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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글로벌화 시대의 불량풍속희극 하녀 영화: <돈의 맛> 임상수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글로벌화 시대의 불량풍속희극 하녀 영화: <돈의 맛> 임상수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2.12.2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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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의 맛>: 새로운 버전의 하녀 영화

<돈의 맛>(2012)은 임상수 감독이 김기영의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동명의 영화(2010)의 차기작으로 전작의 속편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연결 고리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 연결 고리는 전작의 엔딩에서 하녀 은이(전도연)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해주길 부탁한 주인집 어린 딸(안서현)과 동명의 나미(김효진)이다. 성인이 된 나미의 기억을 통해 “억압된 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pressed)으로 전작에서 자살한 “착한 아줌마” 하녀의 존재가 이 영화에서 소환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전작과 김기영의 원작 <하녀>를 상영하는 스크린을 특정 장면의 배경으로, 즉 “영화 속 영화”로 사용하여 이 영화와 두 하녀 영화와의 연관성을 시사하고 있다.

사실 하녀 영화로서 임상수의 리메이크 <하녀>는 하녀의 성정치적 전복성을 통해 성공적으로 구현한 김기영의 원작의 “정치적 전복성”을 “퇴행”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혹평에도 불구하고 두 하녀 영화와의 연관성에 대한 확실한 단서를 제공하면서, 임상수는 느슨한 의미에서 이지만 여전히 두 하녀 영화의 다시-보기로 이 영화를 만들고자한 것은 분명하다. 이 영화를 전작과는 다른 “나름의 텍스트”로 그가 읽어주길 요구하지만, 이러한 당부 또한 이 영화가 기존 하녀 영화와의 반복과 차이를 염두에 두고 만든 그의 새로운 버전의 하녀 영화임을 강조한다.

 

2. 김기영의 <하녀>/ 임상수의 리메이크 <하녀>/ <돈의 맛>

 

임상수가 한국 하녀 영화의 원조 김기영의 원작의 196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배경으로 옮겨와 <하녀>를 리메이크한 의도는 선배 감독 김기영과 원작에 대한 충실성보다는 차이의 반복으로서 자신 나름의 다시-보기를 시도하기 위한 것이다. 스콜세지((Martin Scorsese)를 비롯한 해외 유명 감독들의 극찬과 박찬욱과 봉준호와 같은 동료 감독들의 김기영에 대한 오마주와는 대조적으로, 그가 김기영의 <하녀>를 리메이크한 것은 “김기영 유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거장의 “영향에 대한 불안”(anxiety of influence)은 그만의 색깔의 영화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돈의 맛> 역시 그가 리메이크 하녀 영화에서 추구한 새로운 하녀 영화와의 연장선상에서 접근하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적절한 읽기일 것이다.

김기영의 원작이 하녀를 팜므 파탈 악녀로 등장시키고 있다면, 임상수의 리메이크는 “아더매치”한 짓을 좋아하는 착한 하녀로 대체시켰다. 그 결과 리메이크는 원작의 정치적 전복성을 퇴행시켰다는 지적을 받는다. 임상수는 이러한 지적이 리메이크한 하녀 은이가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해서 그녀가 발휘한 전복성이 제대로 감지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에 그는 하녀 대신 젠더를 바꿔 관객의 공감도를 높일 수 있을 “하남”(下男)을 등장시켜 새로운 버전의 하녀 영화로 간주될 수 있는 “하남 영화”로 차기작 <돈의 맛>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은이와 병식(윤여정) 대신 신임 하남 주실장(김강우)과 선배 하남 윤회장(백윤식)을 중심인물로, 그리고 하녀로는 대사 없는 한국 하녀 집단과 필리핀 이주여성노동자 에바(마우이 테일러)를 ‘글로벌화의 하녀’로 등장시켰다. 집주인 남자 훈(이정재) 대신 남편을 하남으로 부리는 백금옥 여사(윤여정)를 재벌 백씨 대저택의 실제적 주인으로 등극시켜 젠더를 전도시키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들뢰즈(Gilles Deleuze)의 “보는 자”(seer)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엔 어린 나미를 대신하여 성장한 나미를 등장시켜, 자신의 가족이 사는 세계 이면을 볼 수 있는 “보는 자”로, 그리고 하남 영작을 보는 자의 입지에서 탈주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주요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기존 하녀 영화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러한 차이들로 이 영화를 만든 의도는 물론 차별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새로운 버전의 하녀 영화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3. 불량풍속희극의 스펙터클

임상수는 1960년대 근대화 시기의 한국 중산층 세계의 심연을 탐구하는 김기영의 자연주의 영화를 21세기 상류층 세계의 심연이 아니라 그 세계 자체를 파사드(façade), 스펙터클로 구축하는 풍속희극(comedy of manners) 하녀 영화로 리메이크를 했다. 리메이크 영화가 스펙터클과 풍속희극적 연극성에 집중하느라 원작의 정치적 전복성을 구현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기존 비판은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임상수의 영화가 정치적 전복성 구현에 관심이 없어서 스펙터클 구축에 집중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외골수로 자족적인 귀족적 상류사회의 인공적인 세계의 스펙터클 구축에 전념을 다하느라, 그 사회 심연에 내재한 자연주의적인 야만과 충동의 세계와 그것으로부터의 탈주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스펙터클과 연극성의 정치적 전복성, 그리고 “보는 자”로서의 관객성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시사할 수 있는 정치성을 구현하는 “보는 자의 영화”로서의 하녀 영화의 창조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지향성 가운데 차기작 <돈의 맛>을 새로운 버전의 하녀 영화로 읽어야 할 것이다.

임상수의 하녀 영화가 집중한 스펙터클 구축, 즉 연극성이란 상류사회의 구별짓기, 아비투스(habitus)라는 풍속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풍속희극의 세련된 인위적인 스펙터클 구축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풍속희극 작가 와일드(Oscar Wilde)가 쓴 진지함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과 부제 “진지한 사람들을 위한 사소한 희극”(“A Trivial Comedy for Serious People”)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풍속희극은 진지한 척하는 속물적인 상류사회의 풍속도를 비판하는 풍자극이다. 댄디의 21세기 버전인 메트로섹슈얼 훈은 비록 친절한 태도를 나미에게 상류층의 신분을 과시하는 차별화의 수단으로 가르치기는 하지만, 여전히 남다른 매너(manner)를 지키며 진지한 척하는 상류사회 인사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훈과 그의 가족들과는 다르다. 이제 이들은 불량한 말투와 행동을 서슴지 않는 아예 진지성이 결여된 “포스트모던 인간”(postmodern human)이다. 이러한 대조는 영화 속 영화를 활용하여 잘 전달된다. 가족들이 모여 전작 <하녀>를 보고 있는 가족 영화관에 불쑥 철(온주완)이 들어 왔을 때 마침 스크린은 나미가 은이에게 친절과 예의를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철이 할 말만 하고 나가자 그의 딸은 영화 속 훈과 비교하여 자기 아버지는 인사도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말한다. 아이들을 에바에게 전적으로 맡긴 이혼한 철은 훈과는 달리 딸에게 매너 교육은커녕 모범도 보이지 않는 아버지로 진지성 뿐 아니라 인간성 자체가 결여된 소시오패스로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인간이다.

재벌 백씨 집안의 가업을 이어받을 철과 그의 가족들은 돈의 맛에 중독된 증상으로 적나라한 불안과 공격성을 보인다. 이러한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그들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섹스와 감각적인 쾌락의 사치스러운 특권을 행사해서 사소한 욕구들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위안을 얻는다.

따라서 진지한 척, 세련된 척하는 훈과 상류층 인물들이 등장하는 전작이 풍속희극 장르의 영화라면, 진지성 자체가 결여된 불량한 포스트모던 인간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풍속희극의 21세기 버전인 “불량 풍속희극”(comedy of bad manners) 장르의 영화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가 구축하는 스펙터클은 포스트모던 상류사회의 불량풍속희극적인 스펙터클인 것이다.

 

4. 입체화된 스펙터클과 시야심도 기법

 

전작의 훈의 저택 보다 그 규모면에 있어서도 캐슬 차원으로 확대된 재벌 백씨 대저택은 이 영화의 매우 비중있는 캐릭터로 간주될 수 있다. 그 공간은 거기에 거주하는 돈의 맛에 중독된 포스트모던 인간들이 돈의 위력으로 귀족 계급의 특권을 누리는 엄격한 위계질서의 체제를 갖춘 스펙터클로 구축되어, 탐욕과 형편없이 추락한 도덕과 지성의 수준이 지배하는 사회로 전락해버린 초상류 사회의 현실 환경을 보여주는 소우주인 셈이다.

전작이 풍속희극 영화로 현실 환경을 그 심연을 탐구하기 위한 매개체가 아니라 그 자체를 스펙터클로 구축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듯이, 이 영화 또한 불량풍속희극으로 재벌가의 불량한 현실 환경을 스펙터클로 구축하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구축하는 스펙터클은 표면적인 파사드와 그 이면을 동시에 드러내 보이는 입체감이 부각된 스펙터클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품격 있는 파사드와 함께 중요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곳인 막후의 공간을, 무대 위(on stage)와 오프 스테이지(off stage)를 함께 포함한 스펙터클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스펙터클의 연극성은 막후, 오프 스테이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권력과 욕망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직면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대저택은 포스트모던 문화의 야비한 물질주의의 찬양과 존속을 위해 지어진 위엄과 격조를 갖춘 신전처럼 보인다. 동시에 불온하게도 유곽의 환경이 혼합되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윤회장과 백여사가 하녀와 하남과 나눈 섹스, 특히 별채에서 글로벌 비즈니스 파트너 로버트(달시 파켓)을 위한 국적불문 콜걸들을 불러 연 성접대 파티는 하녀와 하남 또는 성적인 상품의 구매와 소비 행위가 일어나는 유곽에 다름없는 공간임을 드러내 보인다. 포스트모던 건축양식과 돈의 위력을 과시하는 팝아트 예술품으로 실내디자인을 한 백씨 대저택이 구축하는 우아하고 세련된 고품격의 파사드는 막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야만과 폭력성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이 영화는 화려한 파사드와 그 이면에 숨겨져 있던 야만과 폭력적 욕망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스펙터클 구축을 위해 효과적인 촬영기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 중 하나로 웰스(Orson Welles)가 개발한 시야심도(depth of field) 기법을 창조적으로 활용한 기법을 들 수 있다. 이 기법은 현실 환경의 심연과 스펙터클을 동시에 표출할 수 있는 촬영 기법이다. 광원을 배경에 두고 전경에 음영을 두는 대조효과와 광각(wide angles)을 이용하여 화면의 시야심도를 증폭시킬 수 있는 촬영 방식이다.

 

대표적인 예로 이 영화의 시작과 엔딩을 구성하는 돈이 불러일으킨 충격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들 수 있다. 윤회장이 데려간 거대한 돈 창고 안에서 쓰레기로 갖다 버려야 다 쓸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영작이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광원은 배경에 쌓여 있는 돈 더미에 두고 전경은 영작의 뒷모습의 음영으로 강력한 대조효과와 거대한 규모의 돈 더미를 광각으로 잡아 시야심도를 증폭시킨다. 카메라는 돈가방을 든 두 사람을 태우고 내려오는 불 켜진 엘리베이터를 배경 광원으로 해서 어두운 도시를 전경으로 잡다가, 방향을 바꿔 전경에 어두운 건물을 두고 전경의 불야성의 도시를 광각으로 잡는 촬영 기법으로 오프닝 시퀀스를 촬영한다.

파놉티콘적인 감시를 위해 백여사가 설치한 CCTV 카메라들로 찍은 영상을 통해 파사드의 이면을 투시하여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시야심도 기법이 활용되고 있다. 백여사 전용 비밀 모니터링실에서 윤회장과 에바의 정사를 생중계하는 스크린들을 광원으로 백여사가 어둠 속 전경에 앉아 엿보고 있는 장면, 그리고 대저택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백여사의 지시로 영작이 그를 차기 하남 후보로 정하는 가족회의를 생중계로 보여주는 스크린을 보고 있는 장면 등 또한 시야심도 기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5. 에바와 윤회장의 사랑과 죽음

이 영화에서 나미의 등장은 은이에 대한 기억을 중요한 모티브로 하여 “억압된 자의 귀환”을 통한 죽은 하녀의 복수가 전개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필리핀 하녀 에바가 비중 있는 인물로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주요 관심사는 하녀의 성정치적 전복성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은이의 분신 자살이라는 전작의 충격적인 엔딩보다 더 충격적인 엔딩, 자살이 아니라 타살로 억울하게 죽은 에바가 관 속에서 갑자기 눈을 뜨고 카메라를 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러한 엔딩은 또 다른 “억압된 자의 귀환”을 예고하면서, 이 영화가 글로벌화 시대의 하녀 영화라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준다.

원작의 근대화의 하녀, 리메이크 영화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하녀, 그리고 글로벌화 시대의 하녀의 공통점은 모두 시대적 변화가 초래한 사회적 불안과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타자로 부당한 대접을 받아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공통점은 소비된 후 버려지는 상품 또는 “비체”(abjection) 취급을 당하는 부당한 취급을 받아온 하녀는 착취된 후 사라지기를 강요당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하녀는 억압을 통해 오히려 강력한 전복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즉 “억압된 자의 귀환”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녀는 전복적인 성정치성을 초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성적, 계급적 타자로 항상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이 영화 역시 확인시켜준다.

이주여성노동자로 “찌질한” 남편 대신 아이들 양육을 책임진 에바의 선택은 “글로벌 돌봄 사슬”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혼한 나미와 철의 아이들을 돌보는 조선족 “이모”와 필리핀 하녀 에바는 글로벌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만들어낸 “생존회로”의 말단에서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글로벌화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하녀이다. 에바 또한 필리핀에 두고 온 아이들의 돌봄을 위해 자국 하녀를 고용하고 있다. 에바의 꿈은 필리핀에 두고 온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 즉 생존회로에서 탈주하는 것이다. 이 꿈은 순수하고 소박한 꿈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절박한 바람이다.

 

대한민국 0.01%의 최상류층의 재벌가 데릴 사위이자 하남인 윤회장은 <파이란>의 삼류 건달 강재와 같은 최하위계층은 아니지만, 그 역시 “모욕감”을 느끼는 루저이다. 강재가 중국이주여성노동자 파이란을 구원자로 선택하듯이, 치유가 불가능한 만성 돈 중독자로 전혀 희망이 없는 루저 윤회장 또한 에바를 구원자로 선택한다. 그가 백씨 대저택의 스펙터클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로 에바를 선택한 것은 강재처럼 멜로드라마적인 상상력에 의한 결단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사는 소박한, 그러나 절박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구원자로 윤회장을 선택한 것은 현실적인 결단인 것이다.

자기에게 순정적인 사랑을 받치는 것으로 보이는 에바와의 소박한 삶에 대한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에 의한 윤회장의 결단은 에바를 신데렐라로 만들어주는 대신 오히려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그 역시 자살에 이르는 일련의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촉매가 되고 만다. 그의 그러한 결단은 이 영화를 거의 누아르 스릴러로 몰고 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윤회장의 로마 귀족 같은 격조 높은 자살 의식은 출구없는 스펙터클 속으로의 함몰을 보여주는 허무주의적인 탄식에 그칠 뿐이다.

 

6. “보는 자”로서 나미와 영작

 

21세기 포스트모던 상류사회의 풍속도를 보여주는 불량풍속희극 영화로서 이 영화는 불량풍속희극적인 세계에 대한 냉소적 풍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추구한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궁극적 파국에 대하여 지젝(Slavoj Žižek)이 역설하듯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우리가 직면한 또는 직면해야할 궁극적 파국이란 백씨 대저택으로 상징되는 “관리되는 세계”가 여전히 아무런 파국 없이 정상적인 운영을 계속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 자체이다.

밀실에서 파놉티콘적 CCTV 모니터링으로 상징되는 “관리되는 세계”로서의 스펙터클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백여사는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위협적인 갈등 관계의 게임을 주도하는 능동적인 참여자이다. 따라서 모든 게임에 참가하는 행위자(agent)로서 백여사는 “보는 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 풍속희극의 스펙터클의 기반을 이루는 상류사회의 지각 습관들을 구성하는 클리셰, 즉 일상의 진부성에 환멸을 느끼고 그것을 넘어서서 볼 수 있는 자가 “보는 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상류사회의 기존 지각 습관을 구성하는 클리셰를 넘어서서 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자는 백씨 집안에서는 나미가 유일하다.

 

나미는 영화의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 등장하고 있지만, 참여 또는 개입보다는 줄곧 지켜보는 자, “보는 자”로 존재한다. 그녀는 상류사회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사회적 지각 습관들로 구성된 클리셰 속에서 본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영작 또한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 등장해서, 하남으로서 모욕적인 역할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시야심도 기법으로 촬영된 오프닝 시퀀스부터 그는 돈의 맛을 맛보라고 권하는 선배 하남 윤회장과는 대조적으로 “부적절한” 개입으로 “보는 자”로서의 역량을 쌓기 시작한다.

사실 나미와 영작 모두 그 스펙터클 안에서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보는 자가 된다. 이들은 기존의 방법으로는 어떤 사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사유를 창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의 필리핀 행은 더 이상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난국을 직면하여 새로운 사유 방식과 삶을 찾기 위한 선택인 것이다.

 

7. 충격적인 엔딩: 깨어난 에바의 무서운 얼굴

 

영작이 거대한 돈 창고에 쌓여 있는 돈을 보고 충격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관 속에 누워 아이들에게 돌아온 죽은 에바가 갑자기 눈을 떠 돈다발을 보고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충격적인 결말로 끝난다. 이 장면 역시 첫 장면처럼 시야심도 기법으로 촬영된다. 비를 맞고 있는 영작을 배경으로 전경에 관을 비추다 화면이 갑자기 블랙아웃이 되며 카메라는 어두운 관속으로 들어온다. 관 속에 흰옷을 입고 누워 있는 에바를 광원으로 해서 전경에 놓인 돈 더미를 음영으로 잡고 있는데, 틈을 통해 비를 맞으며 누워 있던 에바가 갑자기 눈을 뜨면서 돈다발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자, 카메라는 놀란 듯이 밖으로 나와 비가 오는 하늘을 바라보는 영작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영화는 끝난다. 이와 같이 이 영화는 돈이 불러일으킨 충격적인 장면들로 시작과 끝을 구성한다.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빗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영작의 마지막 혼란스러운 시선은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결말은 영작과 나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암시를 강하게 전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바의 무서운 얼굴은 백여사가 지배하는 불량풍속희극적 스펙터클의 닫힌 회로로부터 탈주를 결단할 때, 돈의 맛에 중독되지 않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할 때임을 우리에게 경고하는 충격을 준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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