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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허공에의 질주, 파울로 소렌티노의 〈유스〉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허공에의 질주, 파울로 소렌티노의 〈유스〉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2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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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유스〉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문학이 영화와 다른 것은 문학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영화의 이미지는 보이는 것이라는 점이다. 문학의 영화에 대한 비평적 우위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말해질 수 있다. 그래서 문학은 문자에서 문자로 말하여 질 수 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말할 수 없다. 본다는 행위는 애초에 수평면 위에서 만인에게 평등한 빛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는 빛은 필연적으로 체험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타자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모두 같은 목소리로 말할 수 없다. 빛에게 평등함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 냉엄함에 있다. 영화라는 체험의 빛이 투사되는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타자를 나의 입장에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영화의 빛과 관객의 눈은 거리를 두게 된다. 영화는 그 거리에 대한 이야기들이며, 그 거리를 배회하는 유령의 목소리이다. 명확하게 보이되 깔끔하게 말할 수 없다는 영화의 운명은, 영화가 문학보다 연약하고 깨끗한 이유가 된다.

이것은 카메라를 든 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지가 베르토프는 카메라가 인간의 눈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 유명한 키노-아이 선언문의 첫 시작, “나는 키노-아이다”는 은유가 아니라 말해지는바 그대로이다. 오직 기계만이 나의 시선을 타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보게 되는 경험의 것도 그러하다. 한 인간의 체험이 다른 인간에게 그대로 보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그 순간을, “영화는 1초에 24프레임의 죽음”이라는 고다르의 말처럼 그 시간을 1초에 스무 번 하고도 네 번 더 죽여야 한다. 과거는 과거의 것이요, 현재는 현재의 것이다. 현재를 통해 과거로 접속하는 것은 재현의 퍼포먼스를 담는 현재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나간 것은 재현하더라도 현재의 것일 수 밖에 없다. 소렌티노의 <유스>는 이 명확한 명제에 대한 저항이며 반항이다. 그것은 비단 <유스>만의 것이 아니다. 소렌티노의 <아버지를 위한 노래>부터 어제 본 <유스>까지 이어지는 소렌티노의 결연한 정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렌티노를 카메라의 냉엄한 이미지를 배반한 배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유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이 배반은 <유스>의 오프닝부터 시작된다. 오프닝의 클로즈업은 과해서 기괴하다. 그것은 기계의 시선이되, 동시에 기계의 시선이 아니다. 기계는 움직일 수 없다. 오직 시선을 일방에 고정한 체 서있다. 그러나 <유스>의 오프닝은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체 빙글빙글 돌고 있다. 억지로 앞에 붙어버린 빛은 렌즈를 견디지 못하고 왜곡된다. 그 왜곡은 다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땅에 의해서 배경마저 제대로 담지 못하고 주변이 휘어진 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 운동시킨다. 소렌티노의 카메라는 과거를 재현하고자 하는 현재의 퍼포먼스를 왜곡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왜곡은 비단 카메라가 움직일 때만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가 가장 많이 보여주는 공간 중 하나인 수영장은 왜곡의 무대이다. 카메라 평면을 담고자 해도 수면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수면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고정된 피사체를 왜곡시킨다.

그렇다면 그 수면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이다. 소렌티노는 늙어버린 육체를 수면 아래 둔다. 육체가 고스란히 들어나는 이들은 젊은이들뿐이다. 지미 트리를 찾아 호텔을 찾아온 미스 유니버스는 늙은 이들의 시선 앞에서 수면 아래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 앞에 미스 유니버스의 그 관능적인 육체는 수면 아래서 왜곡된다. 수면의 특징은 누군가 그 수면에 들어가는 순간, 그 파동 때문에 누구에 의해서도 운동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운동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직 중력뿐이다. 수면은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운동을 멈출 것이다. 수면에 들어간 체, 우리는 피사체를 명확하게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아름답다면, 그것은 믹 보일의 진술처럼 “신”이다.

그러나 프레드 빌렌저도, 그의 친구 믹 보일도, 히틀러를 연기하겠다는 지미 트리도 “신”이 아니다. 그들은 시간에 저항할 수 없다. 인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부패와 죽음의 운명이 제거된 사이보그일 것이다. 그것은 기계이다. 미스 유니버스가 지미 트리를 보고 실망하는 것은 그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기계를 허구로서 모방했을 뿐이다. 그나마도 그는 인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리하여 히틀러가 되는 것. 그것이 지미 트리가 원하는 것이다. 그가 색안경을 썼다는 것은 이 지점에서 의심스러워진다. 그는 늙은 본적이 없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역-왜곡이다. 그는 빌렌저와 같이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쓰는 것이 아니다. 빌렌저에게 안경의 렌즈가 부패와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도피라면, 지미 트리에게 안경의 렌즈는 명확하게 왜곡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왜곡한다. 스스로 눈을 왜곡한 지미 트리는 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기계-인간이다.

이 기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미 트리는 히틀러가 된다. 히틀러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안경을 벗는다. 안경을 벗은 그는 기계가 삭제되었을 때 히틀러가 된다. 스스로를 왜곡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그는 공포심 대신 열망을 택한다. 그가 공포심을 느낀 것은 그가 더 이상 기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한 곳에서 승려가 공중부양을 한다. 이 승려의 비약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록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공중부양을 왜곡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 왜곡은 기계가 하는 일이 아닌, 인간의 임의조작으로 가능한 일이다. 소렌티노는 궁극적으로 영화를 인간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왜 히틀러라는 열망인가? 우리는 영화라는 예술이 지닌 대전제에서 그 답을 간단하게 그 답을 알 수 있다. 카메라라는 기계 없이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다.

 

〈유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유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다시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문학은 인간의 입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기계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온전히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다. 이 소렌티노의 과격한 비약은 왜곡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가능해진다. 이 수많은 왜곡과 비약을 필요로 영화적 이미지를 배반하는 이유는, 그 히틀러의 열망이 필요했던 것은 히틀러의 입을 빌려 이야기했듯, 공포심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포심은 지미 트리를 다보스의 베르크호프에 스스로를 가둔 카스토르프처럼 만들 뿐이다. 지미 트리가 열망을 선택한 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카스토르프의 보리수노래처럼 애상한 것이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운동이 만드는 삶의 기민함을 따라갈 수 없기에 기계를 인간에게 종속시키는 아이러니를 만들게 된다. 그러므로 히틀러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이 공포는 빌렌저의 딸이 빌렌저가 버려진 곳으로 오는 이유와 같다. 레나가 줄리안에게 버려진 이유와 같다. 줄리안은 레나 대신 (빌렌저의 표현에 의하면) 천박한 아이돌가수와 교제를 “잠자리에서 끝내준다”는 이유로 선택한다. 스스로 대중에게 이용당하는 마리오네트인 그녀는 기능적으로 기계이다. 레나가 악몽에서 그녀를 왜곡된 이미지를 통해 보는 이유 또한 기능-종적으로 다른 종이기 때문이다. 단언적으로, 레나는 기계가 될 수 없다. 그녀가 그 악몽을 꾸고 아버지 빌렌저에게 “나도 잠자리에서 끝내줘요”라고 말하는 것은 기계가 될 수 없는 자의 부아에서 올라온 거짓이다. 아버지가 그 거짓에 “나도 알고 있다”며, “넌 내 딸이다. 나도 잠자리에서 끝내줬거든”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그 거짓진술에 대한 동의가 아닌, 그 이미지에 대한 인정이다. 그 이미지를 인정을 받고야 그녀는 웃는다. 그녀가 웃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그 순간 열망이 아닌 공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 안의 두려움과 마주한 것이다. 그 공포의 인정은 레나가 자신의 육체를 수영장에서 전시할 수 있게 한다. 이 전시는 영화 초반, 오피스 룩으로 그녀의 아버지에게 건강을 선물하려던 태도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역행시키려던 그녀는, 자신이 역행시키고자 했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서야 수영장에 등장한다. 이 때 그녀는 기계가 아닌 이미지를 열망한다. 젊은 자신의 육체를 영속시킬 마음이 사라지자, 현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장면 뒤에 레나는 보일에게 “자유의 향기를 맡았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그녀는 기계가 아니다. 기계가 아닌 인간이 열망할 때, 그 열망은 오직 인간에게 거두어질 수 있다. 그녀가 호텔에서 자유의 향기를 맡은 후 찾아가는, 다른 말로 줄리안을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암벽 등반가이다. 그는 손으로 지형을 읽는 사람이다. 그가 레나 앞에서 어린 소녀를 등에 업고 인공암벽을 올라가, 위에서 아래를 보는 아름다움을 한 번 보라고 제안하는 것은 유혹이 아니다. 그것은 너와 나는 같은 종이라는 베타성으로서의 동족 확인이다. 그 현재적 순간을 열망한다는 것. 그것은 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으로서, 열망이 아닌 공포심을 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지를 열망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레나와 암벽 등반가는 서로가 같은 종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육체로 무언가와 접속하는 사람들은 <유스>의 세계에 다수가 아니다. 레나와 암벽 등반가를 제외하면 등에 마르크스를 새겨 넣은 마라도나, 손을 통해 타인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안마사 정도가 전부이다. 이들은 마치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들과 같다.

이러한 초월성은 대표적으로 안마사를 생각해봄직하다. 안마사가 티비를 보고 춤을 추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도 남기지 않는 바로 그 장면으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그녀가 춤을 추는 것은 어떤 인과도 없는 고정 지시된 상태의 모습이다. 이 장면을 조금만 뜯어보면 그녀는 TV를 보고 그것을 몸동작으로 재현하는 방식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이 퍼포먼스에서 우리가 두드러지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허공을 맴도는 그녀의 손이다. 그녀는 분명히 허공을 어루만지고 있다. 그 허공은 그녀와 TV사이에 위치한다. TV는 애니메이션으로 이미지화된, 부패와 죽음이 삭제된 실체가 없는 허구이다. 그녀는 손을 통해 그 이미지와 자신 사이의 어떤 것을 어루만진다. 그 어떤 것은 아마 디미 트리가 열망한 히틀러, 보일이 보고자하는 자신의 영화, 빌렌저가 영화 초반에 본 미스 유니버스의 육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자리를 잡아서도 안 되고, 타자 대신 말해서도 안되는 것을 묵묵히 손으로 어루만지는 성녀 마리아와 같은 존재이다.

이와 반대편에 위치하는 같은 종적 기능자는 등에 마르크스를 새겨 넣은 마라도나이다. 그는 인공호흡기라는 기계를 통해 연명하지만, 영화 후반에 테니스공을 허공에 차올리는 퍼포먼스를 통해 안마사와 같은 존재적 위치를 점유한다. 그는 물속을 헤매듯 걸어 다닌다. 그가 그녀와 같은 존재적 위치를 점유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계들이 열망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배회하는 유령이다. 그가 발마사지를 받으며 본 것은 미래라는 허상이다. 그는 “운명의 동전을 던지는 것은 그 동전이 땅에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동전이 공중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니체의 말처럼 그저 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공을 허공으로 찬다. 그 절대적 우연성을 볼 수 있는 자는 <유스>의 세계에서 마르크스를 등에 박은 마라도나와 안마사뿐이다.

그 허공을 보는지 못 보는지 알 수 없으나, 그 허공으로 향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 그는 티벳의 승려이다. 승려는 공중부양은 어떤 면으로 보나 비약적이라는 점에서 그의 존재 또한 육체로 무언가와 접속하는 이들과 동률상의 존재적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승려의 공중부양은 어떤 면으로 보나 비약적이기는 하나, 영화적으로 말이 되는 문법 안에서 그 장면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 존재적 위치를 명확히 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 장면이 디미 트리가 히틀러로 분한 다음 장면에 주어졌다는 것을 보아, 지시하는 방향이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소렌티노는 오프닝의 왜곡과 디미 트리의 히틀러의 메타포를 디졸브하며 역-왜곡에 투사하는 인간의 허공에의 질주를 매우 감동적인 조우로서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립 항으로 허공을 보지 못하지만, 허공을 향하는 사람이 있다. 믹 보일은 밖에서 온 브렌다 모렐의 제작중지 선언으로 인해 허공으로 투신한다. 이때 우리는 브렌다 모렐일 누구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거리에서 보일에게 픽업되어 스타가 된, 세상에게 세상을 배운 안마사의 대립항이다. 그녀의 이름이 모렐(morel : 곰보버섯)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모랄(moral : 도덕)을 모렐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즉, 그녀는 이미 히틀러이기에, 히틀러를 연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보일은 브렌다 모렐만이 자신의 영화를 완성해줄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보일을 주변을 둘러싼 순진무구한 5명의 청년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보일에게 필요한 것은 오염이다. 그러나 오염을 획득할 수 없게 되자, 보일은 허공으로 투신한다.

 

〈유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유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그는 떨어지기 위해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순수한 감정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가 살아생전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길다 블랙과 걸은 그 순간 이었다. 그가 그리워 한 사람이 ‘길다’라는 것은 생각해보아야 하는 문제다. 길다는 리타 헤이워드가 연기한 길다는 그녀가 살아 모두를 죽게 만드는 팜므파탈이다. 보일은 살아생전 그 오염에 자신을 투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는 브렌다 모렐처럼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것에 실패한 자이다. 영화 중반, 보일이 자신이 발굴한 여배우들을 보고 식은땀을 흘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보일의 유언은 “감정이 과대평가 되었다고 했지? 그건 틀렸어. 감정은 전부야”라고 빌렌저의 말에 반박한 것이다. 그 반박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지미 트리가 히틀러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오히려 브렌다 모렐을 발굴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떨어지는 것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부양 하는데 실패한 자이다.

이 광경을 본 빌렌저는 자신의 역겨운 과거를 인정한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한 첫 일은 스트라빈스키의 묘를 찾는 것이다. 그에게 음악이란 보일에게 영화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빌렌저는 브렌다 모렐처럼 모랄을 모렐로 바꾸는 능력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심플 송이라는 작품을 통해 궁극적 오염에 성공된 자이다. 다만, 그는 그 오염을 견딜 수 없어 베르크호프라는 표백과 환상에 투신한 자이다. 그는 그가 만든 오염물을 인정한다. 그리고 스트라빈스키를 찾아간다. 그는 스트라빈스키가 브렌다 모렐 같은 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굳이 스트라빈스키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아내를 찾아간다. 그리고 아내에게 “우리는 심플 송으로 연결되어 있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일방적인 통보라는 점에서 소통이 아닌 강요이며 그 강요가 향하는 곳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다. 그는 베르크호프를 나와 히틀러가 된다.

그가 마침내 심플 송의 지휘를 맡는 대단원은 표백된 평면의 정절이다. 오케스트라가 있는 곳은 마치 표백제를 넣은 빛이 투사되는 양 눈부시게 희다. 여기서는 클로즈업을 잡더라도 피사체를 중심에 두는 것으로서 카메라의 왜곡 또한 표백시킨다. 이 표백은 지나치게 과해서 왜곡이 없더라도 이미지에 현실감이 아닌, 오프닝과 같은 기괴함을 불러일으킨다. 이 표백은 조수미의 이미지를 과격하게 평면으로 눌러버리고 그녀의 물상만을 남겨놓는다. 소렌티노가 영화의 대단원에서 이렇게 기술적으로 극적인 선회를 한 것은 과거의 것들이 왜곡을 통해 마침내 현실에 강림했음을 우렁차게 알리는 듯하다. 빌렌저가 이 사자후를 날리기 전에, 그가 베르크호프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밖에 나가면 젊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사의 호명에 등장한, (레나가 선물한) 죽음에서 돌아온 젊음이다.

밖에 젊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결코 낭만이 아니다. 레나는 암벽 등반가와 암벽에 매달려 아래를 보는 공포를 확인한 후에 비로소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이는 빌렌저의 상황과 대단히 유사하다. 그건 죽음이라는 순수를 향한 운명을 유보하고 표백된 상태의 무대에서 왜곡이라는 어지러운 상황으로 뛰어든다는 것이다. 기계를 열망하던, 인간으로서 공포를 선택하던 그건 내기에 걸린 상황이다. 그 내기에 걸린 풍경을 소렌티노는 이미지라고 호명하고 싶어 한다. 영화의 마지막, 손으로 뷰 파인더를 만들어 카메라에 들이대는 보일의 모습은 펠리니의 <8과 ½>의 오마주보다 소렌티노가 오프닝에서 선언한 왜곡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투영한 것에 가깝다. 이미지가 가져오는 현실의 현재성을 거부하고 왜곡을 통해 허구의 허구성으로 자신의 것을 내기에 걸겠다는, 그 허공에의 질주야말로 젊음이라고 소렌티노는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글·이현재
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 평론 신인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이현재의 시네마크리티크」에서 글을 쓰고, STRABASE에서 일하며,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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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영화평론가)
이현재(영화평론가) blueparanchung@gmail.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