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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비상선언>이 바라본 불행의 풍경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비상선언>이 바라본 불행의 풍경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2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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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에서 탑승객과 테러범은 극렬하게 대립하고 절규하지만 이상하게도 거기에서는 아무런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탑승객 집단이 결연하게 스스로 내린 자기희생적 결단은 허무한 감상주의적 신파로 보이기까지 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왜 두 극단적 관계에 놓인 인물들 간의 갈등 구조가 극적으로 보이지 않는가라는 것. 대개는 먼저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고, 이를 수습하는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 관계는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도식 안에서 맴돈다. 이를 테면 진석(임시완)의 광기는 더 잘 발휘될 수 있었을 구조를 만나면 충분히 증폭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를 알아보기위해 진석에게 주목해보자. 진석은 왜 전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일까? 그리고 어떤 조건을 갖추게 될 때 "그렇게는 되지 않을 꺼야"라고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이 두 물음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전자다. 왜냐하면 먼저 사건을 일으키는 입장에서는, 저질러진 사건 안에 있어서만큼은, 필연적으로 어떤 의미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긴장감이 높아지는 것은, 진석이 전부를 죽이는 일이지 그 외침에 누가 응답하게 되는 가가 아니다. 그래서 진석의 외침에 처음에는 인호(송강호)가 응답했고 그 다음은 재혁(이병헌)이 응답했으며 그 다음에는 국토부 장관 숙희(장도연)가 응답했으나 그들에게 우리는 동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나는 <비상선언>에서 주목해야 할 의미는 ‘전부 죽었으면 좋겠어“라는 진석의 그 말 속에 모두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사실상 현실 세상에 대한 그의 응답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것은 <비상선언>이 팬데믹 상황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방식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우리 사회의 내부적 트라우마들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비상선언>은 현실 세계의 사건과 불행을 모두 각색하려는 영화가 된다.

이런 특징 탓에 <비상선언>은 영화적 긴장감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게 되었다. 불행 그 자체에 이미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다고 느껴서다. 그래서인지 서사의 조건이 화려하고 다양해도 그것이 산출하는 정동(affect)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불안감으로만 작동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코로나 팬데믹과 관련한 집단적이면서도 병적인 불안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해되면서도 영화적 긴장감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묵시록적인 메시지까지 이르는 데는 실패한다. 또한 <비상선언>은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사건 사고들의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추출해 내야할 때 섣불리 자의적 판단을 지나치게 많이 개입시킴으로써 영화적 성공도 현실적 공감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비상선언>에서 다뤄지는 바이러스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로 갑자기 비화되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러므로 영화 중후반 등장하는 장면, 저마다의 가족들에게 남기는 영상메시지와 문자메시지 화면은 아주 당혹스럽게 전개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뉴스를 소비하는 방식과 같은 형태로 다가오기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뉴스란 남의 불행을 확인하는 작업에 불과하다는 말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비상선언>이 천착한 뉴스 화면 들은 남의 불행을 바라보려는 우리들의 시선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실제로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의 불행을 새롭게 끄집어 낸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비상선언>은 결국 우리의 집단적 불행을 정교하게 다루고자 했으나 거기에 이르지 못한 실패한 영화로 읽힐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다고해서 무조건 이 점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우리 현실을 완전하게 설명하고자 노력했음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느끼고 있는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불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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