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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로스트 도터>에서 '로스트'된 것이 '도터'일까?
[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로스트 도터>에서 '로스트'된 것이 '도터'일까?
  • 이승민(영화평론가)
  • 승인 2022.08.0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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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장기간 떨어져 보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예외없이 묻는 말이 있다. “아이들 보고 싶겠어요?” 혹은 “아이들이 엄마 없이 힘들겠어요?” 그러면 나는 답한다. “아니요.” 그 순간 안부를 묻던 사람은 당황해 눈빛이 흔들리거나 웃는다. 사실 나는 아이들과 떨어져 있어 몹시 자유롭고 가볍다. 물론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사랑하지만 무겁고, 보고 싶지만 거리를 둔 지금이 좋고, 염려되지만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도 크다. 아이들이 보고 싶냐는 말에 “그래요”라는 답만 있는 게 아니고, “아니요” 또한 단순 부정이 아니다. “그래요”와 “아니요” 사이에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이 엉켜 있기 때문이다.

<로스트 도터>의 주인공 레다는 바다로 휴가를 떠나 온다. ‘떠나’ ‘온다’는 표현이 가지는 역설이 어쩌면 이 영화의 길잡이가 아닐까? 교수인 그녀는 휴가 짐에도 책이 많다. 등대가 보이는 널찍한 펜션에 머무는 레다는 바다 수영도 즐기고 해변에서 일광욕도 하고 책도 쓰면서 혼자 평화롭게 일하는 휴가를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는 처음부터 그녀의 휴가가 위태롭다고 암시한다. 오프닝 장면에서 이미 예정된 그녀의 여행 결말처럼, 겉보기 여유로운 휴가는 실상 중년 여성의 혼자 휴가와 마을 유지의 대가족의 휴가와 겹쳐지면서 불편한 비교와 긴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대가족 속에 젊은 엄마 니나와 어린 딸의 모습은 레다의 과거 어느 시간을 불쑥불쑥 불러온다.

 

젊은 레다는 피곤에 몸을 가눌 수 없어 바닥에 널부러져 누워있다. 그녀 곁에 어린 두 딸은 놀아달라며, 큰 딸은 엄마의 머리를 빗기다 엄마 머리카락을 뽑고 그 사이 둘째 딸은 집 안 어디선가 넘어져 울음을 터터트리고 있다. 둘째 딸에게 달려간 레다에게 큰 딸은 자기를 봐달라고 소리를 친다. 레다의 기억이다. 기억이란 있는 그대로 과거의 ‘실재’가 아니라 ‘실제’에 가깝다. 실재가 객관적 사실이라면 실제는 주체의 경험이 중요하다. 당시 분위기와 감정을 공감각적으로 불러오는 자기 반추이자 성찰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레다의 기억을 실재와 실제 사이에서 요동치게 한다.

그녀의 기억 속 딸들은 늘 엄마를 갈망했고 레다는 늘 피곤에 절어 그런 딸들을 따뜻하게 보살피지 못했다. 여성의 생애 주기에서 결혼과 임신이 기입되면, 육아와 사회 입문이 동시에 오지만 동시에 하긴 역부족이다. 각자 온전한 몫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택일의 기로에 놓이게 되고 어느 길을 들어서도 못다 간 길에 자책이 생긴다. 레다는 두 길을 병행하고자 하지만, 사실 두 길을 병행한다는 말 자체가 이미 육아에게 우선권을 내어준다는 말과 동급임을 여성은 안다. 더구나 집에서 연구하는 연구자인 경우는 가사노동과 육아와 일이 분리불가하다. 또래 남편은 사회 입문으로 바쁘고 돌볼 아이들은 바로 곁에 있고 짬을 내고 내어야 간신히 연구라는 경제화되지 않는 작업을 이어갈 수 있으니 욕망한다는 것은 곧 좌절한다는 말과 동급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 시절 레다의 모습을 “욕망”으로 형상화 한다. 욕망이 분출하는 시기에 욕망이 채워지기는커녕 좌절되고 혼자서라도 메워보려 하지만 쉽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는 스스로 작고 초라해지고 피폐해져간다. 그러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이를 만나면서 숨을 쉬게 된다. 사랑 보다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시간들. 레다는 그 시절을 미안함과 자책감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보다 혹독하게 담는다. 그러나 지금 레다는 현재 성인이 된 딸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 서로 전화를 주고 받고 일상을 공유하는 여느 모녀 관계이다. 영화적 기억은 레다의 시점이지만 일인칭이라기 보다 관찰자 시점에 가깝게 레다가 부재한 자리에서도 보여지는 딸의 표정, 레다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못난 모습, 자신과 딸이 함께하는 모습을 기억이자 감정으로 담는다. 이들 기억 장면이자 회상 장면은 뒤늦게 헤아려져 아려오는 감정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여성에게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후벼파는 자책의 형상이기도 하다.

모성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주고도 미안하고, 역으로 받고도 부족한 감정이자 관계이다. 내가 엄마일 때는 일과 양육의 선택지에서 일을 선택하면 아이에게 미안하고, 양육을 선택하면 제대로 이루지 못한 나 자신에게 회한이 남는다. 반면 내가 딸일 때는 엄마에게 엄마다움을 기대하며 엄마답지 않는 ‘이기성’에 섭섭하고 상처받는다. 그럼에도 엄마를 닮고 싶지 않지만 엄마를 꼭 닮은 나를 보게 된다. 레다는 엄마에게 도망치듯 결혼했고, 딸에게 벗어나기 위해 집을 나와 자신의 길을 걸어왔지만, 엄마의 어지럼증을 물려받았고, 딸들에게 스스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그런 모성을 사물로 형상화한다. 레다는 과일 껍질을 끊지 않고 한번에 깎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딸들은 엄마가 깎은 과일 껍질을 유독 사랑했고, 이어진 과일 껍질에 눈을 달아 뱀을 만들자 한다. 동시에 그런 엄마를 닮고파 혼자 깎기를 시도하다 손을 베는 사고를 낸다. 과일껍질-뱀은 딸과 행복한 기억이자 아픈 기억이다. 또한 레다는 딸에게 자신의 인형을 물려주지만 자신이 딸에게 소홀한 어느날 딸이 인형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던져 부셔버린다. 레다는 이런 기억을 현재 휴가지에서 낯설게 체화한다. 방에 예쁘게 놓인 과일은 썪어 있고, 해변에서 만난 니나의 딸의 인형을 훔쳐 돌보다 인형 속에서 작은 뱀을 만난다. 과일과 인형과 뱀은 레다의 기억을 현재로 불러오면서 그 의미를 해체하고 전복한다.

영화는 여성을 형상화하는 특정 사물들을 통해 레다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여성에게 모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비판적 물음을 던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레다는 니나에게 인형을 돌려주고, 자신이 선물한 모자핀으로 니나에게 배(자궁)을 찔린다. 그리고 그 모자핀의 노하우는 레다의 할머니에게 전수받은 것이다. 여성사의 연결을 은연 중에 내포하면서 영화는 레다가 휴가를 떠났지만 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떠나 오는 여정을 담는다. 그리고 영화 속에 니나는 묻는다. “지나갈까요?” 영화는 레다의 기억과 시간을 통해 모성에 대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내밀한 대화를 시작하게 할 것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 중이다.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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