로 활용되어 도드라져 나타나 있으며 영화적 감각, 감흥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것을 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하면 <우연과 상상>의 동선 연출은 현실의 우연한 만남과 상상이라는 허구적 가능성을 잇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미스테리한 순간을 직조하는 테크닉이라 할 수 있다.

이때 현실과 허구 사이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영화 속 주요 인물들 모두 우연한 만남을 통해 성사된 상황에서 연기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메이코는 츠구미 앞에서 카즈아키를 모르는 사람처럼 연기하고, 나오는 사사키(카이 쇼마)의 복수를 위해 세가와를 유혹하러 온 인물로 연기를 하며, <다시 한번>의 나츠코(우라베 후사코)와 아야(카와이 아오바)는 각각 서로가 오인했던 동창 역으로 연기를 한다. 이 허구적 상황의 핵심은, 메이코의 경우 카즈아키가 그녀를 알고 있다는 것, 나오는 세가와를 존경하고 있어 연기와 진심의 가운데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나츠코와 아야는 역할놀이임을 인식하고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거짓과 진실 사이의 이중적 상태이다. 이처럼 허구의 나와 현실의 내가 모호한 상태로 중첩되어 있는 정체성은 메이코의 상상이 현실에서 반복되듯 다시 한번, 문이라는 열려있는 가능성의 통로를 통해 불확실하지만, 마법 같은 순간으로 이끄는 동력이 되고 당연히 그것을 시각화하여 움직임-운동으로 감각-의미화를 동시에 수행하여 결실을 보게 만드는 것은 바로 동선이 된다.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세번째 에피소드의 결말 부분을 자세히 보자. 나츠코와 아야는 아야가 나츠코의 옛 연인인 미카의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나츠코가 자신의 과거와 상처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이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다시 한번, 앞선 역할극을 반전시켜 아야가 학창시절 동경했던 동창생의 역할을 나츠코가 연기하는 것으로서 완전한 대구를 이룬다. 나츠코의 옛 연인인 미카와 달리 아야는 과거 동창생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동창생/나츠코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나츠코는의 상처는 그녀가 구멍이라 표현한 길을 따라 아야의 상처와 연결된다. 완전한 타인이었던 두 사람은 우연한 만남과 오인, 연기라는 상상을 통해 비슷한 상처와 기억을 공유하는 인연이 된다.

이제 둘은 기별 없는 작별을 고하고 갈림길의 위와 아래로 멀어진다. 하지만 서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멀어져가던 찰나 아야는 무엇이 생각난 듯 급하게 나츠코에게로 향한다. 아야는 위, 아래가 엇갈리며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를 오가며 좌, 우가 반전되어 있지만 우연했던 첫 만남과 똑같은 상을 맺는 거울의 순간으로 달려간다. 그러면 나츠코는 갑작스러운 아야의 등장에 당황한 듯 그녀를 바라본다. 아야는 천진난만하게 이름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노조미!” 그녀는 마치 나츠코가 학창시절 동경했던 노조미인 것처럼 힘껏 외친다. 또는 자신을 죽여가던 시간을 되돌려 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기뻐한다. 그리고 둘은 더는 동선이 들어설 거리가 없을 만큼 격렬하게 포옹한다. 정말로 나츠코와 아야가 노조미와 미카가 되어 서로의 생을 위로하는 마법의 순간이다.

그리고 그 마법의 순간은 움직임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세계를 통해 이루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메세지와 이메일이 아니라, 다른 도시로, 낯선 이의 집으로의 이동이 우연한 만남과 상상의 가능성을 만들고, 나와 타자 사이를 왕복 운동하며 변화하는 거리가 만드는 긴장의 떨림과 힘차게 달려나가는 움직임의 숨 차오름이 마법을 만든다. 이는 <드라이브 마이 카>처럼 과도하게 늘어놓은 메타포들과 여러 층의 알레고리가 만드는 산만함이 아니라, 온전히 인간관계의 갈등, 기억, 상처, 감정에 집중하며 그것을 영화 연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테크닉인 동선 연출과 데쿠파주를 성실히 수행하여 탁월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고통과 위로의 고전적 감흥과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진동하는 인간의 삶의 미스테리를 더 잘 담아내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 <우연과 상상>은 우연과 상상을 잇는 동선의 영화이자 누구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었지만 아무나 만들 수 없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진정한 걸작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